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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옥에서 사소한 것을 지킨다

[여기, 유성 잇다 ⑤] 상상도 못할 촘촘해진 폭력

3월 17일, 한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료는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5년이 넘도록 현대차와 유성기업은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온갖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파괴된 것은 노동조합만이 아니다. 일상, 평화, 우정, 희망, 관계…. 노동조합은 이런 말들의 다른 이름이었다. 깨져본 사람은 안다. 이런 말들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말로 만난다. 인간의 존엄.

한광호 열사를 이대로 보낼 수 없는 유성 노동자들을 또 다른 사람들이 만난다. 직업병 피해자, 장애인, 성소수자, 철거민, 밀양 할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누구보다 속 깊은 친구들이 되어줄 사람들의 만남을 전한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에요."

2011년 직장 폐쇄 사태 이후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기계가 잘못된 것 같다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면, 일이나 하라고 말이 많다는 식으로 나와요. 한 번은 '이거 잘못된 거 아니냐'고 했더니, '나 너하고 대화하기 싫어' 이러면서 사무실로 올라가더라고요. '얘기 좀 합시다' 하고 팔을 잡았더니 그걸 확 뿌리치면서 '더럽게 어딜 잡아 씨…'. 전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죠."

▲ 직장 폐쇄 당시 일요일이라 춘재 씨를 만나러 온 아이들을 보수 언론은 방패막이 삼는다고 거짓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듬직한 아이들과 사려깊은 아내와 함께, 춘재 씨는 오늘도 포기하지 않는다. ⓒ조춘재

상상조차 못했던

전에는 달랐다. 노동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관리자는 '아 그러냐, 같이 한 번 보자'고 했다. 작업하다 보면 기름이 묻어 작업복이 더러울 수도 있지만, 그걸 더럽다고 표현하는 것은 충격이었다. 유성지회 조합원 조춘재 씨는 말문이 막히더라고 했다.

춘재 씨는 스물일곱 살에 유성기업에서 일을 시작했다. 첫 직장은 아니었다. 유성기업에 들어올 때는 노동조합이 강성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나쁘게 생각하진 않았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단체니까 당연히 필요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 다니던 공장에도 노조는 있었는데 한국노총 산하였어요. 회사에서 임금을 일방적으로 삭감한다고 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물어보니까 이렇게 싸울 수 있다고 막 얘기해줘요. '그럼 저희 싸울까요?' 그러면 이렇게 어려운 점이 있고 저렇게 힘든 점이 있고…. 싸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러면 못 싸우는 거죠."

그렇다고 처음부터 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노동조합이 있어서 뭐가 좋은지 콕 집어 얘기할 것도 없었다. 사소한 것들이었다.

"다른 회사도 다녀봤으니까. 관리자들의 말투, 태도가 벌써 틀려요."

그런데 현장에서 형님들은 술 한 잔을 마셔도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의 자존심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사소한 것들과 함께 노동조합은 자연스럽게 춘재 씨의 삶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뭐가 다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근골격계 질환 사업 같은 것도 노동조합이 있어서 달랐던 거죠. 다른 회사 같으면 몸이 아플 때 노동자의 잘못이라고 하잖아요. 아프다고 해봐야 일하기 싫어서 그렇다는 말이 팽배하고. 골병드는 게 노동자의 잘못이 아니라 일을 시키는 회사의 잘못이라는 걸 알 수 있게 된 건 유성 노조가 건강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구제도 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그런 조직이었다. 골병이 들었을 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만 일할 게 아니라 '밤에는 잠 좀 자자'고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2009년에 합의한 주간 연속 2교대제의 시행을 앞두고 회사는 합의를 번복했다. 완성차에서 시행하기 전 부품사에서 먼저 시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용역 깡패를 동원한 공격적 직장 폐쇄를 단행했고 어용 노조를 설립했다.

촘촘해진 폭력

2011년 이후 현장 관리자들의 태도와 말투가 180도 달라졌다. 나이 어린 관리자들이 나이 든 노동자들을 모욕했다.

"그동안 좋은 세월 보냈으니 이젠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조퇴를 안 시켜줘서 항의하면 '너네 파업으로 나가'라며 빈정거렸다.

사소한 말들이 존엄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무너진 이유는 그것이 말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나를 모욕하는 상대와 다퉈서 풀 수 있는 문제라면 무너지지도 않았다. 말 뒤에 숨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이 있었다. 유성기업이 노조 파괴 전문가를 영입한 이후 폭력은 더욱 촘촘해졌다.

"저쪽에서는 조를 나눠서 누군 욕을 하고 누군 채증을 하고 누군 고소를 하고 완전 체계적이에요. 관리자들이 자료만 모아주면 변호사들로 구성된 전담 팀이 무조건 고소장을 써줘요. 쟁의 기간에 팻말을 걸면 시설권을 침해했다며 고소 고발, 팻말에 경영진 이름을 쓰면 모욕죄라고 고소 고발, 임금을 수시로 삭감하니까 절박해서 따질 수밖에 없는데 무슨 근거로 깠는지 물어보면 업무 방해죄, 여럿이 가서 물어보면 감금 폭행죄.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이 그걸 다 받아서 무조건 기소를 해요. 증거는 없는데 검찰은 기소해서 벌금을 매기고. 무죄를 주장하려고 정식 재판을 청구하면 내 임금 깎이면서 출석해야 하고. 그래서 내가 법적으로 이기면 다음에 회사가 함부로 못해야 희망이라도 생기는데 회사는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더 세게 나오면서 져도 그냥 무조건 징계하고 고소 고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숨 막히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회사는 이제 폭행을 사주하지 않아도 됐다. 폭력의 본질이 제압이라면, 법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법은 언제나 가진 자들 편에 있었다. 권리를 주장하려 들수록 법 위반이 늘어났다. 법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누가 말했나. 법은 권리를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정작 눈을 돌려야 할 폭력에는 눈 감았다.

패어 있는 그날

춘재 씨는 2011년 용역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되었다. 1년이 넘게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수술한 곳은 아물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패어있다. 그날이 떠오를 때면 화가 치밀어 올라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가라앉고 침체된다. 용산 참사가, 세월호 참사가 그날에 붙들려있듯이 시간은 흐르지 못하고 자꾸 그날에 걸려 넘어진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허공에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어요. 당시 경비대장이었던 한 사람만 집행 유예를 받았고 회사 관계자들은 전혀 처벌받지 않았죠. 그 자료를 오히려 홍보에 이용해먹어요. 자기들은 잘못이 없고, 노동조합이 사과하라는 게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국정 조사 하면서 경영진들이 지시 내린 것도 밝혀졌고 현대차 문건도 나왔는데, 검찰은 자료가 있어도 인정하지 않아요. 제가 복귀할 때 대놓고 비아냥거리더라고요. 노동조합만 처벌받지 않았느냐, 회사는 잘못한 거 없다는 거예요."

잘못이 없단다. 현대차가 유성기업의 노무 관리를 점검하는 메일도 확인됐고, 유성기업이 노무 관리 상황을 현대차에 보고하는 문건도 나왔는데,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조직적인 폭력에 아무도 잘못이 없단다. 한광호 열사의 죽음으로도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다. 춘재 씨는 끝을 보자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여기서 더 밀릴 수 없다는 마음은 조합원들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한광호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이 살아내야 하는 시간을 깨우쳐 보여준다. 자존심을 내어놓고 죽은 듯이 사는 것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품으면 모욕을 견뎌야 한다. 장애인도 이동하고 싶다 말하면 '몸이 불편하면 집안에나 처박혀 있지', 세입자 대책을 요구하면 '그 나이 먹도록 뭐하느라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했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면 '자식 팔아서 보상 더 받으려고….'

우리는 알고 있다. 무너지지 않았던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녀들이 모진 시간을 살아내는 만큼, 지하철역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개발 사업 제도가 조금이나마 개선되었고, 모두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조금씩 시간이 열리기도 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녀들이 저 홀로 꿋꿋해서가 아니라 서로 기댈 곳이 있어서 살아낼 수 있었음을.

기댈 곳 하나

▲ 2011년 당시 용역 폭력으로 두개골이 함몰됐던 조춘재 조합원은 1년 넘는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조춘재
노동조합도 기댈 곳 하나였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관리자가 멸시하고 회사가 쥐어짜고 세상이 무시할 때 자존심을 지켜준 곳이었다. 철거민이 조직을 만들면 테러 집단이라 비난당하고 유가족이 조직을 만들면 대놓고 해체하라는 주장도 나올 때, 노동조합은 그렇게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자리를 겨우 얻어왔다.

다른 기댈 곳들처럼, 노동조합은 지상에 없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던져진 현실이다. 노동조합을 지키는 건 대단한 대의를 지키는 것도 엄청난 이해관계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 발 디딜 자리 하나 지키자는 것이다. 노동조합 가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이 시간을 살아내기로 결심할 때 기댈 곳도 거기뿐이지 않은가.

"노동조합 파괴에 맞서 최전선에서 잘 싸우는 노동조합이라는 말도 들어요. 밖에서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창피할 때도 있고. 그냥, 안 싸울 수 없는 거예요. 우리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거,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만 다질 뿐이에요."

임금 더 받자 생각하면 유성기업이 만든 어용 노조에 가입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회사는 버티는 노동자들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잔업 특근에서 배제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면서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춘재 씨는 '자존심'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사소할지 몰라도 하찮지 않다. 한광호 열사가 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었을 게다.

작고 작아서 눈에 띄지 않지만 품어본 사람은 안다. 꿀리지 않기로 마음 먹어본 사람은 안다. 더불어 기댈 곳을 찾아본 사람은 안다. 춘재 씨의 자존심은 그의 것만이 아니고, 노동조합은 유성 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함께 지켜야 지킬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해주면 좋겠다는 것보다, 그냥 힘을 많이 받아요. 공장 안에서만 있으면 고립감을 느껴요. 양재동 올라오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찾아와주는 분들 보면 각오도 다지게 되고 힘이 생겨요. 고마워하고 있어요."

무너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에게 기댈 곳 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광호를 기억하고 유성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별똥별이 되고, 노동조합의 소중함을 알아차려주고, 유성기업과 현대자동차에 함께 호령하고,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 농성장을 찾아가고…. 우린 듣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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