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한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료들은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5년이 넘도록 현대차와 유성기업은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온갖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파괴된 것은 노동조합만이 아니다. 일상, 평화, 우정, 희망, 관계…. 노동조합은 이런 말들의 다른 이름이었다. 깨져본 사람은 안다. 이런 말들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말로 만난다. 인간의 존엄.
한광호 열사를 이대로 보낼 수 없는 유성노동자들을 또 다른 사람들이 만난다. 직업병 피해자, 장애인, 성 소수자, 철거민, 밀양 할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누구보다 속 깊은 친구들이 되어줄 사람들의 만남을 전한다.
막연한 걱정이 앞섰다. 낯선 이와의 대화, 밀양과 강정, 그리고 유성.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엮어낼 수 있을까. 인터뷰를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걱정은 커져 갔다. 다행히 같이 인터뷰하기로 한 인권운동사랑방 대용과 미리 만나 나눌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6월 어느 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기 직전,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유성기업 노동자 두 명을 만났다.
임영재, 박효종.
그들은 젊었고, 오랜 친구였으며, 우린 이야기하면서 많이 웃었다. 나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철푸덕 앉아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영재씨는 유성기업 생산부로 엔진 부품에 들어가는 실린더 라이너를 가공하는 일을 한다. 실습생으로 들어와 정규직이 되었고, 군대에 가기 전부터 노조원이 되었다. 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한지 벌써 16년차다. 효종씨는 유성기업에 들어오기 전에 조선소, 택배상하차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잔업과 야근을 밥 먹듯이 시키면서 수당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부당하지 않냐고 말해봤지만 저항할 힘도 없고 그냥 이대로 살겠다는 대답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유성기업은 노동조합이 튼튼해서 일하기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여 어렵사리 입사하게 되었다. 효종씨는 검사과에서 일한다.
노조원들과의 관계는 오히려 직장폐쇄 이후 더욱 돈독해졌다. 부서와 과가 다르면 서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직장폐쇄 이후 3개월을 하우스에서 지내면서 서로를 붙잡는 관계가 되었다. 영재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하거나 선복귀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많이 불안했지만 “좋아하는 형들이 저를 많이 붙잡아줬어요. 그 형들이 흔들렸으면 저도 아마 따라 들어갔을 것 같은데…. 어째든 불안했지만 버텼죠. 그 때 나이가 서른 하나였거든요. 그래도 다른 직장을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회사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라고 했다.
광호 형과 셋이 단짝
한광호 열사는 생산과였다. 처음에는 한광호 열사라 칭했지만, 어느새 둘은 자연스레 ‘광호형’이라 불렀다.
"광호 형하고 셋이서 카풀하고, 셋이서만 놀았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랑도 놀지만 광호 형은 우리랑만 놀고, 여행계 만들어서 여행도 다니고. 작년에는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광호 형이 우리 막내딸을 예뻐해서 제수씨랑 애들 다 데려가자고 해서 같이 갔어요. 그 형이 우리 둘을 엄청나게 챙겼거든요. 자기가 힘들어서 병가 내고 쉬면서도 우리 생각해서 뭐 먹으라고 보내주고…."
딸이 둘 있는 효종 씨는 광호 형이 자기 딸을 위해 특별히 캠핑 의자도 주문해줬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영정 속 얼굴과 그가 생전에 사측으로부터 어떤 괴롭힘과 고통을 당했는지를 먼저 접했던 나는 한광호 열사가 광호 형일 때의 모습을 이렇게 더듬어볼 수 있었다. 효종 씨가 문득 말했다.
"아 맞다, 광호 형 밀양 가서 경찰한테 맞았었잖아!"
밀양
연대하러 가야할 곳은 많았다. 밀양도 가야했다. 하지만 내부 투쟁 상황들과 일정들이 빡빡해 다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2012년 1차 밀양 희망버스가 제안되기 직전이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이 친구가 손을 딱 들더라고요. 우리가 갔다 오겠다고. 사실 전 갈 생각이 없었는데…."
영재 씨는 멋쩍게 웃었다.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 부지에 가서 자재를 쌓아두지 못하게 하기 위한 돌탑을 쌓고, 1박 2일을 보냈다. 그러고 내려오는데 뭔가 뿌듯한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왜 아쉬운 마음이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아산 굴다리에서 그 많은 동지들이 왔을 때, 금속노조만이 아니라 희망버스 하면서 시민단체들도 많이 오니까 정말 고마웠어요. 그러니까 또 연대하러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한테 오신 분들인데, 한두 명이라도 가야할 것 같고. 직장폐쇄 당하고 하우스에 있을 때, 커피가 부족하다니까 커피가 끊이지 않고 들어오고, 선풍기가 부족하다니까 선풍기가 물밀 듯이…."
연대는 품앗이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받았으니까 가야하는 의무감이 앞서 시작된 연대는 일정이 끝날 때쯤에는 아쉬움으로, 그래서 또 발길을 옮기게 하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밀양과 강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그래, 거기에 영재 씨와 효종 씨도 있었겠구나, 어찌 보면 살면서 만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없었을지도 모를 우리가 이렇게 만났었구나.
달라진 일상
업무에 복귀하고 나서 달라진 게 몇 있었다. 일단 술이 많이 늘었다. 술 마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재 씨도 효종 씨와 함께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는 어용노조 조합원에게만 잔업, 특근을 열어주면서 차별했다. '더 열 받는 건' 전업 특근이 잘린 민주노조 조합원 자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일해오던 고유의 자기 라인, 자리를 침범 당하는 일, 어용노조가 생긴 후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영재 씨는 꼭, 지켜져야 할 권리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이 한 문장에 모든 것이 다 내포된 것 같노라고.
"아픈데 병원도 못가고, 임금 삭감 당하고, CCTV에 감시당하고 이런 것들 절대 인간다운 삶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까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 가면 농성장을 둘러싼 경찰들과 '올바른 노사문화 확립'을 위한 캠페인을 하는 말쑥하게 정장을 빼 입은 분들을 볼 수 있다. 경찰과 용역. 재벌은 돈으로 용역을 고용하고, 용역들은 노동자를 폭행하고, 경찰은 용역들을 보호한다.
"돈이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용역들이 소화기 던져서 두개골 깨지고, 광대뼈 깨지고 그랬잖아요. 그럴 때 경찰은 없고 끝나면 나타나고. 이 날 연대오신 분들은 구속됐는데, 저 쪽은 책임자 처벌 단 한명도 안됐고. 벌금만 내고 끝나고. 조선시대로 따지면, 쟤들은 양반이고 우리는 천민이고."
기시감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밀양의 할매‧할배들이, 강정의 주민들이, 똑같이 했던 말이었다. 살던 데로 살게 해달라는 외침은 밀양이나 강정, 유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삶을 마구 헤집고, 대리인을 앞세워 추악한 속내를 가리운 채 점령군이 되어 짓밟은 자들은 누구인가. 누가, 그들에게 그럴 권한을 주었는가. 그런 적이 없다. 준 적 없는 권한을 마음대로 남용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 우리는 그것을 명명백백 밝히고, 가려진 것을 들춰내고, 다시 삶을 일구는 일을 양재동 앞에서, 강정마을 삼거리 식당에서, 밀양 송전탑 자리에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삶은 분명 전과는 다를 게다. 부서를 넘고, 공장을 넘어, 마을을 가르고, 바다를 지나면서 그 전에 있던 관계는 더욱 단단해졌으며, 새로 짓는 관계는 눈물을 딛고 더욱 굳세다. 그래, 이 또한 닮았다. 이렇게 다르지만, 또 닮기도 한 삶과 사람들을 찾아가며, 그렇게 우리는 또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이 글을 쓰고 앉아 있는 지금은 그 때 내가 참 속없는 질문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어떤 희망, 꿈을 가지고 있는지. 효종 씨는 영재 씨한테 "정년 될 때까지 다니고 싶다고 해" 하며 웃었다. 영재 씨는 한참을 고민하다 말문을 열었다.
"어, 그래. 직장폐쇄 그런 거 없이 정년까지…. 이 싸움이 해결되어야 그 때 희망이든 뭐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불안한 게 또 한 번 직장폐쇄를 맞으면 그 고통스런 순간들을 어떻게 견딜까 싶어요. 우리가 5년 동안 이런 탄압받고, 억압받고, 그걸 술로 풀고. 광호형 일 있은 후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는데도 겁나는 거 있죠. 해결이 되는 것도 중요한데, 더 이상 사람이 안 죽어나가게끔…."
사람들의 이름
말해 씨, 영자 씨, 종환 씨, 미량 씨, 미현 씨, 기룡 씨, 권일 씨…, 그리고 영재 씨, 효종 씨. 지금 생각나는 밀양과 강정, 그리고 유성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그저 누구, 누구 씨라고 한번 불러보았다. 사실 한 번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다. 잠시 잊었던 것이 있었다. 유성의 싸움, 한광호 열사의 죽음에 압도되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또 여전히 웃으며, 힘을 내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밀양, 강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마어마한 레미콘 차들이 밀고 들어오고, 헬리콥터가 날아다닐 때에도 우린 웃어야 할 때는 웃었다. 효종 씨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 물었을 때, "영재가 결혼 안하고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우리는 다같이 깔깔깔 웃었다.
그래, 우리 이렇게 웃으며, 잘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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