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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료 폭탄? '스마트 미터'만 있었더라면…

[초록發光] 전기 요금 누진제 파동의 사소한 정치학

1994년 이후 22년 만에 닥쳤다는 긴 폭염 속에서 '전기 요금 폭탄'이 폭발했다. 가정용 전기 요금의 누진 제도로 인해 국민들이 부당하게 피해를 보고 있다며 몇 해 전부터 집단 소송에 나선 변호사의 활동도 있었거니와, 현행 누진제 설계의 문제점은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온 바였다.

올해에는 진보 성향의 야당 의원이 가정용 전기 누진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것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누진제가 사용량 구간에 따라 11.7배까지 누진 배율을 적용하면서 취약 계층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반면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산업용 전기료로 인해 대기업에게는 특혜를 안겨주었다는 개정안 발의 이유를 많은 언론들이 일제히 받아쓰기 시작했고, 누진제는 순식간에 사회적 공적이 되었다.

에어컨 좀 틀었더니 전기료가 엄청나게 뛰었다는, 또는 누진 요금이 무서워 에어컨을 못 틀고 있다는 피해 사례가 연일 지면을 장식했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대부분 에어컨이 없으면 환기와 냉방이 원활치 않은 구조라는 점, 그런 주택들에 주로 여론에 민감한 젊은 가구들이 거주한다는 점,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었다는 점,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계속되는 폭염과 겹치면서 폭발할 곳을 필요로 했다는 점도 일정하게 배경이 되었을 터다.

어쨌든 원내의 정치권은 앞 다투어 누진세 때리기에 편승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가정용 전기 요금을 시원하게 내립니다!"라고 현수막을 걸었고, 국민의당은 "가정 전기료 누진 폭탄! 바로잡겠습니다!"라고 걸었다. 새로 당선된 여당 대표가 청와대 만찬에 갔다가 대통령과 합작한 7, 8월 누진 구간 기준 부분적 완화라는 대책 발표도 때가 잘 맞았다. 누진세와 관련하여 지난달 이후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은 모두 8건에 달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누진제로 인한 전기 요금 폭탄이라는 주장은 과장이고 괴담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누진 구간 부분적 완화라는 정치 쇼에 분개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수십만 원의 전기 요금이 나오는 가구는 극소수임에도, 요금 폭탄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다수다. 에어컨은 이제 필수품이고 권리라는 주장도 많다.

종합부동산세로 피해를 볼 일이 없는 이들이 세금 폭탄 여론에 동조했던 경우와 비슷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반응과 여론은 현실의 일부다. 한국전력공사가 나쁘다, 대기업이 나쁘다,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낡은 제도다, 에어컨 좀 빵빵 틀고 살자, 이런 주장과 바람들이 욕망 또는 욕구 불만의 정치로 끓어올랐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환경운동가, 좀 더 좁혀서 '에너지 활동가'라 불릴 만한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던 산업통상자원부의 편을 들면서 여론을 거슬러야 하는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다. 누진제의 기본 골격 고수를 주장하는 활동가들은 이미 현실을 모르는 한가한 이상주의자로 찍혀 인터넷 여론에서 돌팔매를 당하고 있다.

에너지 활동가의 고민 또는 위기 의식은 아마도 이런 것이다. 산업용 전기에 주어지는 특혜 문제, 현행 가정용 전기 요금 누진제의 개선 필요성, 에너지 빈곤층에 대한 현황 파악과 차별적 지원 요구를 수년 전부터 제기해왔던 것이 정작 이들이었지만, 지금의 누진제 깔때기 정국은 걱정스럽다.

첫째, 전기 요금 폭탄 공세는 전기 요금 인하 요구로 치환되기 쉬우며, 그래서 낮아진 전기 요금 또는 낮은 전기 요금에 대한 욕구는 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재원과 정책 수단 마련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염려다. 둘째, 에어컨을 걱정 없이 틀고 살자는 욕구와 행태는 개별 가구에게는 정당한 것일 수 있어도, 전력 수요 상승과 이에 따르는 발전 설비 증설, 도심 열섬 효과 증가와 미세 먼지 발생 등으로 기후 변화를 가속화하고 환경오염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염려다.

셋째, 한국전력의 초과 이익과 독점 구조에 대한 비난 여론을 정부가 전력 산업 민영화의 단초로 삼을 수 있다는 염려다. 끝으로, 무엇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밀양 등의 힘겨운 투쟁을 거치면서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는 '에너지 시민', 즉 탈핵과 에너지 전환을 위해 자발적으로 에너지 절약과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에 나서는 이들이 낮은 요금과 편안한 전기 소비만을 바라는 '에너지 소비자'로 해체될 것이라는 염려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이 전기 요금 체계와 전력 수요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에너지 문제를 공론화하고 에너지 전환의 큰 그림을 만드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으니, 근시안적인 여론 탓만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즉 염려를 가능성으로 역전시키기 위해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될 뿐이다.

과제와 논점은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누진제의 수요 관리 효과와 징벌적 성격, 그리고 에너지 복지 사이의 균형점을 잡는 제도 개선안 만들기는 오히려 어렵지 않다. 이에 비해 산업용 전기 요금 인상과 체계 개선은 공개된 관련 정보도 부족하고 접근도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원가 회수율만을 기준으로 할 경우 산업용 전기의 급격한 가격 인상 주장은 되레 근거가 약해지고, 연료 가격 연동제는 또 다른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차라리 온실 기체(온실 가스) 배출 감축과 수요 관리를 핵심 정책 목표로 삼아 산업용 전력 가격을 대폭 인상하고, 추가로 확보될 재원으로 에너지 효율화와 재생 가능 에너지 지원 기금으로 활용할 과감한 구상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이번 파동을 계기로 젼력 수급 기본 계획과 국가 에너지 기본 계획 작성 기준과 근거, 방식 모두를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정책 민주화라는 큰 그림 위에서 마련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그러나 진지하게 떠오르는 생각 하나는, 과연 스마트 미터가 가구마다 보급되어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갔을까 하는 것이다. 스마트 미터는 두꺼비집에 전력 소비량 센서를 부착하고, 그 데이터를 모아 실시간 전력 사용량과 예상 사용량, 예상 전기 요금까지 알려주는 장치다.

몇 만 원 정도의 기기가 시중에 나와 있고, 어떤 통신 회사에서는 스마트폰앱과 결합된 통신 상품으로 내놓고 있기도 하다. 새로 건축되는 지능형 아파트에는 이런 기능을 처음부터 포함하기도 한다. 사실 '전기 요금 폭탄'에 대한 공포는 그 금액의 크기 못지않게 그 결과를 사전에 알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마트 미터가 있다면 전기 요금이 5만 원 나오던 집에서 12만 원이 나올 것이라는 정보가 에어컨 가동 시간과 설정 온도를 조절하는데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폭탄을 회피하게 될 것이다. 전기 요금이 무서워 냉난방기를 못 켜는 저소득층에게도 얼마만큼 에어컨을 가동하면 몇 천 원 또는 몇 만 원이 더 나온다는 정보가 있다면 행동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마음의 압박도 덜해질 것이다.

누진제 때리기 사태는 폭염뿐 아니라 에너지 정보 불평등과 정보 문맹이 낳은 현상이기도 하다. 스마트 미터는 스마트한 에너지 시민, 실은 전기 요금 정보의 문맹 상태에서 벗어나는 시민을 위한, 한국전력과 시민 사이의 정보 불평등을 완화하는 도구다. 그리고 의미 있는 전력 수요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수단이다.

정부는 수년째 막대한 예산을 스마트 그리드 연구개발에 쓰고 있지만, 공공 재원으로 스마트 미터를 보급할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 필요한 인프라와 기술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IT 강국에서 시민들은 검침일을 계산해서 한여름 누진제 폭탄을 피하라는 뉴스에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형편이다.

스마트 미터가 전기 요금 체계 개선의 필요성을 없애지는 않지만, 전기 요금 논란을 스마트하게 논의하고 스마트하게 대응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는 당장 모든 가구에 스마트 미터를 무상으로 보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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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나라를 보호하는 에너지 정의, 기후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기후 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추구하는 독립 싱크탱크입니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로, 한국 사회의 현재를 '녹색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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