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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보다 더 무서운 '간첩 아들'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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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보다 더 무서운 '간첩 아들' 낙인

[30년, '조작 간첩' 인생의 기록] 제주 김인봉-장재성 사건 2

아버지 김인봉 씨가 수감된 사이, 집안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금기시됐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면서 간첩죄가 얼마나 나쁜 건지를 수시로 교육받았습니다.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간 가족 모두가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들 성완 씨는 아버지 김인봉 씨의 안부를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되셨지만, 그래도 성완 씨 본인만 잘하면 생활하는 데 별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활달한 성완 씨는 중학교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시골 학교였지만 도시 어느 학교 못지않게 선거 운동도 했습니다. 선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선생님들이 성완 씨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성완아, 학생회장 다른 친구에게 양보하면 안 되겠니?"

선생님 한 분은 먼 친척 되시는 분이었고, 또 한 분은 성완 씨를 예뻐하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아주 잘했던 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저보다 더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면 양보하겠다고 했어요."

▲김인봉 씨 아들 김성완 씨. ⓒ프레시안(서어리)
성완 씨가 학생회장을 양보하겠다고 한 그 친구는 선거 전날 입후보했고, 선거 운동을 따로 하지 않고도 다른 후보와 큰 표 차로 당선됐습니다. 평소에도 워낙 친한 친구였던 터라 함께 학생회 일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저한테 선거에 나가지 말라고 얘기한 게 아버지 영향 때문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그냥 워낙 저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친구가 있으니 그 친구가 학생회장을 하는 게 맞다고 저는 그렇게 납득을 했던 거죠."

성완 씨의 착각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겠다는 성완 씨를 만류했습니다. 이번엔 싫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선거 날짜가 차일피일 뒤로 밀려났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회장을 학생들의 투표 없이 임명해버렸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이 모두 '간첩 아들' 낙인 때문이란 걸 안 성완 씨는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삐딱해진 거죠. 내가 열심히 해도 안 되는구나 생각하니 공부가 되겠어요? 그때가 고3 때였는데 공부도 놓고 학교에서도 반항하면서 선생님들한테 소위 말해 찍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방황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왜 간첩이 되었을까?'

"노는 걸 좋아하시긴 했지만 우리 형제들에게는 따뜻한 아버지셨습니다. 공부하라고 닦달하기보다는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는 걸 많이 이야기하셨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만 생각하던 분이셨습니다. 우리 오 남매도 키우고 부모님까지 모셔야 했으니까요. 여기선 농사 말고는 마땅히 할 게 없어 일본에 갔고, 다녀와선 얌전히 농사만 지으셨는데 대체 간첩이 될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김인봉 씨 영정 사진. ⓒ프레시안(서어리)
7년형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입소 6년 만인 1976년 8월 15일 풀려나오셨습니다. 성완 씨가 대학교 1학년생이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유신 시대 때 대학을 다녔는데 그때 처음으로 입영훈련(집체훈련)이란 게 생겼습니다. 제가 다니던 제주대학 학생들은 서귀포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길 찾아오셨어요. 입영훈련 퇴소할 때가 되니 집에 가서 아버지를 뵙기가 무섭더라고요. 너무 오랜만이기도 해서…. 저랑 보름 차이로 태어나서 쌍둥이처럼 자란 사촌이 있는데, 그 애랑 시간 때우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가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뻘쭘하게 인사만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9년, 성완 씨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척수를 다쳐 온몸이 마비되는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손가락만 겨우 까딱할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 하루종일 옆에 있지 않으면 먹는 것은 물론이고 대소변도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성완 씨의 곁을 지켜준 이가 아버지 김인봉 씨였습니다.

"농사일이 바쁠 땐 아버지도 어머니랑 같이 밭에 나가시는데,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제 옆에 계셨죠. 물 가져다 달라 하면 물 가져다주시고, 때 되면 대소변 받아주시고, 그거 말곤 하루종일 둘이 같은 방 안에 말없이 있었습니다."

성완 씨는 TV를 보거나 책을 읽었고, 아버지는 친구분들을 불러 가끔 바둑을 놓거나 마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자신이 옥고를 치른 이야기 한 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한숨만 길게 내쉬셨죠. 과거에 어쨌다는 얘기는 안 하셨습니다. 출소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집에서 아버지 이야기는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감옥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입을 막았습니다.

"자기가 거기서 뭐 했는지는 이야기 않고, 구치소에서 6년을 살았으니까 별의별 사람을 다 봤다며 어떤 죄인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이 있었고 그런 이야기만 좀 했어요. 그럼 나는 '거짓말 하지 말아라. 무슨 벼슬이나 되는 양 죄인 이야기를 하냐'고 입 다물라고 했어요. 나는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듣기 싫고 머리만 아프고 생각도 하기 싫으니 하지 말라고 했어요."

▲김인봉 씨의 아내 송찬선 씨. ⓒ프레시안(서어리)

척수를 다친 아들의 손발 노릇을 10년 넘게 하던 아버지는, 척수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친 부위가 경추였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가장 큰 암종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거의 전신 마비 상태로 한 6개월 누워계셨습니다."

아버지를 진료한 의사는 "(고문) 후유증 같다"고 했습니다. 뒤늦게야 아버지가 간첩 죄로 잡혀가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몸져누운 지 6개월만인 1993년,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돌아가실 때 눈도 못 감으셨습니다. 나중에 신부님이 오셔서 편히 눈을 감으시라고 하니 그때서야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돌아가시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들었습니다.

"아버지랑 저랑 10년을 넘게 한 방에서 하루종일 같이 있었는데, 왜 한 번을 안 물어봤을까요. 그때 말씀을 다 들었어야 했는데, 혼자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어머니도 아버지의 말문을 막은 걸 이제야 통탄했습니다.

"에이그.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듣기 싫어도 들어나 줄걸, 내가 다섯 번만 들었으면 다 알 수가 있었을 것인디, 저가 고생한 걸 말 못하게 막았으니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꼬."

성완 씨는 재심을 준비하면서, 그러니까 아버지가 끌려가신 지 40년 만에야 드디어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왜 잡아갔는지, 아버지는 끌려가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다음에 계속)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토리펀딩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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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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