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은 1945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미군에 항복한 날인데 이 날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내 파면이 최종적으로 취소되었다.
내 파면사건은 교원소청심사위원회 취소, 서울행정법원 취소, 서울고등법원 취소 등 거듭된 패소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억지로 대법원에 상고한 것인데 대법원 특별1부가 5월 25일자로 접수한 파면 상고사건에 대한 법리 검토를 진행한 결과 상고심 절차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상고심 절차에 관한 특별법 제4조 및 제5조 규정에 따라 심리불속행 기각하여 이 사건을 확정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당일자로 자동 복직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교원소청위의 파면취소 결정으로 이미 복직된 것이지만 학교가 행정소송 중이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핑계로 교원소청위 결정을 무시하고 복직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뿐이다.
돌이켜보면, 2014년 11월 4일 직위해제되고 동년 12월 15일 파면된 후 교원소청에서 파면이 취소되고(2015.3.11), 행정소송 1심에서 파면취소가 확인되고(2015.10.15.), 교수지위확인 가처분 소송에서 정교수의 지위가 확인되고(2015.11.24), 민사소송 1심에서 파면처분이 무효가 되고(2016.1.19), 행정소송 2심에서 파면취소가 재확인되고(2016.4.29), 교수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며 이를 어길 경우 1일 50만원을 지급하라는 간접강제가 결정되고(2016.5.9), 급여 지급 불이행에 대하여 채권압류가 결정되고(2016.5.26.), 민사2심에서 파면처분의 무효가 재확인되어 위자료 지급이 결정되고(2016.7.22), 2차 가처분 소송에서 정교수의 활동을 방해하지 말고 수업을 배정하여야 하며 만일 수업을 배정하지 않을 경우 또 1일 50만원을 지급하라는 간접강제가 결정된(2016.8.26) 후 9월 9일자로 최종적으로 파면을 취소하는 확정판결이 나온 것이다.
이 시기에 나와 관련해서 진행된 재판이 무려 20개이다. 또한 이 기간에 학교는 나를 원주경찰서에 27회 고소하고, 원주지검에 13회 고소하고, 서울중앙지검에 1회 고소하는 등 합계 41회에 걸쳐 고소고발을 남발하여 부당하게 파면당한 나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대한 고통을 강요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연구실 명도소송과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방해금지 가처분 등 7회의 소송을 제기하였고 심야에 내 연구실 문을 부수고 무단으로 난입하여 다중의 폭력을 행사하는 등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기도 했다.
더구나 2014년 12월 15일 파면 후 21개월이 지난 634일만의 복직 결정이고 그 과정에서 10여 차례 파면취소, 교수지위확인, 수업배정 등의 결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아직도 수업을 배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22일 수업 미배정에 대한 간접강제 결정이 나온 후에서야 학교는 마지못해 일부 수업배정 행위를 했다. 그러나 수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사회 결의에 기초한 이사장의 복직 발령이 필수적인데도 아무런 절차 없이 수업 두 개를 배정하여 시간강사로 임용하려는 변칙행정을 시도했다. 하물며 시간강사 발령도 없었다. 더구나 이마저도 제동이 걸린 다음에는 아예 행정행위를 중단해버렸다. 물론, 수업 미배정에 따른 책임은 간접강제 결정에 따라 재정적으로 보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모든 결정은 내 개인에 관한 것이고 앞으로 이사회와 대학 본부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이미 8월 8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3주간의 교육부 특별감사에 대한 처분이 기다리고 있고 9월 1일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 접수한 이사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재판도 9월 29일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이사회와 본부가 지게 될 책임은 조만간 결정될 것이다. 교육부 처분이 먼저 나올지, 아니면 사법부 판결이 먼저 나올지가 문제일 뿐이다. 이 시기에 국회 국정감사가 진행되므로 김문기 등 누군가는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또 다시 변명을 해야 할 상황이며 국정감사 상황이 교육부의 감사처분에도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사법부 결정은 학교의 행정적 책임에 관한 것이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지만 이후에는 부당징계와 불법행위 및 학교를 파탄으로 몰아간 행위에 대하여 이사, 교무위원, 징계위원, 인사위원, 담당직원으로서 각자가 직위와 역할에 따라 책임질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며 비위의 경중에 따라 그 책임을 돈으로 계산하여 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몇 년 사이에 있었던 모든 사건에 대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해당자들은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하여 어떤 책임이 있고 어떤 면책사유가 있는지 상세하게 정리해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20번의 재판과 41번의 고소고발을 거친 다음에야 겨우 대법원의 최종적인 판결을 받아 복직에 이르게 된 셈이다. 사법부의 재판과 검찰의 수사는 물론 그 사이에 국회가 두 차례 청문회를 비롯해서 부단히 개입했고 교육부가 두 차례 특별감사를 비롯해서 끊임없이 개입했지만 김문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언론에서 수백 차례 기사를 썼지만 오불관언이었다. 이 정도라면 국가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반국가적인 상황이다.
우리나라에서 반국가 단체는 국가보안법에 제2조에 명시되어 있다. 국가보안법에서 말하는 반국가 단체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 대표적 반국가단체가 북한인데 이것은 국가보안법상 규정이 아니라 대법원 판결로 유지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 규정은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전쟁을 겪은 후 남북한 간 대결이 지속되는 매우 특수한 안보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안보상황을 권력유지에 악용하면서 국내에서도 수많은 반국가 단체가 만들어졌다. 1950년대의 진보당, 1960년대 이후의 민청학련, 인혁당재건위, 학림, 아람회 등이 그것인데 2000년대 이후 재심과정에서 예외없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 국내에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단체가 존재한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안보의 좁은 시각을 넘어 전체 국가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반국가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국가를 정치, 경제, 사회의 고차원적 종합체라고 할 때 안보란 정치의 한 측면일 뿐이고 안보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의 영역에서 국가를 어지럽히는 다수의 행위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그 행위가 국가를 근본적으로 어지럽힌 것이라면 반국가적 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 행위 주체가 일정한 수준으로 조직화된 단체라면 반국가 단체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치영역에서 군사쿠데타는 합법적으로 수립된 국가의 헌정질서를 근본적으로 유린한 행위이므로 가장 중대한 반국가적 행위이고 쿠데타를 주도한 단체는 반국가 단체가 될 수 있다. 국가의 경제질서를 어지럽힌 행위나 사회질서를 교란한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경제를 파탄내서 미증유의 국가부도사태를 유발한 행위는 안보적 위기 못지않게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것이므로 반국가적 행위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교육은 국가백년대계로서 국가의 유지발전에 토대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영역이므로 교육을 어지럽힌 행위 역시 반국가적 행위에 해당될 수 있다. 특히 사학비리는 교육을 좀먹는 수준을 넘어 국가의 미래를 좀먹는 심대한 반국가적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학비리는 반국가적인 행위이고 사학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은 반국가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사학비리 그 자체가 지극히 반국가적이다. 아무리 사학비리를 견강부회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감히 강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학비리가 교육에 끼치는 정신적 악영향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선험적으로 반국가적이지만 고등교육의 85%를 사학이 점유한 상황에서 우후죽순으로 사학비리가 창궐한다는 것은 사학비리의 반국가성이 도를 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상 사학비리는 이미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누가 권력을 장악하든 사학비리 척결을 내세우지 않는 정부는 없다. 국회를 구성하는 복수의 정당들도 사학비리 엄단을 강조하고 있다. 사법부 역시 사학비리를 단죄하고 있다. 다만 정권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다를 뿐이고 정당에 따라 정책 순위가 다를 뿐 누구도 사학비리를 미화하거나 두둔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정권이나 정당이 사학비리를 두둔하는 것은 도둑질을 옹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정권의 정당성과 정당의 정당성이 부정된다.
그렇다면 매우 이상하다. 정부가 사학비리 척결을 외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왜 사학비리가 없어지지 않을까? 오히려 사학비리가 더욱 창궐하면서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검찰이나 경찰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도 범죄가 소멸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마피아나 그와 유사한 조직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갖추어지면 곰팡이나 세균이 증식하는 것처럼 사학비리가 창궐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학 운영을 규율하는 내부적 조건과 외부적 조건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사학 안에서 아무런 견제가 없이 얼마든지 부패와 전횡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내부적 조건이고, 정부나 사회가 부패와 전횡을 용인해주는 환경이 외부적 조건이며, 이 두 가지가 사학비리가 창궐하는 조건이다.
실제로 이 조건을 토대로 1960년대 이후 사학비리가 번성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의 민주화 시기에 구성원의 활동으로 내부적 조건이 급변하고 사학에 대한 정치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일시적으로 사학비리가 주춤했다. 그러나 내부적 조건에 특별한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로 부패정권이 들어서는 등 외부적 조건이 크게 악화되면서 2000년대 후반 이후 사학비리가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번성하고 있다.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무리수를 거듭하면서 비리재단 복귀를 획책할 때만 해도 사학비리는 국가의 든든한 보호를 받았다.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와해시킨 2007년 상지대 대법원 판결은 사학비리를 용인하겠다는 사법부의 선언이었다. 한나라당은 사립학교법 개악을 주도했고 국회는 사분위를 만들었다.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교육부와 사분위는 노골적으로 비리재단 복귀를 추진했다. 국가와 사학비리는 밀월의 시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허니문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학을 파탄으로 이끈 불륜이었기 때문이다. 국회가 먼저 사학비리와 비리재단 복귀에 제동을 걸었다. 한나라당과 그 후신인 새누리당은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사학비리를 옹호한다는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국회의 강경해진 태도는 사분위의 만행을 위축시켰다.
2013년 헌법재판소는 일련의 사립학교법 위헌소송에 대한 판결을 통해서 사학을 사유재산으로 규정한 2007년 상지대 대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15년 대법원은 재단 문제에 대한 대학 구성원의 원고 적격을 인정했고 2016년 서울고등법원은 파기환송심에서 2010년 상지대 정상화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상지대 정상화가 불법이라는 판결은 물론 상지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분위가 강행한 모든 정상화가 불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학교의 경우 행정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정상화 자체는 무효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상화가 불법이라는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행정소송을 대신해서 민사소송의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결국 사분위가 잘못했다는 것이고 사분위는 존재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복귀한 비리재단은 안하무인에 요지부동이었다. 교육부가 비리재단을 단호하게 다루지 않았지만 비리재단은 교육부의 행정명령을 거부했다. 국회가 비리재단에 가혹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지만 비리재단은 국회의 권능에 도전했다.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려도 비리재단은 수용하지 않았다.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국적자처럼 행동했고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단체처럼 행동했다. 특히 같은 시기의 다른 대학들과 비교할 때 상지대는 가장 반국가적이고 가장 무정부적이었다. 상지대에는 국가기구의 어떤 결정도 통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이름붙일 만하다. 실제로 김문기 구재단은 상지대 구성원의 사소한 흠결에도 징계의 철퇴를 내리친 반면 국가의 결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따르지 않았다.
상지대 비리재단은 왜 국가기구에 저항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김문기 본인의 특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고 비빌 언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김문기의 무모한 저항 뒤에는 비리재단을 떠받드는 네 가지 힘에 대한 오랜 믿음이 있다. 사학비리와 동맹을 체결한 부패권력, 사학비리를 비호하는 부패정치세력, 사학비리를 묵인하는 교육부, 사학을 사유재산으로 간주하는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가 그 배경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은 한동안 힘을 발휘했다. 이 조건 때문에 김문기를 비롯한 비리재단이 복귀할 수 있었다. 부패권력과 집권여당이 끌어주고 사법부가 받쳐주고 교육부가 실행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복귀한 비리재단의 나쁜 습성이 재연되자 비리재단의 복귀에 대학 구성원들이 저항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비판이 잇따르는 상황이 만들어지자 정치권과 사법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10년만에 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상지대 사태가 그 반전을 시작하고 이끌었다.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 사건들과 관련된 수천 수만의 학생들이 사학비리 반대에 대학생활을 바치고 청춘을 바쳤다. 적지 않은 교수와 교사와 교직원들이 자기 삶을 이 시간 속에 속절없이 묻었다. 그 사이에 대학들은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최근 몇 년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포함되고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거나 부실대학으로 판정받은 대학들의 다수가 사학비리와 관련되어 있다. 이 손실을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그러나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진전될 대학 민주화가 보람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학생활을 바친 젊은 학생들도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속절없이 인생을 허비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사학비리의 해악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처럼 투쟁하지 않고 얻어지는 민주주의도 없는 것이다. 나아가 구체적인 성과도 있다.
상지대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상지대 구성원들은 세 개의 중요한 법적 결정을 이끌어냈다. 첫째, 2015년에는 대학의 교수와 학생은 재단 문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둘째, 2016년에는 지난 10년간의 사분위 정상화가 불법이라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셋째, 상지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의 투쟁의 성과인데 사학은 사유재산이 아니며 교육의 공공성은 사학의 자율성에 우선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이끌어냈다. 이 세 가지 결정은 사학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판결이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중요한 판결들이 더욱 많이 나올 것이며 국회를 거쳐 사립학교법을 비롯한 교육관계법에 반영될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