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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신자유주의'가 추상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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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反신자유주의'가 추상적이라는 주장에 대해

[기고] 이 시대의 민주연대는 '반신자유주의연대'

반MB'의 외피를 쓴 '민주대연합'과 '반신자유주의연대' 주장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또 한 번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한마디로 '반신자유주의연대'가 추상적이라는 '비판 아닌 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이런 비판이 어제, 오늘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무슨 말 좀 할라치면 그 내용과는 무관하게 추상적이니, 거대담론이니 하면서 딱지 붙이는 것이 관행이 되어버린 지는 이미 십 수 년이 지났다. 따라서 새삼 얼굴을 붉힐 일도 아니지만, 이 사회에서 나름 지성과 개혁성을 겸비하였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언제까지 되풀이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진정 신자유주의가 추상적이라고 믿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른바 그 '추상성'이 진보좌파를 비판하는 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좌파가 추상적이어서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 반대를 떠들다보니 그들을 가르치려 계몽주의적인 길을 걷게 되고 그렇다보니 결국 그들을 정치적으로 대상화시켜 고립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따라서 대중이 알기 쉬운 '민주대연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다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역시, 문제는 신자유주의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추상적인가. 추상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동의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규정이 바로 '시장지상주의'이다. 우선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때 시장은 자본주의가 막 생성되는 근대 초처럼 여러 사회관계들 가운데 하나로 존재하는 그런 시장, 혹은 그것들과 경쟁하는 그런 시장이 아니라 이미 그 동안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여타의 사회관계들 위에 우뚝 선 자본주의시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시장지상주의'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만이 이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원리이자 규범적 준거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의 외부를 고민하는 그 이외의 어떤 원리와 규범의 존재 자체도 부정된다. 그것은 이윤, 경쟁력, 생산성 등으로 상징되는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 논리 아래 이 사회의 다양한 관계들을 모두 위계화, 복속시키고자 하는 파시스트적인 독단적 발상과 기획이다.

따라서 이에 근거할 때 그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최소한의 '공공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토지, 물, 전력, 건강보험, 교육조차 가차 없는 해체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들을 민영화, 사유화한다는 것이 결국 시장지상주의와 긴장관계에 있는, 무언가 그것과는 상이한 운영원리와 규범의 흔적 위에서 작동되는 사회관계들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들에 대한 파괴와 제거가 3당합당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자유주의 우파 김영삼 정권, 그리고 DJP연합으로 집권한 자유주의 좌파 김대중 정권, 그들의 '청출어람'을 꿈꾸었던 '좌파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에 의해 강화되어 왔으며 지금 신자유주의 우파인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세계화, 4대부문 구조조정, 한미FTA, 그리고 지금 한반도 대운하로 상징되는 '공공재의 사유화' 시도는 그 상징들이라 할 수 있다. 기우에서 말하지만 이러한 진단이 이들 사이에 그 어떤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들 정권에 대한 대중의 인식 차이, 지지 정도 여부와 무관하게 이러한 흐름이 순화,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사회관계를 재편하는 역사특수적인 구성 및 운영 원리이자 규범으로 특정한 정책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런저런 진보적, 개혁적 정책을 디자인하는 것과 이것에 무지한 채 정책만을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전자가 '반신자유주의연대'에 해당된다면, 후자는 '민주대연합'에 기울어진 세력들이 지닌 일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진보좌파의 정치(학)와 보수세력들의 정치(학) 사이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이다. 진보의 출발점은 지금 이 순간 다양한 사회관계들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에 있으며 그 속에서 드러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외침과 몸짓 그 자체이다. 이것처럼 구체적인 것이 또 어디에 있는가.

경제성장률과 수출물량을 수량화시켜 제시한다고 그것이 실감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고통 받는 대중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추상일 뿐이다. 전체 사회구성원 가운데 10%가 향유하는 지금의 풍요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머지 구성원 90%와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뼈 빠지게 일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존재로 숨쉬기 힘든 그들에게 '그 풍요'는 '낯선 것'인데, 이 '낯설다는 것'–고상한 말로 하면 '소외'라고 할 수 있다–만큼 '구체적인 것'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러한 구체성이 신자유주의가 재편한 '10:90의 이분사회'의 특징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불가능

둘째, 여전히 신자유주의자가 민주주의자일 수 있다고 믿는가. 이미 신자유주의는 독단적인 사회조직 및 운영원리이자 규범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도 다시 이런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은 안타깝다.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설파하듯 민주주의는 법, 제도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무엇을 위한 수단인가. 대중의 자기지배를 위한 수단이다. 자기지배라는 것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사회에 다양한 모습들로 존재하는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대중의 다양한 실천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을 향한 대중의 자기지배 실현의지의 실천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민주주의를 법, 제도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역설적 행태를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로 제출하는 것이 복잡다단한 근대사회에서 대중의 '직접지배'는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지배를 위한 하나의 수단인 대의제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교묘하게 바꿔치기 한다. 이것은 엄청난 논리, 역사적 비약이자 눈속임인데, 아무리 대의제가 중요한 수단이라고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 그 자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짓을 할까. 그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무엇인가.

▲ ⓒ프레시안

이 지점에서 다시 질문하자.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관계들을 재생산시킬 때만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노동현장에서는 비정규직,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자본에 의해 더욱 더 극단적인 착취와 차별에 고통 받는다. 노인, 장애인 등 소수자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시장부적응자'라는 이유로 주변으로 밀려난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모토이다. 그리고 자연, 생태는 자본의 이윤 증식을 위해 남아 있는 마지막 황금거위로서만, 권력과 부를 소유한 자들의 재충전을 위한 '휴식의 녹색산업'으로만 인식될 뿐이다. 이런 신자유주의가 대중의 자기지배를 증진시키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제고에 기여하고 있는가. 이와 달리 허울 뿐의 주권을 지닌 대중은 전문가를 자임하는 '낯선 자들의 결정'-'소외된 결정'-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이에 성난 대중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 맞냐'고 반문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러한 상황을 추동한 자유주정치세력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말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가능하다. 단 민주주의를 지배엘리트들의 자유로운 경쟁과 선거를 통해 그들을 거부하거나 승인할 수 있는 제도의 보장과 동일시할 때만 그렇다.

이것이 바로 루소(J. J. Rousseau)가 통찰한 바 있는, 대중을 선거 때만 주인으로 만들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노예로 전락시키는 엘리트민주주의이다. 바로 여기에 이들이 민주주의를 법, 제도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협소한 발상을 유지할 때만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무관하다는 것을, 따라서 양자가 병존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가 드러내는 온갖 반사회적 폐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기 위한 대중의 자기지배를 향한 실천이라고 규정하면 그런 폐악을 추동한 자들은 반민주주의자가 된다. 바로 여기에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엘리트민주주의의 발상을 신주단지 모시듯 부여잡고 놓지 있는 이유가, 반대로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그 오랜 '인민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상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것의 불가능함을 설파하고 조롱하는 이유가 간직되어 있다.

그들은 대중이 민주주의의 발상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는 자들,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그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해 그렇게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진짜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촛불시위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그렇게 찬탄하면서도 대중의 자기지배를 더욱 촉진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보다 이제 촛불을 끄고 법과 제도 안으로 돌아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국회'로 대중을 인도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좌파로 전향한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은 신자유주의 우파인 수구정치세력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척하며 대중을 기만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 정치적 행태는 더욱 신랄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금 이 순간 민주연합을 외치면서 그와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것이 그 증거 아닌가.

누구든, 모르면 배워야한다

이제 이 정도로 글을 맺자. 이렇게 말해도 신자유주의가 추상적이라서 여전히 반신자유주의연대는 안 되고 민주대연합은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기우에서 이지만 반신자유주의 연대가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민주연대라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민주주의는 화석이 아니라 끊임 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자. 진보좌파가 대중을 가르치려하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그것에 대해 굳이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 누구든 모르면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은 원래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자기지배의 의지가 정치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엘리트 민주주의와 이론적, 실천적으로 어떤 긴장과 모순 속에 있는지를 모른다면 분명히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자신들의 촛불을 끄게 만들려고 하는 세력이 단지 이명박 정권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정치세력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아직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중이 이 사실을 인식하는 데 그 어떤 조그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런저런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겉으로는 대중의 정서, 의지를 존중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그들을 '정치적 무능아'로 만들어 정치허무주의를 조장하는 발상과 행태를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 대중과 함께 논쟁하고 서로의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이 독단의 신자유주의체제를 넘어나가는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을 삼키는 심정으로 삼켜야 할 진보좌파에 대한 절절한 비판의 자기화는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고민과 실천의 과제로 남아 있다.

진정 대중이 '반신자유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정작 그것은 이 위기의 시대에 대중이 반신자유주의로 결집되어 자기의 지배의지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어떤 세력들의 불안함을 투사한 것은 아닌가. 이 체제 안에서 한편으로 재산과 교양을 모두 누리면서, 다른 한편 '개혁과 진보'의 이미지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어떤 세력의 욕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닌가. 옛 어르신들은 그것을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도둑놈 심보'라고 말씀하셨다.

진정 대중이 느끼는 고통스런 현실은 항상 그 어떤 사실적인 문구와 개념, 그 어떤 감각적 표현보다 더욱 적나라하다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란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의도 하지 않은 '설교조'의 불필요한 글을 쓰지 않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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