'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 재벌 대기업도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을 받고 있다.
이들이 과연 '비선 실세' 최순실 씨에게 일방적으로 돈을 뜯긴 피해자인지, 아니면 돈을 내고 반대 급부를 챙긴 뇌물죄의 공범인지 의심이 이어지고 있는 것. 정치권에서는 특히 재계 순위 1위인 삼성그룹에 대한 의혹 제기가 줄을 잇고 있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한 것이, 최 씨의 국정 농단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국민의당은 15일 김경록 대변인 논평을 통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최순실 씨가 국민연금을 통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대변인은 "국민연금은 내부 방침마저 어기면서, 2조 원의 손실을 감수하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7900억 원을 안겨줬다"며 "이에 대한 삼성의 '대가'는 최순실에게 직접 송금한 35억 원의 자금과 대한승마협회를 통한 (정유라 씨에 대한) 180억 원 지원 계획,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200억 원의 자금"이라고 주장했다.
김 대변인은 "국민의당은 국회에서 국민연금과 삼성, 최순실의 공모 여부를 밝히고 책임자 처벌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전날 손금주 수석대변인 논평을 통해서도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을 위해 2조 원에 달하는 손실을 감수했다. 이해할 수 없는 배임 행위"라며 "대기업들이 아무 대가 없이 거액의 출연금을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에) 납부했다고 믿는 국민은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은 지난 11일 대정부 질문에서 "204억 원을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삼성의 경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 경영 승계의 중요 고비였다"며 "외국계 펀드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삼성물산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한 것은 삼성그룹에게 큰 '선물'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도 "삼성을 포함해 몇몇 기업은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이라고 내용의 공개 발언을 하고 있다.
삼성물산 합병, 무엇이 문제였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합병 후의 삼성물산이 사실상 삼성그룹 전체의 지주 회사 역할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이재용 체제'로의 세습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국민의당 대선 주자인 안철수 의원은 지난해 10월 국정 감사에서 "국민연금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적정 합병 비율을 1대 0.46으로 추산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1대 0.35라는 합병 비율에 찬성했다"며 "덕분에 삼성가(家)는 삼성물산 지분을 3.02%포인트, 지난 1일 종가 기준 7900여 억 원 더 갖게 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부터 '이상하다'고 여겨지던 부분은, 삼성물산 최대 주주(합병 전 지분 11.21%)였던 국민연금이 왜 전문가들의 판단과는 달리 '합병 찬성'이라는 결정을 내렸냐는 것이었다. (☞관련 기사 : 국민연금, 삼성 일가를 위해 배임했나?) 국민연금은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때, 통상 전문적이거나 민감한 사안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 위원회'에 위임한다. 그러나 삼성물산 합병 때는, 외부 전문 위원회가 아닌 국민연금 내부 조직 '투자위원회'가 의결권 행사 결정을 내렸다.
특히 세계 최대의 의결권 자문 회사 ISS는 당시 '삼성물산 주주라면 합병에 반대하는 것이 주주 이익에 비춰 합당하다'는 취지의 권고 의견을 냈다. 그런데도 국민연금의 결정은 '합병 찬성'이었다.
이와 관련,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책임자였던 홍완선 당시 본부장이 이 의결권 행사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이재용 부회장을 따로 만났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홍 전 본부장은 작년(2015년) 국정 감사에서 이 부회장을 만난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합병 이후의 바이오 사업 계획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고 해명했다. 합병에 찬성해 달라는 등의 '로비'를 받은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정치권의 '비선' 의혹 제기, 일리 있나?
이처럼 △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 산정에서의 문제 △ 이로 인해 '3대 세습' 당사자인 이재용 부회장이 얻게 되는 이득 △ 그런데도 국민연금이 석연치 않은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알려졌던 내용이었다. 이번에 새로 제기되는 의혹은 여기에 최순실 씨 등 '비선 실세'가 개입했느냐 여부다.
최순실 씨 등 '비선 실세'들이 정부의 주요 정책이나 인사 등에 개입했다는 것이 속속들이 알려지면서 '과연 국민연금은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느냐'는 의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는 평이 나온다. 특히 청와대 비서관이 최 씨의 '지시'를 철저히 이행하기 위해 그와의 통화를 녹음하기까지 했다는 보도까지 나온 상황이다.
최 씨 등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의사 결정에 개입하려 했다면, 그 '고리'는 보건복지부나 국민연금 고위층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 이사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현 이사장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또 기금 운용과 관련해 국민연금 내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기금운용본부 본부장직은 공모직으로, 국민연금 이사장이 복지부 장관의 승인을 거쳐 임명한다.
다만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관계에서 빠져 있는 '미싱 링크'는 최순실·청와대 측이 보건복지부·국민연금 관계자들에게 '삼성물산 합병 결정에 찬성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실제로 내렸느냐 여부다.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정치권 관계자들도 이 부분에 대해 결정적 증거 '한 방'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 공식 해명 "원칙과 절차 따른 결정"
국민연금 측은 펄쩍 뛰고 있다.
국민연금은 이날 오후 장문의 보도 자료를 내어 삼성물산 합병에 찬성한 이유, 홍완선 당시 본부장이 이재용 부회장을 만난 이유 등에 대해 상세히 해명했다. 국민연금은 "2015년 7월 의결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한 것은, 국민연금이 보유한 양사 주식의 평가 금액이 비슷하면서 국내 주식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2조4000억 원)에 달하는 특수한 상황과,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 및 주식 가치의 상승 여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합병 찬성으로 연기금이 2조 원의 손해를 봤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사실과 다르다"며 "2015년 5월 합병 발표 전날 대비 2016년 11월 현재까지 코스피 지수가 8.0% 하락했고, 삼성물산 주가는 (같은 기간 동안) 8.2% 하락한 상황으로 시장 수익률과 비교해 별 차이가 없다"고 해명했다.
특히 ISS의 합병 반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에 대해 국민연금은 "자문 기관 의견은 각사 주주의 입장에서만 고려한 결과이므로, 양사 주식을 모두 보유하면서 여러 주식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데에 따른 영향 등은 국민연금이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며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방향은 전문 기관 의견에 구속되지 않으며, 과거에도 자문 기관 의견과 달리한 사례가 있었다"고 밝혔다. 외부 전문위원회가 아닌 국민연금 내부 '투자위원회'가 결정을 내린 부분에 대해서는 "공단이 찬성 또는 반대의 판단이 곤란한 경우 전문위원회에 요청해 결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해당 사안은 '판단이 곤란한 경우'가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만약 복지부나 국민연금공단 고위층에 최순실 씨의 입김이 닿은 흔적이 발견된다면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전망이다. 이미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 등에서는 "이제 서민 최후의 보루까지 건드리나"라는 등 최 씨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목소리와 함께 "그동안 납부한 연금 돌려달라"며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을 보이는 목소리도 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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