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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의 도전,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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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의 도전, '뭣이 중헌디?'

[김영미의 중국 미술 깊게 읽기] 송동(宋冬)의 작품이 보여주는 존재와의 관계성

송동(宋冬)은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인스톨레이션(installation)까지 다양한 형식들로 작품을 만든다. 그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여타 중국의 아방가르드한 작가들처럼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면서 중국 현대 미술계에 '당대(contemporary)'적 성질을 부여했다.

그의 작품은 '가치없음(unworthiness)'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가치를 획득해 가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그의 예술은 일종의 모순된 것들의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치 없는 것(또는 의미 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들을 재조명함으로써 그것들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중국 사회주의의 현대성(modernity)을 벗어난 새로운 가치들에 주목하게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현대성은 공산주의의 제1단계로서의 사회주의와 시간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그는 지금의 중국이 이행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움직임들에 발맞춰 가면서, 동시에 앞 시기의 사회주의적 특성이 지녔던 가치들을 부정하는 형태로 자신의 예술 행위를 한다.

가치 없음으로 가치 있음에


우선적으로 송동은 순간적인 포착에 주력한다. 그는 지난 사회주의가 존재의 유일성에 가치를 두었던 것에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말하는 유일성이란 주로 기록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마오(毛澤東)의 언행록이라든가 동상 등 이데올로기에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붙잡아두고 영원성을 보장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는 이런 가치들과 그 영원성을 부정한다.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 노선에서 새로운 국면을 전개한다. 그는 미술 작품을 개인에게 소유하도록 허락지 않는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개인 소유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노선에 완전히 부합한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 행위들은 영원이 아닌 일회성, 그리고 소유가 아닌 무소유에 닿아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1978년 개혁 개방 이전의 사회주의시기에 대한 내용을 부정하는 이중 작업이다.

▲ [Writing Diary With Water](1995년~). ⓒSongdong


송동이 이런 생각을 물질화시킨 지점은 제재(題材)에 있다. 그는 '물(water)'을 선택한다. 물은 그 속성상 변화가 가능하다. 액체 상태에서 기체로 다시 고체로. 또한 고체인 얼음의 형태 역시 온도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다. 바로 이러한 자유스러움과 변형 가능한 성질은 그의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는 물 위에 도장을 찍거나([Stamping On Water](1996년)), 물을 주전자에 담아서 길에 뿌리거나([A Pot of Boiling Water](1995년)), 또는 물로 글씨를 쓴다([Writing Diary With Water](1996년~)).

여기서 주의할 것은 물이 관계를 맺는 물질들이다. 물 위에 하염없이 찍어댄 실체(도장)는 고체이다. 또한, 도장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어로 물을 의미하는 '수(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 도장은 진짜 물에 닿는 순간, 그러니까 관계를 갖는 순간 가장 의미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주전자 통에 담긴 물이 버려지는 곳은 땅바닥이다. 이 땅바닥은 대지인 동시에 사물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커다란 어떤 덩어리이다. 그것은 물과 만나면서 의미를 갖지만 동시에 물이 마르게 되면 그저 대지일 뿐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기록되지 않는 일기를 물로 지속적으로 쓰는 행위 역시, 이러한 의미 없는 일들의 연속성 위에 있다.

제롬 상스(Jerome Sans)는 그의 이런 미학을 두고 '소실 미학(aesthetic of disappearance)'이라고 부른다. 사라짐의 미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송동이 선택한 도장과 붓, 그리고 주전자라는 형태가 물의 형태를 고정시키려는 성질이 강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물이라는 사물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니콜라 부리오가 말하는 '관계적 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미술이 동시대적 감각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송동에게 있어서만큼은 이러한 행위가 지난 사회주의 시기 미술과 달라지면서 새로운 사회주의의 국면을 드러내는 지점에 있다는 성질은 '포스트모던'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것의 지역적 특성, '중국적인' 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분히, 이것은 중국이라는 공간에서 행해지는 '이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며,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물은 송동에게 어떠한 자유를 상징한다. 일찍이 그가 톈안먼 광장에 대고 40분간 입김을 불어 넣어 입김이 언 얼음을 마주대하던 하루 저녁의 퍼포먼스는, 아침이면 사라질 그의 작은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Breathing](1996년)). 사실상 여기서 그의 자유를 향한 입김은 기체의 형태이지만 그것은 액체와 고체 사이에 처한다. 이로써 물은 또 하나의 관계성 속에서 의미 없이 사라질 존재가 된다. 이 역시 송동의 예술 행위가 중국 사회주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을 남기게 된다.

▲ [Calendars](2013년). 폼은 송동이 제공하고 관객이 개인적으로 그 폼에 페인팅을 할 수 있음. ⓒ36calendars.org

그래서 송동에게 있어서 물이라고 하는 것은 각자의 기억 속에 남은 잔상, 그리고 지속적으로 흘러가는 생명력을 지닌다. 2013년 그는 이런 물의 속성과 그 관계성, 그리고 부질없는 기록의 성질에 주목하면서 캘린더([Calendars](2013년))를 부활시켰다. 여기서 그는 1978년부터 2013년 사이 36년간의 개인적 시간들을 기록할 수 있는 달력을 준비하고, 관객 참여 형태의 플럭서스 아트(Fluxus Art)를 선보였다. 이것은 온라인으로도 참여할 수 있는 형태의 아트로, 여기 비어있는 공간은 온전히 관객 개인의 몫이 되는 그런 작품의 형태를 지닌다. 즉 작가는 폼을 제공하고, 작품의 내용은 온전히 관객 개인에게 임의적으로 맡겨지게 된다. 또한 그 작품은 프린트를 할 때마다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자유로운 형식이야 말로 새로운 포스트 사회주의에 강력히 요구되는 사항이다.

요즘 시쳇말로 "뭣이 중헌디"라고 하는 것의 중요함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획일화되거나 혹은 고정된 그 무엇으로 남겨질 수 있는가의 문제에 송동은 도전한다. 그래서 송동은 자기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존재성에 물음을 던지고 존재와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거기서 찾은 것은 바로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가족들이다. 또한, 그가 기록이라는 의미를 살릴 수 없는 제재를 택하는 것은 '의미 있다는 것'의 세부적인 감성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개인적 감수성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가족에 대한 기록 혹은 개인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 않더라도 어떠한 관계성 속에서는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사실 여기서 부각되는 '가족'이라는 어휘는 북경대의 따이진화(戴錦華) 교수가 말했듯이 1990년대 중국에 떠오른 중요한 개념을 끌고 왔다. 집체적인 노동단위는 생산의 지점에 가있고 그것의 중요성은 사회주의 시기에 극점에 다다랐다. 이제 송동은 그것의 중요성을 거부한다.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그리고 송동은 또 하나, 유동적인 물이 아닌 고체 형태들을 나열한다. 여기서 고체라는 물질은 응집된 형태일 텐데, 특이하게도 그는 그 고체들을 응집시키지 않고 나열함으로써 그 기억들을 세세하게 살핀다. [Waste Not](2009년)에서는 어머니가 문혁 시기부터 쓰던 부엌 용품과 빈 박스, 작은 소품들, 한마디로 말해 보잘 것 없는 가제도구들이 하나 하나 줄을 맞춰서 나열되어 있다.

그림 3. 낭비하지 마라[Waste Not, 부분], 2009. ⓒartzip.org

이 작품은 단순히 사회주의 노스텔지어로 치부하기에는 매우 냉정한 겉 표면을 지니고 있다. 언제라도 물자가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으려고 했던 어머니의 강박관념들은 이렇게도 자질구레한 것들로 보이지만, 이러한 나열은 어머니의 시간들이 하나 하나 쪼개어 아프게 해체됨으로써 소중해진다. 이것은 사회주의 시기 그 자체에 대한 향수가 절대 아닌 것이다. 어머니의 실제 삶을 이루었던 그 짜투리 감성들의 구체적인 형태다.

물론 어머니의 기억들을 해체해가는 작업만큼이나 그에게 가족의 의미로서 아버지는 직접 만질 수 없는 상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포착하기 어려운 상대이다([Touching My Father](2002년)). 비디오 아트로 펼쳐진 이 작품에서 손모양의 빛은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신체를 어루만진다. 송동은 어린 시기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런 아버지 때문에 과부로 지내며 고생했던 어머니는 또 다른 관계성을 이루는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위의 어머니의 물건들을 나열한 작업들의 내부적 호응을 이루는 다가갈 수 없는 아버지를 외부적 형태로 작품화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연결된 작품들은 나중에 그 자식인 ‘우리’에게까지 순환을 이룬다. "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우린 잘 살아요"라고 하는 말은 이제까지 그가 끌어냈던 가족들의 의미들에 완전한 방점을 찍는 것이 된다([Dad and Mom, Don't Worry About Us, We Are All Well](February to June 2011 at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 San Francisco)). 쓰레기로 점철된 전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엄마와 아빠와 우리들이다. 쓸모없는 것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작은 온정들이 그곳에 숨겨지게 된다. 어쩌면 송동이 바라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작은 사회일 것이다. 중국의 포스트 사회주의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그래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결국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송동이 해석하는 지난 시기 사회주의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계급 없는 사회, 그래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차이가 없어질 수 있다는 유토피아 세계. 그는 그 세계가 가능하다고 순진하게 믿도록 만들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야말로 가장 가치 없는 사회주의의 정치행위가 자행된 시기였다고 역설적으로 지적한다. 즉, 그는 지금 가장 쓸데없어 보이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오히려 생산적이려 했던 지난 사회주의 시기가 더욱 쓸데 없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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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매체에 중국 현대 미술과 현대 미술 작가들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초기 경극 형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희곡예술연구원에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한국 전통극 배비장전을 경극으로 기획하고 연출했다. 2003년 코넬 대학교 동아시아 프로그램 방문 연구를 계기로 중국 영화 비평을 시작하여, 전주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패널로 활동했다. 저서로 <현대 중국의 새로운 이미지 언어 : 미술과 영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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