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그에 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1960~1980년대 30년이 넘는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과 열망이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되고 있고, 집권 이후 하나회 청산, 금융 실명제 도입, 역사 바로 세우기 등의 성과도 재평가받고 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현재 국정 교과서 도입과 대비되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물론 집권 기간 터졌던 북핵 위기, 외환 위기, 삼풍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참사 등 역사적 과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향후 김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반드시 그가 남겨두었던 대통령 기록을 참고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에 남긴 기록은 현재 대통령기록관에 10만3294건밖에 없다.(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기간 중 남긴 기록은 755만여 건) 그조차도 대부분 대통령재가기록(결재기록) 및 시청각 기록(사진)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기간 내내 수많은 사건과 의사 결정이 있었음에도 대통령 기록은 기껏해야 10만 건 남짓이다.
물론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아 제도상 체계적 기록 관리 및 보존이 불가능했다. 당시 임기가 끝나면 대부분 기록을 외부로 가져가거나 폐기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지금도 살아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자발적 기증만 의존할 뿐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과거를 탓해봐야 무엇하랴. 앞으로 대통령 기록을 남기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기록 관리 및 보존을 법으로 강제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 당사자의 자발성이 없으면 체계적인 기록 생산은 불가능하다. 풍부한 대통령 기록 생산은 후세대에 귀한 자산이 된다. 미국의 개별 대통령 기념관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와 큰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 기록을 온전히 남겨도 정치권에 의해 악용당하거나 그 관리자들이 고초를 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폐기' 논란이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공용 전자 기록 손상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은 지난 11월 24일 항소심에서 또 다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서 관리 카드에 첨부된 이 사건 회의록을 다듬어 정확하고 완성도가 높은 대화록으로 정리해 달라는 의견을 낸 것뿐이므로 문서 관리 카드와 그에 첨부된 회의록 파일을 공문서로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무죄 취지를 밝혔다. 2013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초 폐기 논란은 불필요한 정쟁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애초 이 사건을 검찰에서 기소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비약이었다. 우선 모든 공공 기관은 녹취록 초본에 대해 회의 참석자들과 결재권자가 회의록의 발언과 맥락을 검토해 수정하는 절차를 거친다. 최초 초본은 부정확한 부분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정은 필수적이다. 오탈자 및 맥락에 맞는 수정 절차를 거친 뒤 초본은 폐기하고 완성본을 승인된 정식 기록으로 등록하게 된다. 녹음을 했을 경우 원본 파일을 일정 기간 보존하는 것이 보통이다.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은 이 과정을 충실히 지켰다. 우선 노 전 대통령이 회의록 초본 파일을 열어 확인한 뒤 '처리 의견'란에 "내용을 한 번 더 다듬어 놓자는 뜻으로 재검토로 합니다"고 명시적으로 기재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정확하지 않은 부분을 수정하라는 취지이지 폐기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게다가 녹음 원본은 국가정보원에 보존되어 있어 대통령 기록 폐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 사건의 경우 1심 재판부도 "이 사건 회의록 파일처럼 녹음 자료를 기초로 해서 대화 내용을 녹취한 자료의 경우 최종적인 완성본 이전 단계의 초본들은 독립해 사용될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완성된 파일과 혼동될 우려도 있어 속성상 폐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정리해 초본 폐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녹음 원본과 수정된 회의록을 모두 보존하게 함으로써 당시 회담에서 어떤 발언이 있었는지 우리는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 이조차도 국정원에서 자신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공개했지만 말이다.
이 사건을 포함해 체계적인 대통령 기록을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참 많은 고초를 당하고 있다. 후세대를 위해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 오히려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무기로 돌아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생생히 보았던 정치인들과 시민들은 기록을 남기면 부관참시를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생생히 얻었다. 역사적으로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전임 대통령 기록을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하고, 악용한다면 향후 대통령들의 온전한 기록 보존은 기대하기 힘들다. 오히려 민감한 기록은 생산조차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 발전의 손해로 돌아올 것이 자명하다. 국민의 알 권리도 기록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대통령직의 경험은 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이는 기록으로 남겨져야 하고 그 기록은 우리 후세들을 위해 활용돼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러한 자산을 너무 쉽게 폄훼하고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곤 한다. 향후 대통령들이 자신들이 생산해 놓은 기록으로 평가받고 그 기록이 몸의 핏줄처럼 전국 곳곳에 유유히 흐르는 사회가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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