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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직함이 일곱개? 진짜 중요한 것은…"

[정세현의 정세토크] 핵 가진 북한, 외교 셈법 바꿀 것

지난 5월 9일 36년 만에 개최한 당 대회를 통해 노동당 위원장에 오른 김정은은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변경, 국무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를 두고 유일 영도 체계가 완성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이 지난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정됐고, 김정일 사망 다음 해인 2012년 노동당 제1비서로 선출되면서 이때부터 이미 유일 영도 체계를 열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유일 영도 체계를 운운하는 것은 북한의 정치 체제 운영 원리를 잘 모르는 분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세헌 전 통일부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무위원장으로 투표가 아닌 '추대'된 것만 보더라도 투표가 필요없는 유일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라면서 "북한은 이미 김일성 주석 집권 때부터 유일 영도 체계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번에 새로 이런 체계를 확립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전 장관은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중용됐다는 점과 리수용 국제담당 부위원장‧리용호 외무상이 국무위원회에 진입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황 총정치국장이 지난 당 대회에서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다음으로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 국무위원회에서도 가장 먼저 호명된 것을 두고, 정 전 장관은 김정일 식의 선군정치가 일정 부분 필요한 북한의 내부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리수용‧리용호 등 외교 담당 관료들이 국무위원회에 포함된 것에 대해서는 북한이 스스로 핵을 보유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외교를 펼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핵이 없을 때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쓰면서도 사실 미국이 마음을 돌려주길 바라는 외교를 했는데 이제 이런 외교를 하지 않아도 된다, 또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는 "물론 그렇다고 북한이 미국과의 수교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중에 미국과 수교를 하더라도, 소위 미국에 '올인'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보는 것 같다"면서 "이러한 판단 아래 리용호 외무상은 그대로 두고 이보다 높은 급을 교체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북한이 지난 5월 당 대회와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를 거치면서 정치 체제를 정상화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편으로는 당 대회를 통해 조선노동당 위원장에 오른 김정은이 이번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이른바 '유일 영도체계'를 강화했다는 평가도 나오는데요.

대외적으로 보면 당 외곽에 있었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국가기구로 변경했고, 리수용 당 중앙위원회 국제 담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이 국무위원회에 진입한 것도 북한이 외교 쪽에 힘을 실어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북한의 정치 체계 변동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당 대회와 최고인민회의 상관관계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이 국가를 운영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중요한 직위를 선출할 때 당에서 결정한 뒤에 나중에 이를 의회에서 선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니까 당 대회에서 결정을 하고 최고인민회의, 중국으로 따지면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같은 의회 기구에서 공식적으로 선출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번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무위원장이 된 것도 이러한 경우입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1중전회에서 당 총서기에 오른 뒤에 그다음 해인 2013년 3월 국가직인 주석 자리에 등극했습니다. 북한도 이와 같은 절차를 밟은 것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에 국무위원장에 오르면서 직함이 7개가 됐다면서 유일 영도 체계를 확립했다고 하는데 어차피 북한은 이미 김일성 주석 집권 때부터 유일 영도 체계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번에 새로 이러한 체계를 확립한 것은 아닙니다.

김정은은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정해졌고 김정일 사망 이후 다음 해인 2012년 4월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노동당 제1비서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김정은 체제가 출범된 것으로, 사실상 유일 영도 체계였습니다. 이때 유일 영도 체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고모부이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장성택을 저렇게 무자비하게 처리했겠습니까?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무위원장으로 투표가 아닌 '추대'된 것만 보더라도 투표가 필요 없는 '유일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이미 유일 영도 체제 뿌리를 가지고 있는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제1위원장이든 국무위원장이든 자리에 오르는 순간 당(黨)‧정(政)‧군(軍)의 최고 수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국무위원장에 추대되면서 유일 영도 체계가 확립된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북한의 정치 체제 운영 원리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국무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을 택한 것일까요? 국무위원장은 우리 식으로 하면 '프레지던트'(President)인데, 김정일이 썼던 국방위원장이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썼던 주석이라는 이름을 쓸 수가 없으니까 국무위원회를 만들고 국무위원장이 된 겁니다. 이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수위에 오른 것이죠. 그 전에 5월 당 대회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운영하는 조선노동당 최고 수위에 오른 것이고요.

그런데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만들어진 국무위원회와 김정일 때의 국방위원회를 보면, '국방'이라는 말이 붙어있었기 때문에 큰 저항감 없이 국방위원이 될 수 있었던 인민군의 노(老)간부들은 국무위원회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들어갔습니다. 그 민간인 중에 리수용 국제 담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이 포함됐다는 것이 주목됩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부분은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김정은도 어느 정도 안고 가겠다는 뜻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당(黨)이 가장 우선이고 그 다음이 당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정(政), 그리고 마지막이 군(軍)입니다. 이게 김정일이 주창한 선군정치 시절에는 군→당→정의 순서였죠. 이후 김정은 위원장이 들어서면서 선군 정치의 물을 빼고 원래 사회주의 국가처럼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왔습니다.

그런데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에서 첫 번째 언급된 인물이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었습니다. 지난 당 대회에서도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다음이 황병서 총정치국장이었습니다. 당에서도, 국가기구인 국무위원회에서도 황병서의 서열이 높다는 것은 선군 정치의 그림자가 아직은 일부 남아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선군정치를 벗어나려고 하지만 여전히 일정 부분 군을 중시하는 이유는 북한 내부의 특성에 기인합니다. 북한 내에서는 군이 아직까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와 산업을 끌고 나가는 데 있어서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실제 북한에서 군대라는 것은 단순한 무장력이 아닙니다. 조선인민군은 중요한 경제와 산업을 관철시키는 일종의 '노동부대'이기도 합니다. 북한에서 웬만한 힘든 노동들은 전부 군인이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북한 지도부는 군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할 현실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 지난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참석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AP=연합뉴스

북한이 당 대회에서 제시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끌고 나가려면 자원도 필요하지만 노동력을 확보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를 확보하는데 군대만큼 확실한 조직이 없습니다. 북한에는 '일당 노동자'라는 개념이 없지 않습니까? 전부 협동농장이나 기업소에 배속돼있습니다. 나머지는 군인인데, 인적 구성으로 보면 군대에 젊은 인력이 많습니다.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하는 117만 명의 인력이 군에 배속돼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최상의 노동 자원인 겁니다.

사실 조선인민군 중 절반은 국가 노동 일꾼인 셈입니다. 1990년대 초 총리급 회담할 때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나왔는데, 자기들은 부부장이 4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은 인민군 병사들이 갖가지 경제 현장에 동원하는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각을 책임지고 있는 박봉주 총리가 지난 당 대회 때 당 중앙 군사위원회에 포함된 것도 이와 유사한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총리가 굳이 군사위원회에 들어갈 이유는 없는데 포함된 것은 군사위원회에서 총정치국장과 총리가 긴밀하게 논의하라는, 즉 행정부와 군이 같이 협의하면서 사업을 진행하라는 의도로 보입니다. 나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인사입니다.

북한 지도부는 황병서를 수석 부위원장 격으로 앉혀 놓으면서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즉 선군정치적 요소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황병서를 중시한 것이 개인의 충성심 때문에만 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김정은 정권이 선군정치를 완전히 탈피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좀 성급한 감이 있습니다.

프레시안 : 분명 선군정치 요소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북한은 당 대회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선군정치를 벗어나서 국가를 당 중심으로 정상화 시키겠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체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정세현 : 36년 만에 당 대회를 열었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 합니다. 경제가 좋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당 대회를 열지 말라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을 따른다면 경제 상황이 좋아졌으니까 당 대회를 개최한 것일 수 있죠. 또 박봉주 내각 총리의 경제 발전 모델도 어느 정도 전망이 보였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북한 체제의 전망이 굉장히 밝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전략을 이야기했지만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지 못한 것은 북한 경제가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물론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가 지난 3월보다 더 단단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인해 유럽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 들어서면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을 펼쳤던 미국 정부로서는 대외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이 역시 대북 압박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유럽 쪽은 정리됐다는 판단 아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을 펴왔습니다. 물론 브렉시트 때문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돌아가지는 않겠지만,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 모두를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점은 분명 북한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국제 공조로 조성된 대북 압박 국면이 다소 완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중국의 외교 입지가 상대적으로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힘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예전보다 더 목소리가 커진다면 북한은 북중 관계를 잘 관리해서 그 틈새에서 제재를 사실상 마무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북한 외교, 사람만 바뀐 것이 아니다

프레시안 : 외교 문제를 주로 다룬 리수용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이 국무위원회에 포함된 것은 국제적인 대북제재 국면과 관련이 있을까요?

정세현 : 북한에는 내부에서 끌어다가 쓸 수 있는 이른바 '내부 예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외부에서 자원을 끌어와야 하는데, 자원을 끌어오는 역할을 맡기기 위해 리수용과 리용호를 국무위원회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외교를 통해 혈로(穴路)를 열어야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대북 제재 국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입니다.

▲ 북한이 최고인민회의 때 발표한 국무위원회 위원들, 윗줄 맨 오른쪽이 리수용 국제 담당 부위원장. 아랫줄 맨 오른쪽이 리용호 외무상 ⓒ노동신문

실제 북한은 당 대회 이후 50일 만에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당 대회 사업총화 보고 이후 구체적인 사항도 딱히 나온 것이 없습니다. 그나마 이야기하는 것이 에네르기(에너지) 타령인데, 이것도 전력 생산을 언제까지, 얼마나 늘릴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볼 때 북한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이게 순전히 대북 제재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북한이 자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들로부터 확실하게 답을 얻지 못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6월 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주석과 리수용 부위원장이 만난 이후에도 실무적으로 협의해보자는 것 외에 다른 확답은 받지 못하고 늦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북한은 리수용 부위원장의 방중 이후 중국의 지원이 결정되면 최고인민회의 때 경제 개발에 대한 목표를 내놓고 싶었을 텐데 중국이 기대했던 것만큼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아서 목표 수치를 발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북한은 현 상황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한미일 제재 강도 약화'라는 카드는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리수용이 직접 나서서 비동맹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십시일반으로 끌어들일 수 있고, 리용호는 외무상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러시아 등과 관계를 활성화시켜서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 할 겁니다.

프레시안 : 시간은 다소 걸릴 수 있지만 중국이 북한에 경제지원을 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정세현 : 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질수록 중국은 북한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이 높아집니다. 다만 중국 경제도 성장률이 점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은 러시아 쪽에서도 뭔가가 나오길 기대할 텐데 러시아는 사실 북한을 도와주는 국가가 아니라 남북관계가 잘 되면 거기서 소위 '개평'이나 뜯으려는 나라입니다.

프레시안 : 이전에 가졌던 북한 외교의 성격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을까요?

정세현 : 고 강석주 국제담당 비서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한창 북한 외교의 이른바 '투톱'으로 활약했을 때는 협상을 통해 미국의 대북 압박과 적대시 정책을 완화시키고 경제 지원도 받아보자는 식이었습니다. 강석주 비서는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 낸 인물이고 김계관은 9.19 공동성명이 체결될 당시 북한의 수석대표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합의에는 전부 경제 지원이 포함돼있었습니다.

이 합의들이 제대로 이어졌다면 모르겠지만 중간에 어긋난 상황에서 북한은 4번의 핵 실험을 감행했고 스스로 핵무기 소형화‧경량화에 성공했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6월 23일에는 중거리 탄도 미사일(IRBM)인 '화성-10' 발사에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미군기지가 있는 괌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 기술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이 정도까지 가다 보니 북한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의 자비를 바라는 식의 외교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핵이 없을 때 이른바 '벼랑 끝 전술'을 쓰면서도 사실 미국이 마음을 돌려주길 바라던 외교를 했는데, 이제 이런 외교를 하지 않아도 된다 또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최근 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커지는 것을 본 북한은, 조금 더 세게 나가면 나갈수록 중국과 러시아가 자신들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 '화성-10' 발사 장면 ⓒ노동신문

실제 동북아의 세력 판도는 미일 대 중러의 갈등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전에는 러시아가 북한 편을 들고 나갈 이유도, 관심도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 2270호를 채택했을 당시, 막판에 좀 더 검토해야 한다면서 시간을 끌었는데, 이는 미국과 유럽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과 함께 자국의 국익을 차단당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1900년대 초 영국과 일본 동맹에 막혀서 동진도 못하고 바다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100년이 지난 현재, 이번에는 미국과 일본 동맹이 러시아를 가로막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다 보면 러시아의 극동 개발도 어려워집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극동 개발에 관심이 많은 상황에서 러시아도 북한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됐고, 북한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이라면 대미 외교의 전문가들보다, 리용호 외무상에게 역할을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김계관 제1부상이 했던 역사적 역할은 끝났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북한이 미국과의 수교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중에 결과적으로 미국과 수교를 하더라도, 소위 미국에 '올인'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판단 아래 리용호 외무상은 그대로 두고 이보다 높은 급을 교체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북한, 남북대화 진정성 있나

프레시안 : 당 외곽기구였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국가 기구로 변경된 것을 두고 북한이 향후 남북대화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정세현 : 그런 포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조평통이 당의 외곽기구일 뿐이라고 낮춰봤지만 예전에 조평통 위원장은 당의 대남비서인 허담이 맡을 정도로 위상이 높았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조평통 서기국장이 급이 낮다고 하지만 사실 서기국장은 남북 총리급 회담에서 북한의 정부 대표로 나왔고 심지어 그 회담에서 대변인을 맡기도 했습니다. 서기국 사람들이 남북 장관급 회담에 참석하기도 했죠.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그랬는데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조평통 서기국장과 통일부 장관이 '격'(格)에 맞지 않는다면서 회담 대표 문제를 두고 북한과 설왕설래를 벌였습니다. 이러한 논쟁도 조평통을 당 외곽 기구에서 국가 기구로 만드는 데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남북 당국 간 회담에 대비해서 자격이나 격 문제를 없애려는 사전 포석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과거 조평통 위원장이 상당히 거물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김정은이 직접 조평통 위원장을 겸직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 조평통 위원장을 누가 맡느냐의 문제도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누가 위원장을 맡느냐가 북한의 남북 대화 진정성을 읽을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원동연 서기국장이 된다면 남북 장관급 회담을 여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김영철 대남 담당 부위원장이 맡는 것도 충돌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대남 협상 경험이 별로 없는 김영철이 조평통 위원장까지 겸직한다면 남북 대화가 잘 이뤄질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실제 최근 북한의 행태가 남북대화에 진정성이 있는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이번에 북한에서 8월 15일을 전후로 평양이나 개성에서 남북과 해외 정당, 단체, 주요 인사들이 참가하는 '민족대회합'을 개최하자고 제안했고 저도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김용순이나 김양건이 대남 정책을 담당했다면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실 이게 김일성 주석 때 방식인데, 편지 수신자를 보면 황교안 총리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장과 원내 4당 대표 다 들어가고, '적당한 수의 해외 대표'도 있습니다. 남북이 각각 200명 씩 잡고 해외 대표 100명 정도를 잡으면 500명 안팎의 인원이 대상인 셈인데, 이렇게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예전에 하던 거니까 별 생각 없이 가져다가 쓴 것 같은데, 마치 기출문제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뽑아서 낸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규모 군중 집회성의 통일 토론을 하자는 것은 결국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남북관계를 정상적으로 풀어나가려는 뜻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남북 대화를 일체 안하려고 하다 보니 북한은 이렇게라도 해서 자기들은 대화를 시도했다는 기록이라도 남겨놓자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8~9월까지는 북한과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북한이 굴복하고 나오길 바라는 것 같은데, 그때까지 북한이 굴복하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정세현 : 북한이 8~9월이 되면 핵을 포기하고 굴복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에 근거해서 남북대화나 교류는 일체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정한 건데, 북한이 굴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박근혜 정부가 기존에 가져왔던 대북정책의 정체성을 버리기는 어려울 겁니다. 정상회담은 말할 것도 없고 당국 간 대화 제안도 하지 않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못 먹어도 고' 정신으로 대북 제재와 압박을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유턴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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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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