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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몽니 부려서 해결될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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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몽니 부려서 해결될 일 아니다"

[정세현의 정세토크] "윤병세 장관, 아직도 朴대통령 줄 섰나"

이른바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가운데,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비롯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전투기 사업 등에도 최 씨가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위의 결정들은 모두 청와대를 중심으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과거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과 비교했을 때 위의 사안들에 비선의 개입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정 전 장관은 "유관 부처 간에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그 보고가 대통령한테 올라간 뒤에 바뀐 것이라면 대통령이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도 볼 수 있다"면서도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주무 부처 장관이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말한 뒤에 갑자기 통보가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비선이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으로만 세더라도 벌써 67년이나 됐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굉장히 엉성했지만 이후 국가 운영의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정책 결정 과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며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정 전 장관은 "바깥에서 툭 던지는 한 마디가 국가 방침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전직 관료로 허탈한 느낌마저 든다. 저도 이런 정도인데, 지금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관료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박 대통령의 침묵에 동조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 전 장관은 "국무위원은 자기 업무 영역 밖의 것도 이야기할 수 있고 대통령과 생각이 달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들은 왜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는지 모르겠다. 퇴직 이후 연금 때문에 그런 건가"라고 쏘아 붙였다.

그는 "관료가 영혼이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정무직 정도 되면 없던 영혼도 생겨야 한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지부상소(持斧上疏,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라도 올리고, 그래도 관철되지 않는다면 장관직을 버리고 나와야 한다. 특히 대선 때부터 캠프에 있다가 장관까지 했으면 그렇게 아쉬울 것도 별로 없지 않나"라며 "지금 국민들은 소관 업무와 관련해서 대통령 앞에서 소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국무위원이 있길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전 장관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게 나라냐'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식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느냐는 불만도 있는 것"이라며 "국정을 운영하는 현장의 책임자들이 소신도 없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활용해서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비선이 귀띔해 준 대통령의 발언이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만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지난 1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이 어디까지 이뤄졌는지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대북 정책도 최순실 씨가 좌지우지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박근혜 정부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고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개성공단 전면 중단 조치를 내렸습니다. 이후 7월에는 사드 배치를 확정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위 사안들을 결정하기 직전에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는 공식적인 라인에서는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검토 중이라거나, 그런 방향으로 추진하지 않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리면서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최 씨가 "2년 내에 북한이 붕괴하고 통일이 된다"고 말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문 수정과 '통일 대박'발언도 최 씨의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사이비 종교인의 딸이 중차대한 남북관계를 포함해 한미, 한중 관계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는데요.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투명하게 정책이 결정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세현 :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을 때 부처 간 정책 결정을 위해 상당히 진통을 겪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정부의 정책은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닌, '정책 결정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하면서 거의 매일 대책 보고서를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저 혼자 하는 것은 아니었고 통일비서관, 외교비서관, 국방비서관, 국제안보비서관등이 함께 협의해서 어떻게 대처할지를 결정하고 이걸 수석비서관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면 수석비서관이 이걸 가지고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협의하고 이후에 대통령에게 보고했죠.

물론 비서실장이 회의를 주재하기 전에 수석비서관이 통일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당시 안기부장) 등과 소통하면서 의견을 모아서 정책 대안을 건의하면 대통령이 결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정책 결정 과정을 겪었고, 서로 의견이 부딪혀서 의견 조정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 간의 의견이 다른 사안들이 계속 나타나니까 1994년 4월 7일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가 만들어졌습니다. 관계부처 장관들끼리 정책 조정을 끝낸 뒤 그 결과를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의 주재는 통일부총리가 맡았고 여기에 외교부 장관, 국방부 장관, 안기부장, 외교안보수석, 비서실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회로 이름이 바뀌었고 노무현 정부 때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개편됐습니다. 즉 대한민국 정부는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이러한 식으로 정책을 결정한 겁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주무 부처 장관이 기자들을 만나거나 국회에서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통보가 이뤄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비선이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유관 부처 간에 정책 방향이 결정되고 그 보고가 대통령한테 올라간 뒤에 바뀐 것이라면 대통령이 고심 끝에 결정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보고가 올라갔다는 것 없이, NSC를 열어서 결정을 해버렸습니다. NSC가 일종의 '통과 의례'가 된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집권 초기부터 대체 누가 대통령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됐습니다. 처음에는 이재만‧안봉근‧정호성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인 줄 알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막후 원로그룹'인 이른바 '7인회'도 아니고 당에서 소위 '친박'이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아니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문고리 3인방도 아니라고 하니, 혹시 우리가 모르는 대단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나 싶은 의심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아니었다는 것이 최근 보도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한민국이 정부 수립으로만 세더라도 벌써 67년이나 됐습니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굉장히 엉성했습니다. 1인 통치성도 강했고, 특히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러한 특성은 더욱 강조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국가 운영의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정책 결정 과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의 행정 시스템이 우리나라 행정의 운영 원리로 도입되면서 나름대로 체계를 갖춰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 바깥에서 툭 던지는 한 마디가 국가 방침으로 정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전직 관료로 허탈한 느낌마저 듭니다. 저도 이런 정도인데, 지금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관료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일일까요? 특히 장‧차관들과 수석비서관들이 느끼는 허무함은 상당할 것입니다.

유관부처 공무원 입장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자괴감이 드는데 이미 결정된 것을 물릴수도 없고, 그대로 집행해야 하는 최일선에서 책임을 지고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곤혹스러울 겁니다.

정부의 결정이 고심 끝에 결정된 것이라면 문제가 있더라도 국민들을 설득해가면서 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지만, 비선에서 코치해서 결정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비선에서 결정했지만 나쁘지 않으니까 따라가자? 이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는 논리입니다.

▲ 지난 1월 6일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전해진 직후 열린 NSC 회의를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초창기에 진영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초연금 지급방법을 놓고 청와대와 이견을 보이고 결국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처음 사의를 표명했을 때 청와대는 이를 반려했지만, 진 장관은 이건 장관 이전에 '양심의 문제'라며 사의하겠다는 뜻을 고수했는데요. 본인이 장관이라면 이 정도 소신은 가지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세현 : 선비 정신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관료가 영혼이 없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정무직 정도 되면 없던 영혼도 생겨야 합니다. 말단 관료 시절에는 자기 결정권이 제한돼있지만, 정무직은 다릅니다. 하루를 해도 장관이고 1년을 해도 장관인데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또 국무위원은 자기 분야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국가 업무 전체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자리가 국무회의입니다. 즉 국무위원들은 다른 부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통일부 장관의 경우 '국무위원에 임함, 통일부 장관에 보함' 이라고 돼 있습니다. 통일부 장관이 일종의 '보직'인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무위원은 자기 업무 영역 밖의 것도 이야기해야 하고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퇴직 이후 연금 때문에 그런 겁니까?

장관 정도 됐으면 지부상소(持斧上疏)라도 올리고, 그래도 관철되지 않는다면 장관직을 버리고 나와야 합니다. 특히 직업 관료로 장관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장관을 하고 퇴직하는 것이 꿈일 수도 있지만, 대선 때부터 캠프에 있다가 장관까지 했으면 그렇게 아쉬울 만한 것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정책을 추진하려고 노력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용기 있게 사표 던지고 나가는 겁니다.

물론 사표를 던지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지금 국민들은 소관 업무와 관련해서 대통령 앞에서 소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국무위원이 있길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인 겁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게 나라냐'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안에는 대통령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식으로 국정을 이끌고 있느냐는 불만도 있는 겁니다. 대통령 밑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현장의 책임자들이 소신도 없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활용해서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비선이 귀띔해 준 대통령의 발언이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만 있는 겁니다.

박근혜, 버틴다고 해결될 일 아냐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다는 설명을 한 적도 있는데, 결국 대통령이 남북관계와 한중 관계, 미중 관계를 위기로 몰았습니다. 국민 여론은 하야나 탄핵으로 집중돼있는데 정치권에서는 '거국 중립 내각'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총리가 내치를 맡는 이른바 '책임 총리'도 박근혜 정부가 생각하는 카드로 보입니다. 앞으로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1년 4개월인데 지금처럼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세현 : 일단 과거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태우 정부 말기에 현승종 고려대학교 총장이 넉 달 동안 총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대통령이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총리한테 모든 힘이 몰리는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했는데, 당시 외무부 장관을 겸직하면서 과도정부의 수반이 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도 있습니다. 그는 하야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하게 했고 선거를 치러서 새로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했습니다. 허정 모델로 갈 것이냐, 아니면 노태우 정부 말년에 이뤄진 현승종 총리 모델로 갈 것인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델로 가든 선출된 권력인 국회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선출 권력인 대통령이 저렇게 돼버렸기 때문에 국회가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국회의장이 중심이 돼야 하는데 국회의장이 총리를 겸직할 수는 없기 때문에, 허정 모델로 과도 내각을 이끄는 총리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안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드 배치 문제도 이걸 밀어붙일지 잠시 중단할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야당은 최근 국가 수습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거국중립내각'과 관련, 처음에는 여기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이를 받겠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힌 이후에는 일단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과 관련한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립 내각에 들어가면 박근혜 정부 실정에 대한 책임을 같이 쓰게 된다는 것 때문에 망설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야당의 입장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정세현 : 야당이 입장에 변화를 둔 것은, 국민들의 분노가 이렇게 크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주말을 기점으로 야당에서 거국중립내각 이야기가 쏙 들어갔는데, 박 대통령의 하야나 탄핵을 원하는 여론이 높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이 시국 선언에 나서고 있는데, 4.19 때와 상황이 유사합니다. 국민의 불만과 원성이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는 12일까지 집회가 이어진다고 하는데, 자칫하면 촛불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좀 더 시위가 강경해질 수도 있습니다.

▲ 지난 10월 29일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 집회에 모인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물론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주자가 먼저 거국중립내각에 찬성 의사를 밝혔는데, 이제 와서 진상규명이 우선이라고 하니,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분노할 여지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정치 세계의 하루는 보통 사람의 일생보다 긴 시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닷새나 지난 뒤에 국민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사건이 웬만한 일이었다면 야당 입장에서도 거국 내각 정도로 마무리하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정치인들은 이 사안을 가지고 판을 너무 크게 벌리는 것은 오히려 본인의 입지를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 비선의 국정 개입 정도가 너무 심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면서 국민 여론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정치인은 이러한 국민 여론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상 규명부터 하자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습니다.

프레시안 : 우선 진상을 규명하고 이후에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건가요?

정세현 : 거국내각이라는 것이 까딱 잘못하면, 누구를 앉히느냐에 따라 아무런 힘도 못 쓸 수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의원(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이 대통령이 주도해서 임명하는 총리는 '헬렐레 총리'라면서 수습이 안 될 거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보다는 국회가 주도해서 정국 수습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정 모델을 따라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과도적인 상황에서 국회에 의해 선정된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과도 정부 수반으로 선거 관리하면서 이 사건을 우선 심판하고 수사해서 처벌할 것 있으면 처벌하고 책임을 물을 것이 있으면 묻고 가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재 자리에 있으면서 뭔가를 바꿔보겠다고 해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겁니다. 더구나 검찰이 지금까지 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자리를 지킨 상태에서 나온 수사 결과는 아무도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특검을 도입하면 해결될까요? 전례에 비춰봤을 때 특검도 사실 '솜방망이'입니다. 결국 주체가 문제인데, 국회에 힘을 실어주고 검찰도 국회와 상의하면서 사건을 정리해줘야 합니다.

프레시안 : 국회가 주체가 되려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 위임이 필요합니다. 박 대통령은 국회에게 권한을 위임할까요? 여야의 협조는 가능할까요?

정세현 : 그게 문제입니다. 내년에는 대선과 연계돼 있기 때문에 대권 주자들은 셈법 계산을 하느라 분주할 겁니다. 그런데 수적으로 야당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국민 여론이 워낙 강경하기 때문에 대통령도 무작정 버티는 것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 지난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씨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프레시안 : 지금이 한국 현대사 최악의 위기인 것 같은데, 이 바닥에서 더 내려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정세현 : 더군다나 현재 동북아 정세를 봤을 때 국제정치적인 안보 위기까지 함께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국가안보실장이랑 외교안보수석은 그대로 놔뒀다고 하지만 그동안 그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의견을 나눈 것이 아니라 그저 명령하는 식으로 했기 때문에 이런 참모들에게 권한을 준다고 해도 이걸 행사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국회가 강하게 나서야 합니다. 새누리당도 당장의 주도권을 잃는다는 생각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안을 해결하는데 새누리당도 함께 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어야 내년 대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 싸움하고 주도권 뺏겼다고 생각하고 몽니 부리면 내년에 대선 후보도 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미국, 이미 방향 틀었다

프레시안 : 최근 미국의 기류 변화를 좀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 외교협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 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실패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지난 10월 21일~22일(현지 시각) 북한 당국자와 미국 민간 전문가 및 전 당국자들의 1.5트랙 접촉이 있었습니다.

또 25일(현지 시각) 제임스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CFR 간담회에서 북한을 비핵화하겠다는 생각은 실패한 개념이라면서 미국은 북한의 핵 능력을 제한하기 위한 유인책을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향후 미국의 대북 정책이 '전략적 인내'에서 '관여'로 가는 시발점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정세현 : 방향을 트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외교부는 북한에 대한 강한 제재와 압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외교관들은 미국이 특정한 방향으로 가면 여기에 맞춰 따라가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한미 동맹, 한미 공조와 같은 것들이 외교의 기본 방침처럼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을 보자면 윤 장관의 발언은 완전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건데, 이건 대통령 때문이라고 봅니다. 발언의 청자가 국민도, 미국도 아닌 박 대통령에 맞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9월 18일(현지 시각) 한미일 외무장관 회의 이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이 비핵화 대화에 임해야 한다"며 "시급히 필요한 것은 그들이 현재 상황에서 (핵 실험을) 동결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CFR에서 전략적 인내가 실패했다고 이야기한 뒤에 나온 발언입니다. 대화와 협상 방식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상 CFR 입장으로 굳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케리 장관이 이를 받아서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이 기자회견 이후에도 한국 외교부는 압박과 제재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럼 윤 장관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서 이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윤 장관은 그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재와 압박만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닐 겁니다. 대통령이 혹은 비선이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줄을 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CFR에서 나온 것은 정부 입장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CFR 회의가 무슨 일개 학회의 세미나 정도 수준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실제 실무 경험도 가지고 있고 오랜 기간 동안 상아탑에서 연구를 하기도 하는, 미국 대외 정책의 산실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CFR은 자신들이 발간하는 보고서를 적실성이 높도록 수정하는 작업을 거쳐서 실제 정부가 쓰도록 하고, 소속돼있는 인사들을 정부에 진출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제 경험으로는 미국이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좀 그렇지만, 미국의 영향권 하에 있는 나라들이 미국의 입장에 순응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CFR이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2001년 2월 CFR 관계자가 한국에 와서 지나가는 말로 대북 송전 협의를 계속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북한 경수로 공사가 늦어지고 있는 상황이라서 북측에서 전기를 미리 좀 보내달라고 했었습니다. 200만 킬로와트 송전을 요청했는데 너무 많아서 50만 킬로와트 정도로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CFR이 한국에 와서 송전 협의를 중단하라고 주장한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당시 새로 들어선 조지 W. 부시 정부는 북한을 악으로 규정하고, 1994년 제네바 합의를 깰 준비를 천천히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 들어와서 압력을 가한 것이죠.

직접 오지 않더라도 종이 한 장으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논 페이퍼 (None-Paper), 즉 발신도 수신도 명확하지 않은 메모지 같은 형식의 글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합니다. 만약 이것이 문제가 되더라도 자신들은 그런 문건을 준 적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을 하기 위해서죠.

미국 국무부가 자신들이 직접 이야기하기 곤란한 사안을 CFR이 대신 해주고 있었다면, 지금 CFR에서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 역시 장차 국무부에서 채택할 만한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CFR 보고서와 케리 장관 발언, 그리고 10월 북미 간 1.5트랙 협상도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 선회와 맞물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도 적어도 양다리 혹은 궤도 수정을 고려했어야 합니다. 외교장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우리는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만 이야기하지만, 미국이 정책 변화의 조짐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만약을 생각해서 퇴로를 열어 둬야 한다. 따라서 압박과 제재를 이어갈 것이지만, 이것은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주장한 것이라고, 기회가 될 때 밝혀야 한다"정도로 빠져 나갈 구멍을 마련했어야 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 의미에서 10월 북미 간 접촉은 주목할 만한 접촉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반관반민 접촉이었지만 미국 측 인사들이 북한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미국은 카터가 어디까지나 개인 자격으로 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카터의 교통편을 제공했습니다. 정부가 하지 않으면 교통편을 제공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또 북미 간에 비공개 접촉을 할 때 이번에 만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나 독일 베를린 등이 주요 접촉 장소입니다. 쿠알라룸프르가 한국의 시선을 따돌리기에 좋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북미 간 접촉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보고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식 회담으로 가기 위한 수순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번 접촉을 주선한 사람이 리언 시걸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인데, 양측 간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에 핵 동결로 시작해서 평화협정까지 논의하는 회담이 열린다면 응할 수 있겠느냐는 점을 타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북한은 평화협정부터 체결하자고 했을 것이고 미국은 핵 동결로 시작해서 평화협정까지 가자고 했을 겁니다.

북한은 핵 동결과 한미 연합훈련 중지를 맞바꾸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이 당시 접촉에서 이러한 부분도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훈련 중지는 앞으로 더 협의해야 할 문제지만 핵 동결과 한미 연합훈련을 맞바꿀지, 아니면 약간의 순차를 둘지는 협의를 해보되 최종적으로 평화협정까지 가면 나오겠느냐는 부분을 상당히 진지하게 살폈을 것입니다.

북미가 저 정도까지 대화를 진행시켰다면 북미 간에 비공개 접촉은 얼마든지 눈에 띄지 않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뉴욕 채널도 있구요.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각자 상부에 보고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내 유력 대선 주자 캠프 쪽에도 이런 사실이 보고 됐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실제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곳은 CFR이라고 봅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들이 회의를 해서 낸 결론으로 북핵 문제를 이끌고 나가려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외교부는 이런 사실에 착안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가하면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24일 '조중(북한·중국) 국경공동위원회 제3차 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정세현 : 국경 문제는 핑계입니다. 사실은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린 북미 접촉 결과를 알아보려 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과 중국은 2년마다 국경 실무회담을 엽니다. 1962년 협상 이후에 1964년 이를 획정하는 실무 의정서를 체결했는데요. 2년에 한 번씩 하는 이유는 국경선인 압록·두만강이 국제 하천이기 때문에 경계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외교부 부부장이 갈만한 사안은 아닙니다. 국장급이나 과장급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미 틀이 정해져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류전민은 쿠알라룸프르 회의 결과를 들어 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 대북·한반도 정책을 어떤 식으로 조정할 것인지를 구상하는 현장 조사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관측됩니다. 이는 북한이 이미 5차 핵실험까지 했지만, 더 이상 사고를 치지 못하게 하도록 중국이 사전에 관리를 하겠다는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중국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살펴봐야 할 대목입니다. 북한이 핵 카드를 들고 미국과 협상하려면, 협상의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중국과 협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이런 점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겠네요?

정세현 : 미국의 새로운 정부가 출범해야 가능하겠지만, CFR 입장에서는 새로운 정부에 건의할 수 있는 안을 빨리 만들어야 하고, 중국도 미국의 새 정부가 어떻게 움직일지 탐문하기 위해 북한에 와서 사전 정지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다른 점이 한국 정부가 극력 반대하면 미국이 대화 프로세스를 진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 북한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굉장히 중요하고 거의 전부이다시피 한 문제지만, 미국에서는 아주 작은 문제에 불과합니다. 자기들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북미대화를 하면 안 된다고 할 경우 하면 미국 정부가 굳이 나서지는 않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좀 더 강화되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난공불락'의 상태까지 될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명분으로 북한의 핵을 쓸 수도 있습니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북핵은 미국에게 '꽃놀이 패' 입니다. 그런데도 제재와 압박만을 부르짖고 있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보면, 이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 수십 년'의 기반을 닦은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나쁜 정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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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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