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고용노동부 장관 고시를 앞두고 이의 신청 기간이 있지만 통과 의례에 불과하다. 게다가 필자를 포함한 9명의 노동자위원들이 사퇴를 이미 선언한데다, 공익위원 한 명도 사퇴를 표명했기 때문에 최저임금위원회는 전면적인 체제 개편이 불가피해졌다.
28년째 이어져온 최저임금위원회가 올해처럼 무용론에 시달린 적이 없었다. 거듭난다는 의미에서 2016년 최저임금위원회는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위원회 전면 혁신을 앞장서 주장해온 필자도 잘될까 하는 우려가 마음 한 편에 없지 않지만, 그래 이제야말로 바꿔야지 하는 흔쾌한 마음이 압도적이다.
물론 노동자를 대표하는 교섭위원으로서 낮은 임금 인상율로 끝난 올해 최저임금위원회 교섭을 잘했다고 평가할 순 없다. 다만 기울어진 노사 역관계와 편향된 정부의 역할 등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에서 몸부림치듯 싸웠다. 작년과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의 구조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줄기차게 드러내면서 사회공론화한 건 중요한 성과로 강조해두고 싶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고 했다. 갓 지난 2016년 최저임금위원회를 추억으로 떠올리며 개인적 소회를 담아 평가해보려 한다. 좀 거칠지만 주제별로 떠오르는 대로 정리해보겠다.
참 중요한 사회적 임금 교섭 기구, 최저임금위원회
최저임금은 직간접 적용 당사자만도 500여만 명에 이르니 국민 임금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최저임금을 지급할 사용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600여만 자영업자들의 이해관계와도 직결돼있다. 단순 산술로도 1000여만 명이 넘는 경제 주체들의 민감한 공동 현안이 최저임금인 만큼 대한민국에서 이보다 더 막중한 책무를 지닌 정부위원회가 있을까 싶다.
작년부터 전 세계적으로도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대세가 되기도 한 만큼, 여러모로 최저임금위원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됐다. 그 무게에 걸맞은 제몫을 최저임금위원회가 하고 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사회적 화두가 된 최저임금 1만 원
최저임금 시급 1만 원/월급 209만 원. 작년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작심하고 제기해 전체 노동계의 핵심 요구로 자리잡았다. 때마침 인기 걸그룹 멤버가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알바몬 광고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을 필두로 선진국 그룹의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통한 내수 진작과 경제 활성화 정책이 대세가 되면서 최저임금 1만 원은 상징적인 사회적 요구로 주목받았다.
가슴 아프게도 최저임금 1만 원을 사회적 의제로 과감하게 제기한 당사자인 한상균 위원장은 지금 부당하기 짝이 없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있다. 마치 정당한 최저임금 1만 원 요구가 친재벌 정부와 강력한 사용자단체들의 반대에 가로막혀 있는 형국과 참 닮아있다.
최저임금 1만 원은 가구생계비에 초점을 맞춰 제기된 요구다. 현재 우리나라 최저임금 적용 당사자들의 절반 가까이가 가구주들이다. 자신의 생계뿐 아니라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이란 얘기다. 특히 중고령 노동자들이 저임금 노동계층으로 대거 인입되면서 더욱 최저임금이 가구 생계비가 되는 노동자 비중이 급증했다.
이런 변화된 조건을 감안해 최저임금 산정 기준을 무엇보다 생계비에 근거해 결정해야 한다는 게 노동자위원들의 줄기찬 요구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갈수록 극심한 소득 양극화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선 임금=생계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최저임금위원회 내에선 쇠귀에 경 읽기였다. 다만 최저임금 1만 원 요구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최저임금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우선 27명이 성원인 회의라 회의 진행이 잘되지 않으면 대단히 소모적일 수밖에 없는데, 기계적 중립 속에 민감한 쟁점 회피를 목적으로 한 위원장의 소극적인 회의 진행으로 열 받고 피곤했다. 관행과 전례로 굳어진 영혼 없는 운영 방식에 질식할 듯 했다.
마지막에 공익위원들 스스로 가장 중요하다고 얘기한 생계비와 노동생산성을 산정 기준에서 빼고 낸 심의 구간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 최저임금의 사회적 의미를 잃어버린 숫자놀음 앞에서 진정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최저임금위원회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공개도 하지 않는 닫힌 구조에서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임금 교섭을 어떻게 할 수 있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앉아 시간만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몇몇 사용자위원들을 보노라면 속에 불이 일었다.
10년째 줄기차게 자동 반복 기계처럼 동결안(한번은 삭감안)을 당연한 듯 제출하는 사용자위원들의 심각한 행태를 보면서 이건 교섭이 아닌데 하는 회의가 밀려왔지만, 비정규직을 대표해 들어간 최저임금위원회인 만큼 제몫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열네 번이나 열린 전원회의를 마칠 때마다 '최저임금위원회 이대론 안 된다'는 판단이 확신으로 굳어져갔다.
꼭 필요한 제도 개선 과제들 : 투명한 정보 공개로 국민의 알 권리 보장
가장 먼저 회의 내용이 전면적이고 구체적으로 공개돼야 한다. 노사 합쳐 12명에 불과한 배석자 수를 더 늘리고 기자 취재를 보장해야 한다. TV공개 토론이나 생중계도 해야 마땅하다. 회의 결과도 속기록 수준으로 공유돼야 한다. 마지막 결정 과정은 비공개가 불가피하더라도, 전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돼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해야 한다.
고용노동부 소속이라고? 낮은 위상 올리기
최저임금위 위상을 격상해야 한다. 현재 최저임금위원회는 법적 지위가 고용노동부 소속 기구로 돼있다. 그러다 보니 실제 경제부처들이 우습게 안다. 올해 기재부와 산업자원통상부 특별위원은 아예 코빼기도 안 비쳤다. 필참은 아니어도 위원회가 요청하면 마땅히 나와서 정부 입장을 알리기도 해명도 해야 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는다. 이래서야 국민임금인 최저임금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복잡하지 않다. 국무총리실이나 대통령 직속 기구로 격상하면 된다. 국회 산하로 이관하는 것보다는 당사자 중심 위원회 형식을 유지하면서 정부 내 위상을 올리는 것이 더 바람직한 개선 방도다.
공익위원 추천권 시정
공익위원 추천권을 바꾸고 나눠야 한다. 전원을 고용노동부 장관이 일괄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가 가장 큰 문제다. 현재 공익위원은 경영학과 교수 4명,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4명, 당연직 공무원 1명으로 이뤄져 있어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위원회인데 노동법이나 노사관계 관련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니 기막힐 일이다. 노사 당사자와 국회가 추천권을 적정하게 행사해 사회적 합의 수준의 논의 구조를 갖춰야 한다.
'을들의 연대'가 관건
마지막으로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최저임금을 주는 대표적 사용자인 영세 자영업자가 비슷한 처지의 사회적 약자라는 것이다. 왜 약자끼리 맞서야 하나 의아할 때가 많았다. 우리나라의 재벌 중심 양극화 경제구조에서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자영업자가 아니라 바로 과실을 독식해온 대기업 집단이다. 원하청 불공정 거래 구조와 골목상권 침해, 나쁜 일자리 양산으로 최저임금의 합리적인 인상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한 슈퍼갑 재벌 집단이 문제다.
그런 점에서 공동 피해자인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는 손맞잡아야 할 연대 대상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아지면 무리한 창업을 하지 않아 과밀경쟁으로 폐업하기 일쑤인 자영업자들의 생존권 문제도 개선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늘어난 소득의 1차 수혜자도 자영업자가 되니 양수겸장이다. 다만 단기적으로 일부 한계 자영업자의 경우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
실제로 최저임금 수준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자영업자는 드물다. 오히려 지나친 과밀 경쟁으로 인한 어려움과 높은 임대료 등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결국 재벌 중심의 이윤 독식 구조 혁파와 원·하청 불공정 거래 시정, 임대료 인하와 카드 수수료 인하, 프랜차이즈 가맹수수료 현실화 등 경제 민주화 요구와 연동한 패키지로 해결해야 최저임금 인상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지뢰들을 제거할 수 있다.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가 함께 손 맞잡고 '을들의 연대'를 실현할 때 비로소 경제 선순환 효과를 극대화하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 실현될 수 있다. 머잖아 최저임금위원회를 둘러싼 이해 당사자 간의 연대가 한국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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