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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들도 즐긴 개고기 식문화,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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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들도 즐긴 개고기 식문화, 달라질까?

[한인희의 중국 역사의 뒤뜰] 중국인의 육식 ① 개고기와 중국인

고대 중국에서는 고기를 먹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면 고대 중국인들은 어떤 고기를 먹었을까? <주례>의 기록에 따르면 상고시대의 주왕(周王)의 음식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기본적으로 '육축(六畜)'을 먹었다. 육축이란 소, 양, 말, 닭, 돼지, 개를 일컫는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고대 중국의 귀족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개고기를 구육(狗肉), 향육(香肉), 지양(地羊)이라고 불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80년부터 '단고기(甜肉)'라고 부른 이래로 지금도 개고기를 그렇게 부른다. 1970년 4월, 저우언라이(周恩来) 중국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개고기로 연회를 마련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어떤 외국 학자는 개고기를 먹는 문화는 유가 문화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 한국, 베트남 등지에서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인류학자들은 개가 1만4000년 전 즈음부터 늑대로부터 가축화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후 중국에서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였다. 개는 신석기 시대 때부터 가장 잘 훈련된 가축이었다. 당시 중국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개가 사육되었다. 따라서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광범위하게 개의 유골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남장두(南庄頭)에서 발견된 개의 유골로 거의 만 년 전이고, 하남성의 배리강(裵李崗) 유적지에서 발견된 개의 유골은 8000여 년 전의 것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개를 먹기 시작한 중국인


그런데 당시 원시인들이 생활했던 유적지에서 나온 개의 유골은 다른 동물의 유골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당시에 개를 식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발견되는 개의 뼈는 대부분 분쇄되어 있는데 원시 인류가 개고기를 먹고 뼈를 부수어 버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상나라와 주나라에서 개는 가장 중요한 가축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개는 집을 지키고, 사냥에 이용되고, 최후에는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개고기는 육식의 등급 측면에서 다른 동물에 비해 지위가 높았다. 그 서열은 소고기와 양고기 다음이고 돼지고기보다는 더 높게 평가되었다. 당시 개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귀족이었다. <예기·왕제>편에 "제후는 이유 없이 소를 죽여서는 안 되고, 대부는 이유 없이 양을 죽여서는 안 되며, 사(士)는 이유 없이 개와 돼지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사(士) 이상의 귀족이어야만 비로소 개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예기·내칙(內則)>에는 주나라 시기 진귀한 음식인 '팔진(八珍)'에 기름으로 튀긴 개의 간이 들어가 있었다.

한편으로 개와 개고기는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에 귀족들의 제사나 장례에 주요한 제물로 사용됐다. 이것은 한자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바치다'라는 의미의 '헌'(獻)'이라는 글자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개를 뜻하는 견(犬)를 제사에 공헌(貢獻)하는 것으로 공경과 정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다른 하나로 '헌(獻)'자를 해부해 보면 좌변에 '격(鬲)'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 글자는 도기나 청동기로 만든 솥을 의미한다. 이는 음식을 만들 때 기구를 뜻한다. 따라서 '헌'이라는 글자는 결국 개고기를 솥에 넣고 삶는다는 뜻으로 신에게 공경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하나의 글자를 보면 '연(然)'자이다. 의미는 '그러하다'라는 긍정적으로 표시할 때 쓰는 말이다. 글자를 분석해 보면 '굽다'라는 의미의 '자(炙)'와 개(犬)가 합쳐진 글자인데 의미는 개고기를 구우면 맛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然)'은 예스(Yes)의 뜻인 것이다. 따라서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는 맛있었다는 표현이 곧 긍정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개고기, 중국의 제사나 장례에 제물로 사용되다

상(商)대의 갑골문에는 여러 차례 개와 관련된 제사인 '견제(犬祭)'의 기록들이 나온다. 이른바 '견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사자와 함께 묻어주는데 이는 생전에 주인을 도와 사냥을 하고 여러 가지 도와주었듯이 주인의 저승길에도 함께 따라가라는 의미다. 또 다른 의미는 신령께서 개고기를 드시고 사자의 평안을 도모해 달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개고기의 식용은 중국의 북방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남방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남방의 초나라와 월나라에서도 개고기 먹는 일이 성행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초나라에서는 궁중과 귀족들만이 즐겼다면, 월나라에서는 평민들도 귀족들과 함께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백성들에게 자식을 많이 낳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아들을 낳으면 술 두 독과 개 한 마리를 상으로 주고, 딸을 낳으면 술 두 독과 돼지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다."(국어·월어)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당시 개의 지위는 분명 돼지보다 높게 평가받고 있었던 것이다.

전국시대에 들어서 개를 식용하는 상황은 보편화되었다. 특히 <예기·왕제>에서 엄격하게 규정한 "지식인 계급은 이유 없이 개와 돼지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이미 구속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는 개를 도살하는 상황이 증가했다. 이러한 수요에 따라 개를 잡는 직업도 나타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시기 5대 자객으로 이름을 떨친 섭정(聶政)은 "집안이 가난하여 개 도살을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전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개 사육이 보편화되었고, 과거의 권력자들만이 개고기를 먹던 습관에서 일반 평민의 음식에도 개고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개고기 식용의 오랜 역사

역사상 일찍부터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먹었던 것은 이미 현대 고고학의 발견으로 증명되고 있다. 2010년 11월 섬서성 서안의 함양(咸陽) 국제공항 제2기 건설 공사장에서 건설에 앞서 고고학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2400년 전의 진나라 묘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청동정(靑銅鼎)이 발견되었다. 이 청동정에서 '보신탕'을 끓인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다.


진한(秦漢) 시기에 이르면 개고기는 백성들의 주요한 육식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나라의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유명한 화상석(畵像石)에 주방에서 개를 잡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회남자>에는 개고기와 돼지고기에 대한 논쟁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특히 동한의 허신(許愼)의 <설문해자>에서 '육부(肉部)'를 보면 "연(肰)은 개고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의 개고기 음식은 다양하게 발전했다. 특히 개고기 편육과 당시 크게 인기가 있었던 음식은 개고기 육포인 '용포(庸脯)'였다. 이 요리는 먼저 개고기를 삶아서 꺼내서 산초가루와 생강가루를 뿌린 뒤 건조시켜서 각종 조미료를 하면 개고기 육포가 되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 식품이었다. 서한 시기 부유한 자들은 개고기를 먹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먹었다. 이때까지 개고기는 돼지고기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후 한나라에 이르러 개고기를 먹는 분위기는 여전히 왕성했다. 한나라 개국 황제인 유방(劉邦)도 개고기를 좋아했다. 유방은 강소성의 패현(沛縣) 출신이다. 당시 패현의 개고기는 중국에서도 특별히 맛있기로 이름이 났다. 양념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개고기를 먹을 때 생 산초를 같이 씹으면 맛이 특별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개고기의 특유의 비린내를 제거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생 산초는 그다지 맵지 않았다고 한다.

한고조 유방의 부하들도 대부분 개고기를 즐겼다. 유방의 고향 친구인 번쾌(樊噲)는 후에 대장군에 임명되지만 초시적에는 '개 도살'을 직업으로 하는 하층민이었다. 초한(楚漢) 쟁패 시기 유방은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얻은 뒤 고향 패현으로 돌아오자 축하연을 마련했다. 이때 올라온 요리 중 특히 개고기에 술을 마시며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 등장하는 한신(韓信)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도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고 한탄하며 유방을 원망했던 점에 유래되었는데 역시 개를 삶아먹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좋아했던 것은 미신 및 개고기 품질과 관련이 있다. 중국 고대 전통 양생학은 개고기가 몸을 보하는 데 매우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의 맹선(孟詵)의 <식료본초>(食療本草)에서는 "개고기는 오로칠상(五勞七傷)을 당한 사람, 즉 신체가 허약하고 병이 많은 사람에게 몸을 보신하고 혈맥을 보충하며 양위를 두텁게 하며 하초(下焦)를 실하게 하고, 정수를 채운다"고 했다. 5대 10국시기의 <일화자본초>(日華子本草)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다. "개고기는 따뜻한 성질을 갖고 있으며, 독성이 없고 위의 기를 보충하고 양기를 키우며 허약함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에 도움을 준다"고 약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보신의 개념이 중국인들에게 개고기를 먹게 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진한 이전의 사람들이 비록 개고기를 좋아했으나 어떠한 개고기도 모두 먹었던 것은 아니다. 개의 형태, 품종, 털색 등에 모두 까다로웠다. <주례·청관총제>에서 다리에 털이 없는 개는 먹지 않았다. 이러한 개는 고기가 노린내가 많이 나고 건강에 오히려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도 황구가 영양가치가 가장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식료본초>에서는 "개는 누렁이가 최상이고, 백색, 검은 색이 그 다음이다"라고 했다.

유목민족의 등장과 개고기의 쇠퇴

위진 남북조 시기가 되면서 북방 중원지역에서 점차 개고기를 먹는 풍조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수당 시기에 이르면 개고기를 먹던 풍속은 서서히 약해지고 개를 잡는 직업도 희소해졌다. 일반인들의 관념 속에는 개는 이미 식용하는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득이 할 경우 개를 잡았다. 특히 개를 잡는 행위는 깡패들이나 하는 일로 보기 시작했다. 왜 이러한 상황이 나타났을까?

몇 가지 원인이 있다. 먼저 위진 남북조 시기가 되면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중원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유목민족은 양고기를 위주로 먹고 특히 개는 함께 생활하는 가족의 개념이었다. 따라서 개고기를 먹는 행위가 점차 사라져갔다. 또 다른 측면에서 양의 사육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유입되면서 양고기의 소비량도 증가하게 되면서 개고기의 소비도 줄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불교의 중국 유입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 오계(五戒) 중 첫 번째 계를 직역하면 "생명 죽이는 것을 멀리하는 계를 지키겠습니다"이다. 즉 '살생하지 말라'는 불살생계(不殺生戒)와 관련이 있다. 불교의 유행은 중국인들에게 개고기의 육식을 금지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사회적으로 개고기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등장한다. 개고기의 지위는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개고기는 고급 연회에 오를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개고기를 먹는 것도 크게 억제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는 몰래 '문을 닫고 개고기를 먹는' 상황이 나타났다. 민간에서는 "하늘에는 용고기, 땅에는 개고기"라는 속어가 떠돌며 자신들의 개고기 먹는 것을 합리화했다. 당나라 이후 개고기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했다. 특히 파계한 승려나 하층민들이 개고기 먹는 것을 자주 이야기했다. <수호지>의 파계승 노지심(魯智深)은 술에 취해 산문을 깨부수고 들어가 개고기를 훔쳐 먹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수나라와 당나라 이후 개고기를 먹는 문화는 크게 변하였다. 상층인사들은 양고기와 소고기로 바뀌었고 하층민들은 개고기와 돼지고기로 육식문화가 변화한다. 특히 마지막 왕조인 여진족인 청조에서는 개고기를 먹는 풍조는 거의 사라졌다. 그 이유는 청조를 건국한 누루하치와 개의 관계 때문이다. 누루하치가 명나라 군대와 싸울 때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까치와 황구였다. 이후 청조 여진족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따라서 중국인들에게 청조 시기는 개고기와는 거리를 둔 시기였다.

▲ 개고기 축제를 풍자하는 중국 만평. ⓒ구글 이미지 검색


시대가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부터 시작된 중국 남부 광시장족 자치구 위린시에서는 매년 6월 '개고기' 축제가 열린다. 개가 주로 잡히지만, 고양이도 잡아먹는 축제다. 그동안 전 세계 동물보호단체들이 이 축제에 대해 반대하는 동시에 축제가 열리지 못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지만 이 축제는 올해도 열릴 전망이다. 이런 문화는 중국 전통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2015년 통계로 중국인들의 반려동물로 개를 키우는 인구는 1억 500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개가 61.74%이다. 다음으로 고양이 19.13%, 거북이 6.09%를 키우고 있다. 이제는 변화해야 할 문화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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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

건국대학교 국제학부에서 가르치며, 한중사회과학학회 회장과 KU 중국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대만 중국문화대에서 중국 근대 정치사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의 영웅들>을 비롯한 다수의 저서와 <중국 외교사> 시리즈 및 <대만 현대 정치사> 등 20여 권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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