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방문은 지난 몇 년 중국과 필리핀 간 이어진 긴 갈등 국면을 깨고 필리핀이 미국과의 군사적, 경제적 결별을 고한 역사적인 방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필리핀, 중국, 미국, 일본, 한국 등 각국의 셈법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필리핀은 진짜 미국을 떠날 것인가?
2010년 취임한 베그니노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임기 중에 친미적, 반중적 성향을 보였다. 중국 언론은 그가 미국의 편에 섰다고 본다. 그의 임기에 필리핀 내의 미군 기지가 다시 가동됐고, 워싱턴의 부추김에 일방적으로 남중국해 중재안을 제기했다는 주장이다. 반면 중국과 필리핀 관계는 철저히 망가져 필리핀이 지난 6년을 중국과 맞서며 보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결국 이는 중-미 모두 우호적 관계로 지냈던 과거와 다르게 중국을 잃고 미국에 통제 받게 돼버린 실패한 선택이라 평가한다.
그런데 지난 2016년 6월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며 급격한 정세 변화가 감지됐다. 물론 아키노 대통령 말기에 중국과 필리핀 관계가 극단적으로 악화되면서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든 양국 관계가 개선될 것이란 전망은 이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필리핀의 대통령이 "이제는 미국과 결별해야 할 때"라거나 "필리핀과 중국, 러시아로 이뤄진 새로운 동맹 축이 부상하고 있으며, 세 나라는 전 세계와 맞서 나갈 것"이라는 극단적 발언들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필리핀은 달라졌다.
중국 측은 섣부른 기대나 판단은 말자고 하면서도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지난 21일 중국 화춘잉(华春莹) 외교부 대변인은 "두테르테는 필리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며, 중국 측은 필리핀이 주권 국가로서 자신의 판단, 자국과 자국민의 근본적 이익에 근거하여 내린 외교 정책을 존중한다"고 밝혀 필리핀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미국, 일본, 한국 심지어 중국과 필리핀조차 두테르테 대통령 발언의 진의와 그것이 향후 아시아 및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한편, 17일 응웬치빈 베트남 국방부 차관은 카라 애버크롬비 미국 국방부 동남아시아 담당 부차관보와 만난 자리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평화, 안정, 번영을 가져온다면, 베트남은 해당 지역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애버크롬비 부차관보는 이 자리에서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재균형 전략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중국 여론은 필리핀이 중국으로 돌아오니 베트남이 미국의 앞잡이(马前卒)가 되려 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과 미국,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이는 비단 필리핀과 베트남의 문제가 아니다. 강대국 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한국에도 대단히 익숙한 문제이다.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다지면 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선택했다는 지적에 시달리고, 미국과 긴밀한 협력을 원하면 중국을 버리고 미국을 선택했다는 지적에 직면한다.
현재 많은 국가, 조직, 사람들이 중국과 미국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고 있는데, 이러한 지적과 압력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다양한 이익이 얽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한국이 지난 2015년 초에 중국이 주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고민할 시기나 9월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을 결정할 당시에 미국의 불편한 반응과 국내의 지적을 기억할 것이다.
반대로 2016년 북한의 핵 실험 이후에 진행된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배치 논란 때는 중국의 정부, 학계, 언론 등이 한국에 반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과정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주제와 논쟁은 21세기 현존하는 강대국과 떠오르는 강대국 사이에 우리는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의 협력이 필요하고, 사안에 따라서 때때로 그들에게 협력한다. 한국에 관련한 이슈로 그들과 협력할 때에는 괜찮다. 문제는 중국과 미국 간 전략적 경쟁에 때때로 이와 무관한 한국이 압력과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다. 지난 5000년 동안 한국은 현존하는 강대국과 떠오르는 강대국 간 갈등에 적지 않게 얽혀왔다. 어려운 선택을 통해서 때로는 평안을 때로는 국난을 겪었다. 21세기는 그때와 다르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중국과 미국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두테르테 대통령은 귀국 후에 다시 "필리핀은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나라와도 군사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며 "남중국해 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해결하고 국제법에 따라서 처리할 것"이라 밝혔다. 과격했던 발언들을 수습하는 모양이다.
일부는 약소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이렇게 줄타기를 하다가 큰 코를 다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 순방 이후에 그의 손에 들린 두둑한 경제적, 군사적 성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는 실리를 취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은 이제 중국과 미국 그 어느 누구에게도 확실한 적이 아니다. 물론 여러 측면에서 강대국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현실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21세기 각국의 이해가 복잡하게 교차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시점에 굳이 한 편에 서서 다른 하나를 확실한 적으로 돌리는 경직된 외교가 옳은가라는 질문은 필요하다. 최소한 국면 전환 가능성 정도는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한데,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번 순방을 통해 이를 되찾은 것이다.
한국과 상황이 다르니 무조건 비교할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도 21세기 정세와 국익에 근거한 실용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국가 간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간 수없이 한국이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하며 독립적 외교를 펼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중국도 우리가 미국을 버리고 오로지 그들 편에 서기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아가 한중 관계는 시혜 관계가 아니다. 중국은 주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금의 세계는 전환기로 정세를 예측하기 어렵다. 한국과 같은 상대적 약소국이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며, 때로는 선택과 희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어느 하나에 확실한 적이라 생각될 경우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의 대외 정책에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겪어왔다. 흑백의 경직된 외교를 고집할 때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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