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누구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한다. <사기>에 "백성은 먹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民以食爲天)"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곧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권력자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도 권력 행위인 것이다.
황제는 매일 아침 독서가 끝난 뒤 아침식사를 했다. 황제가 밥을 먹는 것을 '진선(進膳)' 혹은 '용선(用膳)'이라고 불렀다. 청대 황제들의 '진선'은 만주족의 전통 음식과 북경 음식 위주였다. 청나라 황제들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천하의 음식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각지의 풍미가 들어있는 미식을 바탕으로 '궁중 요리'를 발전시켰다.
황제는 무엇이든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 역대 황제들이 먹는 데 쓴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근검절약한 편이었다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와 황후의 식사비를 계산하면 매년 일상적인 식비만 백은 1만6872량으로, 당시 곡식 가격으로 환산하면 52만 달러(한화 약 6억 원)였다. 따라서 다른 황제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청대의 황제들은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했다. 아침식사와 저녁식사였다. 이것이 공식 식사인 '정선(正膳)'이다. 아침 식사인 '조선(早膳)'은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 저녁식사인 '만선(晩膳)'은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에 먹었다. 이에 더하여 매일 저녁 한차례 '만점(晩點)'인 간식을 먹었다. 물론 황제는 공식적인 식사 외에도 음식이 필요하면 언제든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규정은 두 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황제의 '용선'은 특별히 장소가 정해져 있기 보다는 집무를 보던 곳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 시간이 되면 태감들이 '전선'의 장소에 식탁을 신속하게 배치한다. 식탁을 설치하면 태감들은 신속하게 음식을 날라 온다. 반드시 '진선'의 규정에 따라 식탁에 음식을 배치했다. 배치가 완료되면 시선(侍膳) 태감이 작은 은패를 가지고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여부를 검사했다. 이것을 '상선(嘗膳)'이라 했다. 사실 황제는 태감이 먹은 음식을 먹는 셈이다. 안전함이 확인되면 황제가 비로소 젓가락을 든다.
좋아하는 것을 무작정 먹을 수 없었던 황제의 식사
황제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너무 많기 때문에 수발을 드는 태감이 계속 황제에게 접시를 대령한다. 황제로 하여금 준비된 모든 요리를 맛보게 함이다. 만약 황제가 좋아하는 요리를 먹으면 태감은 더 이상 다른 음식을 올리지 않는다. 다만 음식을 올리는 척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황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려는 의도다.
문제는, 황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가 올라왔을 때도 많이 먹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황제에게 제공되는 식은 한번만 먹도록 되어 있다. 황제가 특별히 좋아하면 두 번 먹을 수는 있지만 그 요리는 한 달 동안 더 이상 '진선'할 수 없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 황제가 세 번을 먹으면 그 요리는 황제의 식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황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알려져 그 요리에 독을 넣을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의 안전은 왕조의 안정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철저했다.
청대 황제의 음식은 일상적인 '진선'과 '연회'가 있었다. 일상적인 '진선'은 어선방(禦膳房)이 책임을 졌다. 그 밖의 황제가 개최하는 각종 연회는 광록시(光祿寺)와 예부(禮部)의 정선청리사(精膳淸吏司)와 궁내 어다선방(禦茶膳房)이 공동으로 책임을 맡았다. 어선방을 책임지는 관리와 주방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370명이었고, 어다방(禦茶房)과 청다방(淸茶房)에 근무자는 120명 정도였다. 두 곳에서 일하는 태감만 150여 명이었다. 황제 한사람의 음식 준비를 위해 600여 명이 동원되는 셈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음식을 먹을 때 36명의 의장대가 동원되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제가 먹는 삼시 세끼는 '예의'로 시작되어 '예의'로 끝난 것이다.
황제의 음식을 준비하는 기관은 세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궁정 내 어다선방 산하에는 음식 재료에 따라 별도의 기관을 두었다. 예를 들면 육류 요리 담당은 훈국(暈局), 야채 요리는 소국(素局), 화로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곳은 과로국(掛爐局), 간식을 책임지는 점심국(點心局), 그리고 주식인 밥을 담당하는 반국(飯局)이 나뉘어 어선을 준비했다. 아주 전문화된 주방 체제였다.
매번 어선에 관한 메뉴를 담당하는 관리는 내무부 대신이었다. 청대에는 내무부총관(內務府總管)이라고도 했다. 그가 황궁 관리를 책임졌다. 당연히 황제의 가장 측근이 맡았다. 내무부총관은 매일 황제에게 제공된 요리의 이름을 어선방이 책임지고 자세하게 기록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매달 한 권의 책으로 제작했다. 이를 선저당(膳底檔)이라 한다.
어선을 만들 때 모든 요리에 들어가는 조미료도 엄격한 규정이 정해져 있었다. 규정이 된 뒤에는 조금의 증감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선의 주식과 부식에 대해서도 엄격히 구분했다. 왜냐하면 주재료의 원래 맛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혼밥(혼자 밥 먹기)'의 기원은 황제로부터
황제는 대부분 독상을 받고 혼자 식사를 했다.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어떠한 사람도 황제와 함께 식사할 수 없었다. 밥은 여럿이 함께 먹어야 맛이 있다. 감정을 교류하며 식사를 하면 식욕도 증가된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그럴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저 태감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황제는 일반인들처럼 가족 간의 대화를 하면서 음식을 즐기는 천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사랑하는 후비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할 수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후비들은 자신이 속한 본궁에서 '용선'을 했다. 이유는 후비들도 황제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어야만 했기 때문에 번거로운 예절을 갖추기가 쉽지 않았다.
황제와 같이 식사를 하거나 제공된 요리에 대해 황제가 특별히 좋아하면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는 많지 않았다. 황제의 '진선'은 우리가 아는 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황제에게 제공되는 '진선'은 종류도 많고 다양했다. 요리는 수십 종이다. 그 많은 요리를 황제 혼자서는 모두 먹을 수 없다. 대부분 모양만 갖추어 놓았을 뿐이다. 일단 황제가 '용선'을 마치면 남은 것은 비빈, 황자, 공주 및 대신들에게 하사되었다.
황제가 주제하는 명절 연회는 자금성의 태화전, 보화전, 그리고 건청궁에서 거행되었다. 식탁은 궁 내실의 황제 보좌의 정면에 황제를 위한 큰 탁자를 배치한다. 이른바 '남좌북배'다. 황제는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서 앉는다. 신하들은 북쪽을 보고 머리를 조아린다. 따라서 황제가 좌정하면 동서로 대신, 왕공, 황자들의 음식상이 배치됐다. 매년의 섣달그믐의 가족연은 황제와 후비들이 축하연을 배치하지만 요리의 품수, 사용하는 그릇들도 황제와 분명하게 구별되었다. 이는 예제로 존비를 구별하고 등급의 차이를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중국 역대 황제는 마음대로 때에 맞춘 채소와 과일들을 먹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선을 제공하는 태감들 입장에서는 황제에게 식탐이 생기면 목숨을 잃을 위험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황제가 여름에 갑자기 겨울 죽순(冬筍)을 찾거나 한 겨울에 신선한 잠두(蠶豆, broad bean)를 먹고 싶어 하면 제공할 수 없게 되는데, 황제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대역죄가 된다. 이를 책임 진 신하들은 황제의 희로애락에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여 너무 맛있는 음식을 대령하지 않게 조절하는 것이다.
일부러 맛없는 음식을 대령했던 태감들
같은 논리로 민간의 일부 미식도 황제가 먹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제공할 수 없었다. 한 예로 청나라 건륭황제가 남순(南巡), 즉 강남을 순시할 때 양주(揚州) 지방의 돈 많은 소금상인들이 황제를 위해 최고급 음식이 나오는 주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음식을 맛본 건륭황제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황제를 위한 음식 준비에 최선을 다한 소금 상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
그러나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황제를 수행하는 태감들이 염상들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너무 겁먹지들 마시오. 황제께서 당신들이 준비한 최고급 요리를 드시고 궁으로 귀환하셨다가 만약 이곳 요리가 생각이 나 준비하라 명하실 것이 걱정이었소. 그래서 우리가 어선이 올라갈 때마다 모든 요리에 설탕을 한 국자씩 퍼 넣었소! 우리도 살아야지요!"라고 했다. 태감들이 목숨을 지탱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실제로 황궁에 있는 주방장들은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요리사들을 선발했을 텐데 요리 솜씨가 양주 지방의 주방장보다 못할 리가 있겠는가? 문제는 궁정의 '진선' 규칙이 너무 까다로운 점과 관계가 있었다. '진선'을 만들 때는 어떻게 만들고 원료를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지 모두 기록해야만 한다. 그리고 궁정의 요리사들은 이러한 규정된 레시피에 따라 요리를 만들어야만 했다. 따라서 요리사 마음대로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퓨전 요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황제에게 가장 좋은 음식은 무엇일까? 중국 민간에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황제가 산해진미를 다 먹어본 뒤에도 맛있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어선 주방장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내오도록 지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주방장은 당황해서 황제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궁중에는 없습니다. 저자거리에 맛있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하여 어느 날 주방장은 황제와 함께 저자거리로 나가서 최고 요리를 찾아보자고 했다. 주방장은 황제가 배가 고플 때까지 이곳저곳을 모시고 다녔다. 아무리 돌아다녀 보아도 황제가 원하는 최고의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침내 시간이 한참 지나 주방장은 배가 고파진 황제에게 보통의 밀가루로 만든 '만두(饅頭)' 한 개를 올렸다. 허기가 진 황제는 '만두'를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그리곤 말했다.
"여보게, 이것이 천하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일세!"
최고 권력자인 황제에게나 평범한 일반 백성들에게나 '허기'가 최고 미식의 근원인 셈이다. 황제나 백성 모두에게 배고픔은 인간으로서 갖는 똑같은 욕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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