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무덤에 계신 아버지는 말이 없습니다. 살아서도 원체 말이 없으셨습니다. 거의 전신 마비가 된 자식 대소변을 받아내느라 10년을 옆에 꼭 붙었어도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아들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간첩 누명을 쓰고 당한 일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셨습니다. '북괴 간첩'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연좌제'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버지의 과거를 더듬어보기로 했습니다.
"지금 와서 두고두고 한이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왜 묻지 않았을까요. 아버지 혼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1969년 일본에 사는 사촌 형을 만났다가 간첩 혐의가 인정돼 6년간 옥고를 치른 고(故) 김인봉 씨, 그리고 이 사건에 함께 연루된 고(故) 장재성 씨 두 망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육지 한 번 아니 댕기고 산 사람인데 무슨 간첩 할 일이 잇수카."
제주도 애월읍 곽지과물해변 인근의 어느 작은 마을. 허리가 굽은 노인은 땀에 절은 웃통을 훌훌 벗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일평생을 밭만 갈구던 아낙네였습니다. 지금도 온종일 밭을 매다 집에 온 터였습니다. 논밭이 척박하기 그지없는 제주 땅에서 용케도 밭일로 오 남매를 먹여 살렸습니다.
남편 김인봉 씨는 타고난 한량 체질이었습니다. 육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마작 같은 놀이에만 소질이 있었지 집안일엔 영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식을 다섯을 두었습니다. 농사일은 짓기 싫은데 키워야 할 아이는 많으니 살길은 막막했습니다. 김 씨는 일본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일본 가야지, 여기는 너무 어렵광, 이렇게 날마다 노래를 불렀네요. 일본에 돈 잘 버는 형님이 있으니 일본에 가도 되지 않수깡 했어요."
둘째 형님인 김인수 씨가 일본에서 플라스틱 원료 사업에 성공해 자리 잡고 있는 데다, 본인도 도쿄의 유명한 상업학교인 도시바상업학교에서 2년 정도 유학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가면 뭐든 해볼 거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일본에 있는 형님과 석 달에 한 번꼴로 꾸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일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쳐도 형님은 그에게 '부모님을 잘 모시고 있어라. 잘 지내고 있으면 나중에 농사지을 땅을 사주겠다'고 타일렀습니다.
1969년 3월 어느 날, 집안에 말도 없이 그는 밀항을 했습니다. 혼자 마산항에 가 일본행 대동호에 올라타 기관실 빗물 탱크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다 도착한 곳은 일본 오사카 항. 밀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는 이들이 많아 단속이 심하던 때였습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은신한 사실이 발각됐습니다. 오사카 수상경찰에 의해 기소돼 곧바로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결국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3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집행유예 상태로 풀려나오면서, 2주간 일본에 자유롭게 체류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곧장 사이타마현 우라와시에 있는 형님 김인수 씨의 자택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틀 머문 뒤 형님이 준 현금 2만 원과 옷이 든 트렁크 가방을 들고 다시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들 김성완(60) 씨는 당시 아버지의 행방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다녀오신 뒤에도 별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냥 일본에 가려다 다시 돌아왔나보다 정도로만 알았어요. 정확한 행방은 나중에 아버지 공소장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제주로 돌아온 그는 9월, 일본에 있는 형님에게 잘 도착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형사들이 들이닥친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1970년 8월 25일, 부부가 함께 집 근처에서 밭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딱 지금처럼 더울 때라. 얼굴을 하나도 모르는 남자들이 와서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하더니 애 아빠를 데리고 가는데, 그것이 어디로 데려가나, 뭣 허러 데려가는가 그것도 모르겠고, 말려주는 사람이 잇수카. 주변에 사람도 없고, 나만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넋 놓고 봤네요."
세상일 하나 모르는 농사꾼 감으로도 예삿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 사람이나 지인에게 남편의 행방을 수소문해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라진 남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보다 당장 먹고살 걱정이 앞섰습니다.
"야(김성완 씨)는 중학교 다니고, 막내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인제 이 아이들 뒷바라지를 어떻게 한다, 아이고 나 혼자는 힘들어서 매일 울고, 정신이 없었지요. 모든 것이 마음이 좋아야 일도 많이 하게 되고 능력이 오르는데, 그냥 너무 답답한거라. 어디를 갔는고. 왜 안 오는고. 나는 아무 내용도 모르니 밭일을 하다가도 가슴이 답답해 일을 할 수가 있어야지. 야들 아버지가 소로 밭을 갈아야 하는데 그걸 못 하니 나 혼자서 밭일을 어떻게 다 한 대요. 그렇게 매일 울기나 하고.
아이들이 영양실조 걸려 죽나 했는데 죽지도 않여. 아침 맥이면 저녁 걱정, 저녁 맥이면 또 아침 걱정, 맥이지도 못 하고 입히지도 못 하고…. 그때 생각하면 너무나 답답하고 힘들어서 생각을 하기가 싫어."
며칠이 지나도 아이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주변에선 수상쩍게 생각했습니다.
"벌써 소문이 나대요. 성완이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그런디 야네 아버지는 땅도 잘 팔 줄 모르는 어른인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간첩이 된대요. 그런 사람을랑 간첩이라 하는고. 억울하고 분하고 남의 말을 어찌 그리 쉽게 한대요."
성완 씨를 비롯한 자녀들은 오래도록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모르겠다고만 했어요. 제가 그때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 나이면 대충 눈치로는 알잖아요. 처음엔 전혀 무슨 상황인지를 모르다가 집안 어르신들 눈치를 보고 알아챘어요. 어떤 어르신은 '알고만 있어'라며 아마 간첩죄로 경찰에 잡혀간 것 같다는 얘길 슬쩍 흘리시기도 했고요."
남겨진 가족은 그렇게 6년간을 '울명불명' 지냈습니다.
아내 송찬선 씨가 남편 김인봉 씨를 만난 건 김 씨가 잡혀간 뒤로 두 계절이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제주 시내에 사시는 고모님이 공직에 있는 딸들을 통해 어렵게 김 씨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서울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고모님과 함께 급하게 서울로 떠났습니다. 도착한 곳은 서대문 형무소였습니다.
"야네 아버지 얼굴을 처음 보는데, 얼굴이 살찐 것마냥 퉁퉁 부어있더라고요. 몰라보겠더라고요. 취조 받으면서 먹지도 못 해서 그랬던 것 같더라고요." (다음에 계속)
(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토리펀딩 바로가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