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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의자'가 우리 미래다

[작은책] 성과연봉제가 숨기고 있는 것

"당신이 일한 '성과만큼' 임금을 주겠다"는 성과연봉제는 얼핏 당연한 것으로 들리지만 몇 가지 점에서 논란이 있다.

우선 일한 '성과만큼'이란 기준은 누가 정하고 그 성과 측정은 어떻게 하느냐라는 '공정성' 문제가 존재한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도입된 성과연봉제는 거의 대부분 일방적이거나 강제적이라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취약하고, 이진 아웃 혹은 삼진 아웃이라 불리는 저성과자 퇴출제 즉 해고와 결합된다는 점에서 '법적 정당성'이 의심스럽다. 또 정규직을 구조조정하고 그 빈 공백을 비정규직으로 채우는 '일자리 털기'의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있다.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9월 27일 정부의 성과연봉제에 반대하며, 수도권 총파업에 나섰다. ⓒ연합뉴스

예를 들어 보자. 2002년 공식적으로 민영화된 KT는 2014년까지 3만1791명을 해고했다. 적자를 이유로 8304명을 구조조정한 2014년에도 고위 임원의 연봉은 오히려 늘어나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다고 KT의 일자리 전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사라진 일자리를 자회사나 하청 일자리로 바꿨기 때문이다.

KT는 이것만으로 부족해서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위 CP프로그램(부진인력 퇴출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을 거부한 사람들을 저성과자로 내몰아 강제 전보시키고 퇴직을 강요한 것이다. 희망퇴직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20년 이상 사무직으로 일한 모 여성을 갑자기 울릉도로 발령을 내서 전봇대에 오르게 한다거나, 모 남성을 울산의 콜센터에 배치하거나 인터넷 설치기사 업무를 하게 하는 등의 괴롭힘을 자행했다. 공정성도 절차적 정당성도 법적 정당성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것이 KT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하청 노동자에게까지 성과연봉제를 강요하면서 사실상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또 하청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성과 평가를 하는 사례도 있다. 여기까지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며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조금 다른 점, "그렇다면 공정하게, 절차적으로도 정당하게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면 그것은 괜찮을까?"이다.

물론 노동자와 사용자 간에 공정하고 정당하게 이와 같은 합의가 이뤄진다면 그것에 대해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그 경우에도 '성과연봉제'를 요구하는 주체가 '정부'라면, "그것이 정부가 할 일인가, 그것이 정당한가. 그것이 헌법 정신에 합치하는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왜 그러한지를 이제부터 살펴보자.

1944년 5월 10일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선진 각국의 노동자, 사용자, 정부 대표가 모여 보편적 권리에 대한 국제 선언을 천명했다.

"a)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b)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c)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 d) 결핍과의 투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이 선언은 1948년 국제인권선언과 함께 전 세계 헌법에 스며들었고,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엄해야 한다는 불가침의 인권에 기초한 복지국가를 낳았다. 1914년부터 1945년까지 30년간 전 세계적으로 국가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파괴와 학살,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문명인에 의한 문명인의 학살이라는 참혹한 대가를 치른 탓에 절실하고 절박하기까지 했다.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을 '인적자원'(나치의 어휘)이나 '인적자본'(공산주의적 어휘)처럼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자연 자원을 착취할 때와 마찬가지의 효용계산과 산업적 방법을 인간에게도 적용"(<필라델피아 정신>(알랭 쉬피오 지음, 박제성 옮김, 한국노동연구원 펴냄)하는 근대적 합리성의 산물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시민을 성과나 효율성, 쓸모에 의해 평가함으로써 사람을 사실상 자원으로 대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도달한 곳은 아우슈비츠였다. 이 사실이 시장 우선의 자본주의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최소한 6천만 명 이상의 목숨을 바치고 나서야 사람의 존엄을 최우선하며 사회적 정의가 국제적 평화의 기초라는 사실에 대한 전 세계적인 동의가 이뤄진 것이다. 그제야 사람이냐, 자원이냐의 시계추는 한동안 사람 쪽으로 가까이 움직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다시 시장의 힘이 사람들의 삶과 지구적 질서를 조직하는 최상의 원칙이 되었다. 그것이 한국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공적 영역을 축소하고 '성과주의'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소위 노동개혁의 이름으로 쉬운 해고와 성과연봉제를 강요한 것이다. 경영의 이름으로, "인간을 과학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몸치장을 하고 되살아났다. 더군다나 성과주의는 불평등에 기반하고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덕분에 한국은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집중도가 OECD 국가 1위이며 자산의 80퍼센트를 세습하는 재벌국가로 바뀌었다.

현 시기 '성과연봉제'는 매우 정치적인 질문이다. 공정하냐 정당하냐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 존엄에 대한 질문이다. 특정 기업이나 일부 집단에서 성과연봉제의 도입에 합의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정부가 국민을 성과로 평가하겠다고 하면 성과가 낮은 사람들, 예를 들어 장애인이나 비정규직 혹은 지방대 출신이나 여성이 차별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한민국은 '동등한 시민'의 공동체 대신 불평등한 자원의 집합체가 된다. 동의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한다. 또 헌법 제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못 박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성과연봉제'를 삶의 규칙으로 삼고자 한다면 공정성 여부를 넘어 그것이 인간 존엄을 삶의 규칙으로 하고 있는 헌법 정신에 합치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과연봉제를 이해 당사자 간의 갈등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을 한국의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 이슈와 결합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을 과학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이데올로기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성과연봉제는 기술적인 사안으로 전락한다. 쉬운 해고나 민주주의 후퇴라기보다는 정규직의 기득권 지키기로 비칠 가능성이 크다. 나치의 인종차별이 기술적 사안이 아닌 것처럼 정부의 성과연봉제 역시 기술적 사안이 아니다.

▲ 다큐멘터리 <시대정신:부록>(Zeitgeist: Addendum) 중 한 장면.

열 명의 사람에게 열 개의 의자가 있다고 하자. 호루라기가 울리면 갑자기 의자 두 개가 사라진다. 열 명의 사람이 8개의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누구든 두 명은 계속 서 있는 하청이나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다. 또 호루라기가 울리면 의자 두 개가 사라진다. 이제는 열 명이 6개의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누군가 의자를 차지하거나 차지하지 못하는 근거는 성과연봉제나, 경제위기나, 파견허용 혹은 국제경쟁력이다. 하지만 근거가 무엇이든 '사라지는 의자'까지 보아야 한다. 성과연봉제나 국제경쟁력 강화가 옳으냐 그르냐에만 초점을 맞춰 의자놀이의 현실을 살피지 않는다면,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성과연봉제라는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저편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은, 무한경쟁과 불평등이라는 의자놀이를 넘어서서 헌법을 그 자체로 삶의 규칙으로 바꾸기 위한 시작이다. 거창하다고? 만약 거창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의자'가 우리의 미래이다. 불평등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혁명을 꿈꿔야 하는 시기에 조율이나 스타일에만 신경 써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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