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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한 독재자, 장개석의 양생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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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한 독재자, 장개석의 양생법은?

[한인희의 중국역사의 뒤뜰] 중국 권력자들의 음식론⓵: 장개석의 양생법

권력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겉으로 볼 때 권력자는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들도 보통 사람처럼 삼시세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자식을 키우는 생활인이다. 다만 그들의 생활권이 일반 백성과 달라서 특별해 보일 뿐이다. 몇 주에 걸쳐 중국의 권력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소개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 특히 권력자들의 생활인으로서의 면모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져 볼까 한다.

중국 현대사에서 장개석은 실패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광활한 중국을 놓고 모택동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다가 작은 섬 대만(타이완)으로 패퇴하였다. 그리고 대만에서 대륙 수복을 꿈꾸다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어떤 이는 모택동과 장개석의 삶을 비교하면서 모택동의 냉혈함과 장개석의 꼼꼼함이 희비를 갈랐다고 한다. 모택동은 아들 모안영(毛岸英)을 한국 전쟁에 보내 죽게 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데 비해 장개석은 모스크바에서 인질처럼 되어버린 장경국(蔣經國)에 대한 절절한 부정(夫情)을 드러냈는데, 이러한 성격차가 국공 내전의 승패를 갈랐다는 평가도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장개석

장개석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그는 빈틈이 없고 특별한 취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인물이었다. 장개석은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빗고 나면 반드시 물을 두 잔 마셨다. 한 잔은 온도가 30~40도 정도 되는 물이었다.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정도의 물이었다. 그런 뒤 다시 한 잔의 물을 마셨다. 이 물은 온도가 조금 높은 것이었다.

장개석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물 마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어느 자리에 있든 20분마다 물을 마셨다. 당연히 시종을 드는 사람들은 장개석이 외출할 때도 반드시 두 개의 보온병을 준비했다. 하나는 따듯한 물이고, 하나는 그냥 맹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처럼 물 마시는 것을 좋아한 것은 목이 말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장개석이 물을 즐겨 마신 것은 부인 송미령과도 관계가 있었다. 송미령은 미국 유학 시절부터 서양 의학에 심취했다. 미국의 영양학자와 교수들은 송미령에게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얼굴 미용에 도움을 준다고 권했다. 그런 뒤 그녀는 계속하여 이를 실천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은 송미령은 장개석에게 "물이 몸에 좋은 것은 순수하고 사람 인체에 유해하지 않고 오로지 유익한 것만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하면서 장개석에게 물 마시는 것을 권고했다.

장개석은 기상과 함께 물을 마신 뒤 시간을 엄수해서 아침 식사를 했다. 7시 정시에 아침 식사를 했다. 장개석의 아침 식사는 비교적 간단했다. 먼저 파파야(木瓜) 한쪽을 먹고 닭고기 스프를 곁들였다. 원래 장개석은 파파야를 좋아하지 않았다. 파파야의 구린내 나는 냄새 때문에 싫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파야가 위장병에 좋다는 걸 느끼고 이때부터 파파야를 좋아하게 되었다. 파파야는 송미령의 미용에도 사용되었다. 미국의 의사의 건의에 따라 파파야 물로 세안을 했다. 장개석과 송미령이 파파야를 좋아하면서부터 대만으로 철수한 뒤 각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파파야를 사림의 관저로 보내오는 바람에 오히려 넘쳐나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장개석은 절강성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식(點心)류를 좋아했고 주로 상해 스타일과 서양식의 제과를 좋아했다. 때로는 북방식의 면류도 즐겼다. 그러나 요구는 무척 까다로웠다. 간식은 일반적인 간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것을 좋아했다. 여기에 문화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을 좋아했다. 예를 들어 반드시 쪘을 때 물기가 많아지는 고기소를 넣은 만두(湯飽)나 광동식의 달콤한 소를 넣은 만두, 천진의 18가에서 파는 꽈배기, 제남의 달걀부침(蛋餠) 등을 즐겼다.

오찬은 상대적으로 풍성한 편이었다. 반드시 세 가지 요리가 있어야만 했다. 첫째, 기름 끼가 있지만 느끼하지 않은 닭고기 스프, 둘째, '황포계란(黄埔蛋)', 셋째는 소금에 절인 죽순 한 접시와 참깨를 갈아서 걸쭉하게 만든 잼이 반드시 있어야만했다. 장개석은 서양식을 즐긴 송미령과는 달리 평생 동안 중국 음식을 좋아했다.

먼저 닭고기 스프를 살펴보자. 장개석은 닭고기 스프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전체적으로 장개석의 건강은 닭고기 스프에 의지하는 편이었다. 매일 주방장은 그를 위해 푹 끓인 닭고기 스프를 대령했다. 2003년 타이베이 양명산(陽明山)의 초산행관(草山行館)의 양생 음식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장개석이 즐기는 음식이 공개된 것이다. 장개석의 양생 음식은 비빔면, 고추, 닭고기 스프, 그리고 골든 키위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닭고기 스프였다. 장개석의 시종관이었던 온원증(溫元曾)은 "어른(장개석)께서는 닭고기 스프 먹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다. 매일 그분을 위해 전문적으로 닭을 푹 고아드렸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장개석이 닭고기 스프를 좋아한 것은 중국 전통 요리관과 관련이 있다. 광동에서는 "닭고기가 없으면 주연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요리사 사이에는 "닭고기는 셰프에게 있어 추상화가의 화폭이다"라고 하였다. 요리의 기본이 닭요리라는 의미다. 또 중국 요리 업계의 속담으로 "장군은 총에 의지하지만 주방장은 스프에 의지한다"라는 말도 있다. 스프의 핵심은 고탕(高湯)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탕'은 돼지나 닭을 곤 국물을 의미한다. '고탕'의 기본은 닭고기 스프와 동의어다. 중의학에서도 닭고기 스프는 몸을 뜨겁게 하고 양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장개석은 닭고기 스프를 가장 즐겼다.

장개석이 즐겨 먹은 음식은?


다음으로 '황포계란'을 살펴보자. '황포계란'은 장개석에게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을 때 군관학교 학생들에게 이른바 '혁명 밥 함께 먹기'를 제창했다. 장개석은 매일 계란 프라이를 학생들과 함께 먹었다.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장개석은 '황포계란'에 대한 정이 깊었다. 그는 황포계란 프라이를 평생을 즐겼다.

장개석이 황포계란 프라이를 좋아했던 것은 육식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 계란 프라이를 먹음으로써 단백질을 보충시켜줄 수 있었다. 만년에 이르러 송미령은 달걀이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계란 프라이를 절제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달걀을 깬 다음 거품이 나올 때까지 세게 저은 후, 파 등을 넣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열한 뒤 완성한다.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주방장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달걀의 안은 부드럽고 밖은 바삭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쉽지 않았다. 장개석은 이러한 요리들을 좋아했다. 이들 요리는 외빈들을 맞이할 때도 제공되었다. 1953년 10월 미국의 닉슨 부통령이 이 연회에 초대되었는데 이때도 '황포계란'이 나왔고 이는 손님에 대한 극진한 대접이었다.

다음으로 소금에 절인 죽순을 살펴보자. 장개석은 죽순을 좋아했다. 소금에 절인 죽순은 장개석 고향 절강성 봉화의 향토 음식이었다. 깨 잼은 서양 요리의 조미품이다. 소금에 절인 죽순과 깨 잼을 먹으면 중서(中西) 결합의 의미가 있었다. 오찬이 끝난 뒤 장개석은 과일을 먹는다. 장개석은 음식을 절제하는 편이었다. 식품을 낭비하는 것을 죄악시하였다. 과일은 반드시 한 접시만 먹었다. 점심에 다 못 먹으면 저녁에 반드시 먹었다. 바나나 한 개라도 버리면 크게 야단을 쳤다.

장개석은 저녁에 기본적으로 네 가지 요리에 스프 하나를 먹었다. 이러한 습관은 50년간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개석 자신이 제창한 '신생활'이었으며 식사를 할 때도 공용 젓가락을 두었다. 공용 젓가락은 자기 앞에 두고 다시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현재에도 일부 지방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장개석은 술과 담배를 즐겼을까? 그는 젊은 시절에는 술을 즐겼다. 송미령과 결혼 한 이후 그녀의 권고대로 점차 술을 먹지 않았다. 이후 술을 한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담배도 피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할 때 술과 담배가 없었다. 그는 식사를 하면서 주로 업무 이야기를 했다. 참석자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장개석이 결론을 내리고 끝내는 식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모두가 물을 한잔씩 마셨다. 물론 차 잎도 넣지 않은 맹물이었다.

장개석의 업무 만찬은 무척 단조로웠다. 손님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다. 장개석의 시종비서관인 왕일장(汪日章)은 "장개석과 송미령이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음식도 평범했다. 일부 사람들은 만찬이 끝나고 배가 부르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 원인은 당연히 일종의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음식이 풍성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었다. 송미령의 주방에는 술과 고기가 거의 없었다. 모두가 음식을 조금 먹었고 중요한 것은 재료의 신선함이 우선이었다"고 회고한다.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하는 것은 최고의 대접은 송미령이 직접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1939년 유명한 문학가 호적(胡適)을 초대하여 송미령이 직접 요리를 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1945년 10월 모택동과 중경에서 이른바 '중경 회담'을 할 때 장개석은 모택동을 7번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장개석은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는 "혁명은 손님을 초대하여 밥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만으로 온 뒤 '혁명'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관저에 자주 손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했다.

장개석의 고향은 절강성 봉화이다. 그는 고향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봉화의 특산품은 풍부한 수산물이었다. 장개석은 특히 굴 조개를 좋아했다. 장개석의 본부인은 장경국을 낳은 모복해(毛福海) 여사다. 그는 장개석이 송미령과 결혼한 뒤에도 봉화의 특산인 대합을 정기적으로 남경의 장개석에게 부쳤다. 모 부인은 또한 소금에 절인 당지의 특산인 닭즙 토란, 갓에 고기를 얇게 썬 요리와 조기찌개를 보냈다. 그 가운데 닭즙 토란은 장개석이 평생 동안 좋아한 음식이었다. 봉화 지역의 토란은 연하고 맛있었다. 요리 방식은 토란을 구운 다음 다시 닭고기를 넣고 푹 고아서 만들었다.

장개석은 어릴 때 얼음을 즐겨먹어 일찍부터 치아가 모두 망가졌다고 한다. 만년에 이르러 장개석의 영양과 치아를 보호하기 위해 토란을 요리 재료로 많이 사용했다. 토란은 부드럽고 영양이 풍부한 동시에 불소 성분이 많았기 때문에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토란은 치아가 좋지 않고 위가 나쁜 장개석에게 완벽한 식품이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요리를 창조했다. 예를 들어 닭즙 토란 이외에도 토란 닭볶음, 토란 산채, 토란 배추, 토란 당면, 토란 돼지고기, 토란 새우 등이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장개석이 가장 좋아한 것은 토란 배추와 토란 미나리였다. 이러한 요리들은 장개석이 육식을 절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장개석은 오이장아찌를 좋아했다. 이 식품은 장개석이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장개석은 어릴 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였다. 매번 보리 고개를 겪을 때마다 짠지만으로 밥을 먹었다. 오이장아찌는 만드는 과정이 간단하다. 솥에 소금물을 끓이고 오이를 깨끗하게 씻은 뒤 끓인 소금물을 부어서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의 주둥이를 밀봉하고 겨울을 나게 되면 소금에 절인 오이장아찌가 된다. 장개석은 이 음식을 대할 때 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장개석이 즐긴 음식은 아주 평범하고 소박했다. 닭고기스프 한 그릇, 소금에 절인 죽순 한 접시, 오이장아찌 한 접시, 그리고 황포 계란이었다.

부인 송미령과 식사를 할 때 장개석의 식탁에는 짠지들과 닭고기 스프였다면 송미령은 채소 샐러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음식을 보고 농담을 하곤 했다.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당신은 전생에 양이었소? 어찌 그리 풀 먹는 걸 좋아하오?" 이에 송미령은 "당신은 절인 죽순과 시커먼 깨잼이 뭐가 그리 맛있나요?"라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장개석은 모든 과일을 다 좋아했지만 사과만은 잘 먹지 않았다. 이에 비해 송미령은 사과를 특별히 좋아했다. 저녁에 두 사람은 죽을 먹고 반찬으로 절인 죽순과 깨잼을 먹었으며, 식사 뒤에는 산보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생활이 규칙적이었고 과학적으로 건강을 챙겼다.

장개석은 고향의 해산물 외에도 생선을 즐겼다. 서호의 우럭을 좋아했다. 서호의 우럭은 먼저 찌고 나서 튀긴다. 그런 뒤 소스를 넣어 먹었다. 장개석의 주방장이었던 증행규(曾杏奎)는 생선 요리를 하는 방법으로, 생선의 원 맛을 유지하는 것을 기초로 하고 그 이후에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를 했다고 술회했다. 그가 밝힌 것은 장개석이 생선 요리 가운데 가장 좋아한 것은 드렁허리(鱔漁, albino swamp eel)였다. 드렁허리는 민물에 살고 뱀장어와 유사한 어류다. 요리 방법은 드렁허리를 토막 낸 뒤 살짝 볶은 다음, 간장을 넣어 색을 입히고 소홍주를 넣고 조미료를 가미하여 졸이거나 뚜껑을 닫고 익히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항주 요리에 해당한다. 또한 장개석은 드렁허리에 죽순을 넣어 볶아달라고 했는데 이는 상해의 유명한 요리이기도 하다. 원래 드렁허리 요리에는 죽순을 넣지 않는다.

▲ 1966년 쌍십절 기념 행사에 참석한 여든이 가까운 나이의 장개석. ⓒwikimedia.org

장개석의 양생법

전체적으로 장개석은 소식을 하는 편이었고, 취미도 특별하지 않은 무미건조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양생 측면에서는 매우 성공한 인물이다. 장개석은 음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7가지 원칙을 추구했다. 첫째, 소식하고 배가 부르면 적당한 수준에서 멈춘다. 둘째 단 음식을 피하고 심심하게 먹는다. 셋째, 차는 진하게 마시지 않고 비리고 매운 것은 먹지 않는다. 넷째,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밥을 먹되 식사 시간을 엄수한다.

다섯째, 육류와 야채를 조화시키고 요리의 컬러도 매치시킨다. 여섯째, 두부요리를 많이 먹으면 치매를 방지할 수 있다. 일곱째, 망고와 바나나는 장 활동을 촉진시킨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음식 습관은 모택동과는 정반대였다. 원래 장개석도 고추를 즐긴 적은 있다. 중경에 있을 때 고추를 매우 좋아했지만 송미령 때문에 안 먹게 되었다.

장개석이 음식의 컬러가 조화로워야 한다는 점은 최근 유행하는 컬러 푸드와 같다. 사림(士林) 관저의 두부 요리도 특별한 것이었다. 장개석은 다양한 두부 요리를 즐겼다. 두부 새우, 두부 조기, 두부 연뿌리, 두부 해삼, 두부 전복 등이다. 모두 중국 전통 의학과 음식 자료를 참고한 것들이었다.

중국인들의 삶의 목표는 세 가지다. 장수, 부자, 관록이다. 모든 것을 다 얻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어느 하나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 장개석은 88세를 살았다. 장수한 권력자다. 관록도 총통에 올랐으니 이미 달성한 셈이다. 특별히 부유하지는 않았다. 역사에서는 패장이자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절제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양생법의 핵심은 단순하고 절제된 생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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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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