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뉴스에서 중국의 군사 대국화와 패권 국가화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특히 미국 등 서양에서는 중국의 행보에 예의주시하며 상당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 세계의 서양화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서양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에 있는 것들만 인정해왔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틀 밖의 나라가 발전한 것은 서양의 생각 범위를 뛰어넘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중국의 급부상은 아마도 서양에게 미지의 두려움으로 인식된 듯하다.
동서양은 각각 다른 발전 과정을 겪어왔으며, 이로서 서로 확연히 다른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동서양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서양이 외부로의 '확장'을 통해 발전을 추구했던 것에 비해 동양은 내부로의 '안정'을 통해 발전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잔존으로 '서양=우월', '동양=낙후'라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사고가 지나치게 팽배해져 우리조차도 우리 것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서양의 기준으로 그들이 정한 범주에 들어가지 않은 우리의 것들이 미개·낙후한 '폐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평화와 안정을 통한 발전을 추구했던 우리가 더 문명적이었다.
침략과 확장으로 얼룩진 서양의 발전
서양 확장의 대명사는 식민지이다. 서양 식민주의 역사는 유럽 문명의 원류라고 볼 수 있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부터 척박한 환경과 인구의 급증 등으로 신천지를 찾아서 떠났던 이들이 식민지를 건설하고, 현지인들을 노예로 부리던 것이 바로 서양 식민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이후 로마제국의 발전도 마찬가지이다. 확장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원동력으로 로마는 끊임없이 확장을 하다가, 확장 전쟁을 멈추자마자 급속하게 몰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
중세 서양은 종교의 속박으로 확장이 주춤하였지만, 종교로부터 풀려나자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봇물 터지듯 급속도로 확장을 개시하게 된다.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프랑스·영국 등은 가장 대표적인 나라들로 바다를 통해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만행으로 수많은 찬란했던 문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의 잉카·마야·아즈텍 문명을 멸망시키고 그 위에 식민지를 세웠다. 서양 식민지가 무서운 점은 원주민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신들의 복제판을 찍어내는 것에 있다. 그 결과 현재 남미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마저 상실하여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쓰고 있다.
특히 영국은 서양의 확장을 통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영국은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며 자신들의 위대함을 칭송하였고, 현재도 자칭 '신사의 나라'라고 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무수히 많은 곳들을 무단으로 침략하여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던 것, 이것이 바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진실이다. 바다의 강도인 해적을 통한 해상권 장악, 설탕을 제련하기 위해 흑인들을 사고팔았던 노예 무역, 돈을 위해서 마약을 팔았던 아편 전쟁 등등, 이것이 바로 '신사의 나라'의 민낯이다.
산업 혁명 이후 우수한 무기를 바탕으로 마치 '땅 따먹기' 하듯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던 서양은 결국 더 이상 뺏을 수 있는 땅들이 없게 되자 서로 상대방이 가진 것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
제1, 2차 세계 대전은 이렇게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 서양은 결국 자멸하게 되었으며, 대신 유럽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본토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던 서양의 '꼬맹이' 미국이 모든 것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안분수기(安分守己)의 동아시아 농경 사회
전통 시대의 동아시아에는 물론 몽골·만주족 등과 같은 유목 민족들도 존재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민족들은 쌀 또는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농경 사회를 이루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는 또 새로운 한 해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는 것, 이것이 바로 농경 사회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한 곳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정착'의 성격이 강한 농경의 생활양식을 채택하다보니 자연스레 서양과 같은 확장보다는 안정을 더욱 중시하였다. 역대를 통해 안정을 보완·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사상들도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중 전통 시대 동아시아의 국가통치이념으로 중요하게 활용되었던 것은 바로 공자의 유가 사상이다.
안정을 중시하는 생활양식에 부합하게 유가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질서를 매우 강조하였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라는 말은 바로 농경사회의 안분수기(安分守己), 즉 분수에 만족하며 본분을 지키라는 가르침이었다.
또한 지나치게 한 쪽으로 편중되지 말고 융통성 있게 살라는 의미에서 '중용(中庸)'의 가르침도 강조하였다. 유가 외에 다른 철학에서도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화를 부른다는 가르침도 존재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지족(知足)'이라는 말은 바로 스스로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를 밟아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자본주의의 살벌한 경쟁에서 노자의 지족의 가르침은 매우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각국들은 서로 느슨한 관계를 맺으며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일본 식민사관에 의해 조공과 책봉은 마치 우리가 강대국에게 아첨을 떨던 국민성으로 왜곡됐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과거 중국에 대한 조공과 책봉을 수치스러워하지만, 실은 이는 중국과 느슨한 관계를 맺기 위한 외교적·의례적 수단에 불과했다.
이는 전통시대 한중 관계가 가장 밀접했던 조선과 명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 초기 명과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 중 하나는 '1년3사(一年三使)'와 '3년1사(三年一使)'의 문제였다. 즉, 조선은 명에 보내는 사신을 1년에 최소 3번을 요청하였지만, 명은 오히려 재정 등의 이유로 3년에 1번만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정통성의 확립·선진문물의 유입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명에 자발적으로 사신을 보내길 원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은 명의 번속국(藩屬國)이었지, 결코 서양의 식민지와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즉, 조선은 명의 천하 질서에 속한 나라일 뿐이지 서양의 식민지와 같이 지배를 받는 지역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명 태조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에게 조서를 내려 '자위성교(自爲聲敎)', 즉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하여, 조선 내부의 일은 조선 스스로 처리했다. 물론 명에 보고는 했지만, 대부분 '선조치, 후보고'의 형식이었다.
전 세계의 서양화와 우리의 현실
서양 열강의 동양 침략 이후 동양의 많은 전통들이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서양의 것들이 대체하였다. 물론 서양의 것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양의 선진적인 것들은 지금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만, 지나치게 서양의 잣대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한 예로 선진국은 대체 무엇인가? 재정력, 군사력, 복지 이런 것들이 과연 선진국의 기준일까? 그럼 1인당 GDP가 2013년 기준 9만3714달러(한화 1억786만 원)이며, 세계 최고의 복지를 자랑하는 중동의 카타르는 과연 선진국일까?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양이 정한 기준, 즉 자신들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양이 표준이 되어 전 세계가 서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해적과 같은 추악한 것들이 현재에는 귀여운 캐릭터가 되어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과거의 역사에서 싸움을 잘 했던 왕조를 자랑스러워하고 그렇지 않았던 왕조들은 무시당한다. 이 역시 서양의 힘의 논리에 의해 발전해 왔던 역사관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전통을 서양의 잣대에 의해 저급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의 기상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명에 사대의 예를 다하며 찬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했던 조선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임상훈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역사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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