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남미 순방을 마치고 25일 밤 귀국 예정인 이명박 대통령이 내 놓은 자평이다. 이 대통령은 전날 미국 LA로 향하는 특별기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시대가 변해 각국 정상들이 모두 실용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대화가 굉장히 쉬웠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히 청와대가 이번 순방에서 내 세우는 성과는 G20 금융정상회의, APEC 등 다자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발언력과 위상을 제고했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이번 순방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호무역주의 반대론', 무역투자의 새로운 장벽을 만들지 말자는 '스탠드 스틸(stand-still)' 구상 등을 역설했고, 이같은 내용은 실제 공동선언문에도 반영됐다.
이 대통령은 "G20에서는 '스탠드 스틸'이 그냥 용어의 하나가 될 정도였고, 어떤 곳에서는 너무 한국의 주장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 같으니까 풀어서 넣자고 하더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는 이번 금융위기를 극복할 구체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금융위기의 파장이 실물경제 부분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당장 불을 끌 만한 조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것.
실제로 이 대통령의 순방기간에도 국내 증시와 외환시장은 끝없이 요동쳤고,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앞다퉈 하향조정하고 나섰다. "한국이 가장 먼저 위기를 탈출할 것"이라는 이 대통령의 낙관론과 이번 순방결과에 대한 '자화자찬'을 두고는 한가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 한국시간으로 25일 새벽 미국 LA에서 열린 동포 간담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
오바마 '주파수' 조율'대신 '부시와의 추억'만이…
각종 정책에서 한국 정부와는 '다른 길'을 예고하고 있는 오바마 당선인 측과 '코드조율'의 기회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애초 수전 라이스 국가안보문제 보좌역, 제프리 베이더 아시아 정책 담당자 등 오바마 당선인의 참모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브루킹스 연구소 주최의 정책간담회는 오바마 측 인사들의 불참으로 김빠진 간담회로 얼버무려졌다.
또한 오바마 당선인의 대리인 자격으로 G20 정상회의에 파견된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과의 접견은 가시적인 의견접근을 이루지 못한 채 30분만에 끝났다.
이 대통령도 미국 부시 대통령, 일본의 아소 다로 총리 등 보수성향의 정상들과 오바마 당선인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하는데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페루 리마에서 연이어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상들은 "북핵문제와 금융위기 등 국제적 이슈에 대해 3국이 공조를 취하자"는 전제 하에서 북한 측의 '태도변화'를 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오바마 당선인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국과의 FTA 비준을 중단하고 나선 대목을 의식한 듯 "보호주의로 회귀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민주당 새 정부의 출범 이후를 지켜보겠다"고 짐짓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또한 워싱턴 현지에서 녹음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퇴임을 앞둔 부시 대통령은 이번 회의에서 합의된 것은 강력하고 유능한 오바마 후임 대통령에 의해서 그대로 이행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현 정부와 차기 정부의 협력이 매우 긴밀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강조한 대목도 오바마에 대한 '압박'이지만, 오바마 정부의 정책기조가 이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반면 부시 대통령과는 끈끈한 관계를 다시 한 번 과시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부시 대통령과 악수도 나누지 않는 각국 정상들의 모습이 화제가 될 정도였지만, 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유별난 애정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부시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한 이 대통령을 두고 "그게 바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다(That's why I love you)"라고 화답하기도 했다. 정상회담 말미에는 "당신은 좋은 사람(You are a good man)"이라고 이 대통령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 대통령 또한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을 극찬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시 시대의 폐막'이 아쉽더라도 미국 새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를 감안하면 '외교적 신중함'이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실질적으로 퇴임한 것과 다름없는 부시 대통령과의 '우정'을 과시하기에 바빠 정작 앞으로 대통령 임기를 함께 할 오바마 당선인 측과의 '주파수 조율'은 뒷전으로 밀린 셈이었기 때문이다.
▲ 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끈끈한 우정'도 변함없었다. ⓒ연합뉴스 |
"선거 때 무슨 말을 못 하나"…설화도 '한가득'
설화도 유난히 많았다.
이 대통령이 17일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가진 특파원 간담회에서 "오바마는 시카고의 자동차 업계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됐는데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고 오바마 당선인의 'FTA 반대론'을 '선거용 발언'으로 폄하한 대목이 단적인 예다.
이 대통령은 "아직 오바마 정권인수팀의 한미 FTA 검토 준비가 완료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언론이 오바마의 선거운동 당시 발언(자동차 재협상)을 확대해석하거나 너무 앞선 추측보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언론보도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드러냈다.
대북문제와 관련해선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통일하는 것이 최후의 궁극목표"라고 언급했다가 북한의 개성공단-남북 철도운행 중단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부추기기도 했다.
순방일정 마지막 날인 25일 새벽 LA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지금 주식을 사면 최소한 1년내에 부자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언급한 대목은 즉시 표류하고 있는 'MB펀드'와 관련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대통령이 공언한 펀드가입이 두 달 넘도록 이뤄지지 못 하고 있는데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인한 주가폭락-경기침체의 바닥이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 대통령은 근거가 희박한 낙관론만을 거듭 강조한 셈.
게다가 이 같은 논란이 단순한 '말 실수' 수준이 아니라 이 대통령 자신의 소신과 철학에 입각한 발언에서 불거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 대통령의 말 그대로 "정상이 신뢰를 얻어야 대한민국 자체가 신뢰를 얻기 때문"이다.
MB, 끝내 YS의 길로 가려나
이같은 상황에서 청와대와 이 대통령이 내놓은 '승리적 평가'는 위험해 보인다. 이 대통령 스스로 'YS의 길'로 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실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4년의 세계화 선언, 1996년의 OECD 가입 등의 과정에서 "이제 우리도 선진국"이라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익은 세계화 전략이 오히려 IMF 국가부도 사태를 부추겼다는 게 학계와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 대통령은 이번 순방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그것과 비견될 만한 자유무역 체제에 대한 무한한 신념과 '세계가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식의 자아도취 경향을 보여 줬다. 기꺼운 마음으로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이명박 대통령이 IMF 사태 직전의 YS와 오버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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