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의 일이다. 작은 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계신 엄마가 어느 날 얼굴이 벌게져서 집에 오셨다. 아니나 다를까, 요양원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시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그러질 않나,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를 않나. 환장하겠어. 정말."
"뭘 그런 것 같고 그래. 엄마도 요새 깜빡깜빡하잖아?"
마음 같아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엄마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완연했지만 모른척했다. 객관적 근거는 없었고, 사람 사이에 오해는 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한 번으로 그칠 줄 알았던 엄마의 푸념이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다. 모른 척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한 엄마가 퇴사라는 대참사(엄마는 우리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다)를 감행할 지경이었다.
나는 급히 수습에 나섰다. 사소하리라 여겼던 다툼은, 알고 보니 업무 관련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요양원은 매주 월요일 직원 전체 회의를 열었다. 시설장인 엄마는 때마다 꼼꼼히 회의록을 기록하고 있었다. 옳거니! 그거다 싶었다. 하지 않은 말은 기록되지 않았을 테고 한 말이라면 기록으로 남았을 테니, 회의록을 확인하면 될 것 아닌가.
모든 구성원의 발언과 합의 사항, 이견 등이 낱낱이 기록된 회의록은 조용할 날 없던 요양원에 안정과 질서를 안겨주었다. 모두 모여 회의록을 검토하면서 서로를 향한 인정과 사과가 몇 번 오갔다는 후문이다. 일단의 사건을 겪고 기록의 소중함을 깨달은 요양원 직원들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기로 했다. 사람보다 기록을 신뢰하게 됐다고 엄마는 씁쓸해했지만, 나는 새삼 이 작은 소란에서 기록의 객관성과 공정성, 신뢰를 실감했다.
올해 초에 있었던 이 일을 우연히 상기한 건 아니다. 책 한 권을 읽었다. 기록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대통령 기록에 관한 이야기다. <대통령 기록 전쟁>(전진한 지음, 한티재 펴냄)엔 자신을 '기록 대통령'으로 불러 달라던 한 대통령의 역사가 담겨있다. 엄마의 요양원 사건으로 기록의 쓸모와 중요성을 이미 겪어본 바다. 하물며 국가의, 대통령의 기록이라는데 그 쓰임과 가치를 향한 기대감을 말해 뭣하랴.
그런데 이 책, 참 지독하다.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 대통령 기록의 역사는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 정부에선 기대할 수 없었던 기록의 공적 생산과 보존을 전격 시행했다. 그는 이전 정부와는 기록물 숫자에서부터 차원이 다른 대통령 기록을 남겼다(18년 동안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의 경우, 5만2729건의 기록만 대통령기록관에 보존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대통령 기록은 755만7118건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기록의 공적 생산과 보존은 기록을 통해 대한민국을 투명하고 신뢰받는 사회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객관적 기록으로 국정 운영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지키고 역사의 평가를 받으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의 노력은 자신을 헤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가 남긴 대통령 기록은 노무현 정부의 허물로 변해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 기록을 남긴 죄.' <대통령 기록 전쟁>의 부제다. 역사에 마땅히 남겨야 할 기록을 남기고자 '대통령기록물법' 제정을 추진하고 기록 관리 분야의 개혁을 이뤄낸 죄였다. 그 많은 대통령 기록을 남겼던 것이 죄라면 죄였다. 기록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을 기록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상식적인 생각이 이토록 위험할 줄은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개혁을 지켜보는 국민도 몰랐다.
참으로 지독하다. 이 책은 노무현 정부 이전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참담한 대통령 기록 문화를 적나라하게 써놓는가 하면, '정보 부존재'라는 답변을 일상적으로 내놓는 공공 기관의 부실한 기록 관리 실태를 가감 없이 폭로한다. 또한, 전 정권의 대통령 기록을 정치적 재료로만 쓰기 바쁜, 말 그대로 정치권의 지독한 행태에 관한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저자가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쓸 수 없는 과감한 평가와 고발, 분석이 책 곳곳에 도사렸다.
지독함이 어디 이뿐인가? 국가의 빈약한 기록 곳간을 채우려 기록 관리 및 정보 공개 제도 시스템을 집요하리만큼 개혁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와 "기록하지 못할 일은 하지 마라"던 그의 원칙도 그렇다. 자연히 <대통령 기록전쟁>을 읽는 독자도 지독해진다. 책을 따라가다 보면 기록을 부정하는 정치, 기록을 두려워하는 권력의 다른 이름이 투명하지 않은 정치, 책임지지 않는 권력임을 자명하게 깨닫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 속의 독한 것이 깨어나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각성의 정체는 자각이었다. 그래, 나는 모든 권력의 시작인 민주 사회의 시민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기록으로 사건을 규명하지 못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기록이 부족하니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책임자를 찾아 사건을 소명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늘 원인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슷한 사건은 늘 반복되었고, 사건을 수습하는데 국가의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기록을 없애며 사건을 만드는 나라'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세월호 사건만 해도 그렇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대규모 인명 피해 선박 사고 대응 매뉴얼'은 노무현 흔적 지우기에 급급했던 이명박 정부에 의해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온 국민은 세월호 사건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의도적인 기록 삭제와 은폐는 진상 규명 과정에서도 있었다. 세월호 사건만큼 책임의 부재를 뼈아프게 실감한 일이 없다. 기록이 곧 책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만 해도 그렇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대규모 인명 피해 선박 사고 대응 매뉴얼'은 노무현 흔적 지우기에 급급했던 이명박 정부에 의해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온 국민은 세월호 사건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의도적인 기록 삭제와 은폐는 진상 규명 과정에서도 있었다. 세월호 사건만큼 책임의 부재를 뼈아프게 실감한 일이 없다. 기록이 곧 책임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기록 전쟁>은 스스로 전문가가 아니라는 저자의 고백이 무색할 만큼 대통령 기록에 관한 깊고 방대한 성찰이 면면을 채운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음 세대까지 왜곡 없이 이어지는 온전한 기록의 계승을 간곡히 호소한다. 차곡히 쌓이는 국가의 기록이 다음 정부의 국정 운영에 이롭게 쓰이기를 꿈꾼다.
좋은 기록은 책임 사회, 투명 사회, 신뢰 사회로 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단순히 기록에 꽂혀 지난 15년간 현장을 뛰어다닌 저자의 눈물겨운 헌신으로만 읽어선 안 된다. 이 지독한 책에 쓰여 있는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각성한 내 안의 괴물,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년엔 대선이 있다. <대통령 기록 전쟁>을 읽은 독한 시민의 선전포고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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