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회계와 천문학적 규모의 각종 비리로 대우조선이 망연자실 백척간두에 서 있다.
한때 세계제일의 산업으로 대한민국의 자부심이었던 조선산업. 그중에서도 LNG 분야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전 세계를 누볐던 대우조선. 이제는 빚더미 부실기업으로 전락해 국민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골칫덩어리 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작금의 대우조선 사태에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모으는 곳이 있다. 바로 주인인 산업은행이다. 몰랐을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정말 몰랐을까. 과연 진실은 파헤쳐질 수 있을 것인가.
상장회사에다 대주주가 사실상 정부인 대우조선의 경영부실 규모가 7조 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과연 누가 납득할 수 있는가.
회계법인, 대주주인 산업은행, 감독기관인 금융위원회, 정부, 이사회의 사외이사, 감사, 노조 등 주위에 견제 세력이 수두룩한데 이 중 정말 아무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들은 진정한 견제조직인가. 부실 협조 조직인가.
대우조선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대안을 찾아보는 특집 대담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담에는 과거 대우그룹에서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대행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대표가 바쁜 시간을 내줬다. 진행은 임창섭 영남취재본부장이 맡았다. <편집자 주>
○ 김우일 대우M&A대표 약력
프레시안 : 애초 대우조선을 어떻게 김우중 회장이 맡게 됐는지부터 살펴봤으면 합니다.
김우일 : 박 대통령은 수출로 국가경제력을 부흥시키고자 했으나 경공업만으로는 양적 확대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규모가 큰 중장비 산업으로 수출중심을 옮기기로 한 거죠.
100 달러짜리 와이셔츠보다는 1억 달러짜리 중장비선박이 더 극적 수출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국영기업인 대한조선공사를 남궁련 씨가 맡아 거제도 옥포에 최대 규모로 조선소를 건설했지만 무리한 추진에 따른 자금부족으로 끝내 산업은행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당시 대한조선공사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은 재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대우그룹이 가장 최적이었습니다. 수출전사 김우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조선 물량을 해외에서 따와야 하는 마당에 해외수출 영업력이 뛰어난 김우중이 적격이라는 박 대통령의 판단과, 경공업 주도로 기반을 굳힌 대우그룹을 더 확장하기 위해 선박 플랜트 위주의 수출로 변화를 꾀해야 하는 김우중과의 양자 필요성이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일설에는 김우중에게 총칼이 아닌 철구조물로 유럽을 지배하는 '김기스칸'이 되라는 박 대통령의 당부가 있었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프레시안 : 김우중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 간에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요?
김우일 : 특별한 인연은 없고 김우중의 선친이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고 스승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한 인연보다는 단순히 ‘수출규모 확대와 기업 늘리기’라는 양측 궁합이 맞이 떨어졌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대우그룹은 정권과 불가분의 관계로 많은 혜택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김우일 : 대기업이 정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재벌이라면 모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벌의 큰 힘과 스피드, 파급력이 필요할 것이고...당시 중소기업은 자생력과 전략, 자본이 부족했기에 박 대통령이 재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고...그러나 대우그룹이 정권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우그룹의 창업 기반은 경공업이었고 다들 성공신화를 만들어 냈지만, 건설과 조선 중공업 자동차 등 대부분의 중후장대 기업들은 전부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인사로 실패한, 거의 정부 강요에 의해 떠맡다시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의 깡통이 된 거대한 부채 덩어리를 안기고 거의 부도난 기업을 기존의 금융승계라는 당근을 먹여 넘긴 것이 나중 대우그룹 전체를 힘들게 한 부메랑이 되는 사태를 불렀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갑자기 들이닥친 연 30%의 고금리 금융시장은 그룹에 엄청난 압박이 됐습니다.
떠넘기 듯 받은 이 골치 아픈 기업을 정상화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노심초사였습니다.
김우중이 거느린 기업 대부분이 이같이 정부로부터 떠맡겨진 부실기업들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프레시안 : 김우중 회장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진 기업이 조선 산업인 것으로 아는데...
김우일 : 맞습니다. 바로 조선산업입니다. 대우그룹의 태생은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 봉제공장에서 비롯됐습니다. 김우중은 경남인 거제도에 조선소를 키워 영남의 최고 강자를 꿈꿨습니다.
대구에서 신문팔이를 하며 학창 생활을 보낸 것도 또다른 원인이 됐다고 합니다.
조선산업은 글로벌시대에 세계경영에 딱 맞는 업종이었습니다.
세계경영이 바로 대우그룹의 모토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전후방 종합산업의 요체이며 선주가 대부분 유럽으로의 수출이기에 외화획득과 국가선양에는 조선산업만 한 게 없었습니다. 해외국가원수들이 오면 통상 거제도 조선소를 방문해 웅장한 우리나라 산업의 위용을 뽐내는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프레시안 : 대우조선이 여러 번 위기를 맞은 것으로 아는데...몇 번이나 위기를 겪었고 또 어떻게 극복했는지...
김우일 : 그렇습니다. 부실기업을 인수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는 데 고통이 없을 수 없지요.
첫 번째 위기는 1987년 조선경기 불황 때입니다.
급격한 선박건조대금의 감축은 캐시 플로어에 바로 빨간불을 켰습니다. 거의 부도상태였고 붕괴될 경우 하청업체만 3000여 개가 줄지어 도산할 지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김우중과 노태우의 합작품이 탄생합니다. 정부는 2500억 원의 금융지원을 하는 대신 상장이라는 산업합리화 조치를 하지 않고 대우 측에 고도의 자구노력을 요구했습니다.
대우증권, 대우종금사, 대우센터 사옥, 수영만매립지매각, 계열사 매각, 김우중 회장 개인 주식매각이라는 거의 대우그룹의 알짜를 다 팔라는 강제지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 내다 팔면 대우그룹은 본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기에 대우증권과 대우센터 사옥만은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이 두 개만은 살려냈고 나머지를 다 팔아 대우조선의 유상증자에 투입했습니다. 3000억 원에 가까운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김우중이 얼마나 대우조선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측근들은 차라리 대우조선을 포기하고 나머지를 안고가자고 반대하기도 했지만 김우중은 불도저 식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어렵게 받은 조선산업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던 겁니다.
두 번째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찾아왔습니다.
연 30%의 고금리정책이 시행되자 장치설비산업으로 많은 부채를 안고 있던 대우조선으로서는 쥐약이었습니다.
당시 DJ정부는 일률적으로 부채비율 200% 이하를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대우조선을 죄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산업은 특수한 장기적합산업으로 부채비율이 600% 이상 초과하지 않을 수 없는 원초적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거대한 조선소를 짓기 위해서 자기자본뿐 만 아니라 차입금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인데, 당시 저는 정부에 수차례에 걸쳐 업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 잣대(부채비율 200%)는 모순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중후장대 산업 특히 조선업은 부채비율 500%로 가이드라인을 잡아야 한다고 읍소했지만 DJ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업은 장기공사와 대규모 고정자산으로 자본금'1'에 부채'5'의 레버리지로 감당하는 것이 경영의 상식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더구나 조선수출금융은 상대적으로 저리라 금융을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DJ정부는 대우그룹을 타깃으로 삼아 밀어붙였고 결국 그룹이 붕괴되면서 대우조선도 무너지는 상황이 돼 버린 거죠.
항간에는 "DJ가 대통령이 되면 첫 번째 희생양이 대우그룹이 될 것이다"라는 루머가 횡행했습니다. 당시 대선에 패배한 이회창 후보와 고교동창인 김우중의 위치는 그야말로 태풍 앞에 촛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금융수장인 금융위원장에 대우통신 상무 출신인 이헌재 씨가 임명된 것은 대우그룹의 앞날을 더욱 암울하게 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는 반도체 프로젝트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절대 대우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그러면 당시 김우중과 김대중과의 사이는 어땠나요? 대우가 정권에 의해서 무너졌다는 얘기가 파다했는데...
김우일 : 좋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정희 때 대우그룹이 태동해 군부정권인 전두환, 노태우와 밀월관계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김영삼 때도 재벌그룹들은 공공연히 김영삼을 백업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실 이회창과 김대중의 대권 경쟁도 아무도 이회창이 패할 것을 예상 못 했기에 재벌그룹들도 물심양면으로 이회창을 지지했음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대우그룹의 경우는 더 합니다.
경기고 인맥이 대부분인 관계로 자연히 이회창 쪽으로 기운 것이 김대중에 밉보였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나 외부적으로 김대중 정권 때 전경련 회장에 취임한 김우중의 셈법은 달랐습니다.
외화부족으로 국가부도를 당한 정부는 무조건 부채비율 200%만 주장하고 사업 감축만을 요구했고 기업들은 무조건 이 비율을 맞추기 위해 멀쩡한 생산 공장도 팔아 치워야했습니다.
김우중은 외환위기를 외화부족 사태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수출을 늘려 달러를 벌어들여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수출을 늘리려면 오히려 부채비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해 조선산업에는 500% 이상 부채비율을 용인해달라는 주장을 폈던 것입니다.
몇 척만 수출해도 몇억 달러씩 벌어들이는 게 예사였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누구의 주장이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우일 : 저는 김우중의 의견이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인 감축 요구는 수출을 줄어들게 해 기업의 성장 동력을 잠재우고 이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현재의 극심한 경제 저성장과 소비침체, 일자리부족, 소득 양극화 현상은 바로 그 당시 시행했던 무조건적인 기업 감축의 부작용이라고 봅니다.
만일 정부가 당시 융통성 있는 정책을 펼쳤더라면 오늘의 경제 상황은 다른 경지에 다다랐을 수도 있었다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대우조선도 지금과 같은 상태까지 몰리지 않았을 거고요.
프레시안 : 김우중은 대우조선을 어떻게 관리했습니까?
김우일 : 한마디로 크레이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1988년 조선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2년간 옥포현장에 상주하며 원가절감에 매달렸습니다.
마른 수건도 다시 짠다는 생각으로 모든 생산 공정과 시스템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혁신하는 데 심혈을 바쳤습니다.
그룹 기획조정실 400여 명 대부분이 대우조선 정상화에 모든 시간을 할애했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공장 내 목욕탕 비누까지 싼 것으로 바꾸는 노력이 이뤄졌습니다. 경비 30% 절감이 목표였기 때문에 대우조선 임직원들의 심리는 비장함마저 엿볼 수 있었습니다.
김우중이 당시 잘 나가는 대우증권주식 1000억 원 상당을 매각해 적자인 대우조선에 투입한 것만 봐도 그의 대우조선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김우중의 임직원들에 대한 급여는 인색했습니다.
경쟁그룹과 대비가 안 될 정도로 짰습니다.
1998년 정부의 강요에 의해 부도난 쌍용자동차를 인수했는데 당시 임원인 제 연봉이 6000만 원 정도였고 부도난 쌍용자동차 임원 연봉은 1억 원을 초과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또 그룹 내 감사를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감사결과 경영비리나 모럴해저드가 적발되는 경우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내부감사가 기업생존의 열쇠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프레시안 : 그룹붕괴 당시 대우조선은 왜 정부로 경영권이 넘어갔나요?
김우일 : 당시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썼지만 싸게 그저 먹으려는 외국펀드, 대우그룹의 붕괴를 바라는 경쟁그룹 등 때문에 자구노력은 0’%도 먹히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정부마저 그 실적을 매주 점검했지만 거의 수수 방관적인 태도였습니다.
자신들이 알아서 만들어내면 사는 거고 못하면 저절로 죽는 것 인양 남의 집 불구경하는 태도였으니 어찌 보면 망하길 기대하는 눈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청와대와 재정기획원에 자금 유동성 완급을 부탁했지만 "정부도 더는 할 일이 없다. 오로지 자유시장경제에 맡길 뿐"이라는 기막힌 응답만 메아리처럼 되돌아 올 뿐이었습니다.
당시 국민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대기업이 혼수상태에 빠져 허덕일 때 정부가 취할 태도는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자구노력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싱가폴펀드에 (2억4000만 달러) 매각한 힐튼호텔 하나였습니다.
자구노력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돌아오는 자금압박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구조조정책임자였던 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관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창업자로서 전문경영인이 충분히 만족할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대우그룹내 주식보유규모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만큼 미미했습니다. 상당부분 대우조선 경영정상화를 위해 내다 팔았기 때문입니다.
미심쩍은 정부 손보다는 투명한 법원의 관리하에 두는 것이 더 안정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희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당리당략에 익숙한 정치인들에게 경영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법정관리는 모든 부채가 동결되고 연고인인 김우중이 계속 경영을 맡을 수 있기 때문에 비밀리에 최고의 법무법인과 법정관리 절차를 논의하던 중 갑자기 정부 관계자로 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만일 법정관리를 추진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바로 다음날 정부의 일방적인 워크아웃이 발표됐습니다. 한순간에 대우그룹의 경영권은 정부 손에 넘어갔고 정권실세에 의해 각 그룹사의 대표이사들이 일방적으로 결정됐습니다.
이때 특정지역의 출신들이 정치권의 비호아래 대표이사로 부임했고 그룹 내 가장 알차다는 하이마트도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하이마트는 차명으로 제가 관리하던 이른바 그룹내 위장 계열사였지만 정권 실세의 요구로 주식과 경영권 모두를 피눈물을 흘리며 넘겨줘야만 했습니다.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경영권을 빼앗긴 김우중은 마지막 메시지로 자동차와 조선만은 전문경영인으로서 끝까지 정상화를 이뤄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전달했지만 정부는 단호했습니다.
김우중은 이때 떠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그가 그렇게 도피하는 모양새로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김우중 회장이 해외로 떠난 이후 대우조선은 어떤 수순으로 산업은행에 인계됐습니까?
김우일 : 부실을 감자로 정리한 후 산업은행이 출자전환을 통해 32%의 대주주가 됐고, 이때부터 경영진 전부가 산업은행, 즉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가 명실공히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편입됐습니다.
프레시안 : 김우중 회장이 계속 대우조선의 경영을 맡았다면 어땠을까요?
김우일 : 비록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편입됐지만 경영은 전문가가 했어야 했습니다.
김우중은 순수한 전문경영인으로 그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대우조선을 정말 사심 없이 경영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온갖 비리로 얼룩진 현재의 대우조선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게 하지 않았을까요.
※ 본지는 김우일 회장과 지난 2001년 이후 정부로 넘어간 대우조선의 경영 상태와 주인 없는 대우조선의 M&A, 나아가 대우조선의 미래에 대해 대담을 갖고 이를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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