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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의 보통국가화, 아베 문제가 아니다"

[인터뷰] 남기정 서울대학교 교수 <2> '기지국가' 일본

한국전쟁 당시 '기지국가'로서의 면모를 다진 일본은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세계적인 경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보통국가'가 아닌, 기지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지국가 일본을 만들었던 냉전체제와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제가 동아시아 내에서는 아직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내에서 이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국교정상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남기정 교수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가 "동아시아에서 휴전협정 체제를 깨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때"였다고 평가했다.

남 교수는 이 시기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구상했던 동아시아 공동체와 한반도 안정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커다란 전략이 완성되던 때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은 남북한과 일본이다. 이들 간 관계 개선은 냉전 체제에 녹아있는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즉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를 일궈나가는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에 일정한 역할을 하라는 압력을 넣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1998년 파트너십 체결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끌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이 전후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평가하면서, 이 메시지를 일본을 움직이는 레버리지로 활용했다.

남 교수는 "일본이 앞으로도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서 평화국가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대북정책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하라는 의미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15년 여가 지난 현재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집권 이후 전범국가에서 보통국가로 탈바꿈하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한국을 비롯한 중국에 상당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한일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남 교수는 아베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이 아베 총리 개인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는 '기지국가'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의 불안정성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일본이 이러한 국가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아베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정부에서도 언제든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베의 안보정책 노선은 2000년대 이후 나왔던 군사적 '보통국가' 노선 위에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정권과 달리 그 변화의 폭과 깊이와 속도가 대담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남 교수는 아베 정권의 안보 정책을 아베(Abe)와 안보(Security)를 합한 '아베큐리티'로 규정하며, △군사적 보통국가의 확립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의 능동적 대응 △미일 동맹의 격상과 강화 등을 기본 요소로 하고 있다고 정의했다.

그는 "보통국가가 되려는 움직임은 기지국가로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질병인데, 이를 서서히 치유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국이 공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 교수는 "일본이 이렇게 나가려는 것을 일탈적인 현상으로 보면서 내치려고 할수록, 일본은 계속 정식 군대를 가지려 할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이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우리는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제에 남북한뿐만 아니라 일본도 편입돼 있다는 현재의 동북아 구조를 이해하고 일본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커다란 의미에서의 파트너십을 가져야 한다"며 "한미일 동맹에서 북한이나 중국과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의 일본과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조를 깨 나가는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염두에 두고 일본을 정부가 추진하는 조치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남 교수는 "일본이 기지국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휴전협정 체제를 깨려는 노력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변화는 휴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과 동시에 진행돼야 하는 것"이라며 "이를 일본에도 설득시켜야 한다. 일본 내에도 이를 원하는 세력이 있고 우리가 설득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베 총리 역시 설득하기 나름이지, 무조건 내칠 사람만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편집인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전편 보기 : 남기정 교수 인터뷰 ① "일본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당사국이었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6.25 이후 남북은 지금도 극단적인 대립을 하고 있고 일본도 기지국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 동아시아 냉전 체제를 깨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국교정상화를 시도하기도 했고, 5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당시 민주당 총리는 2009년 이른바 '동아시아 협력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남기정 : 지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햇수로 5년이었던 이 시기가 동아시아에서 휴전협정 체제를 깨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때였다.

1998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이 한일 간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작이었다.

여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가지고 있던 외교정책의 큰 구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는데, 김 대통령은 양자주의와 다자주의를 결합시키는 외교를 펼쳤다.

이 선언이 발표된 이후 김 대통령은 베트남으로 향하는데, 그해 제2차 '아세안(ASEAN)+3(한국, 중국, 일본)' 회의에서 '동아시아 경제협력 비전그룹'의 창설을 제안한다. 여기서부터 그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발원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시작됐다.

이 때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시기다. 김 대통령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동남아를 균형추로 삼아 한국이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고 본다.

다시 파트너십 선언으로 돌아가보면, 이 선언은 일본이 처음으로 한국을 특정해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것이 이 선언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동시에 김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주의 하에서 평화국가로 발전해오고,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평가했다. 이게 일본 지식인들에게 감동을 줬고 이들을 움직인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일본을 움직이는 레버리지로 작용했다. 일본이 앞으로도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에서 평화국가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대북정책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하라는 의미였다.

▲ 1998년 10월 8일 김대중(왼쪽)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래서 오부치 이후 총리 자리에 오른 모리 요시로(森喜朗)는 2000년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냈고, 북일 양측은 물밑에서 접촉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 납북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논의가 나온 것은 양측이 물밑에서 상당히 많이 움직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런데 모리 총리가 2000년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나라"라고 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후 고이즈미가 총리 자리에 올랐고 결국 북한 방문은 고이즈미 총리의 차지가 됐다. 모리 총리 시절 진전된 북일 관계의 성과를 고이즈미가 이어 받은 셈이다.

어쨌든 이 시기는 김대중 대통령이 구상했던 동아시아 공동체와 한반도 안정화를 동시에 실현하는 커다란 전략이 완성되던 때였다. 여기에서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은 남북한과 일본이다. 이들 간 관계 개선은 냉전 체제에 녹아있는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즉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를 일궈나가는 핵심적인 작업이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배경 삼각형으로 작용한다. 한국은 자국이 가지고 있는 이니셔티브를 이용해 이 배경 삼각형과 핵심 삼각형을 잇는 여러 가지 삼각형을 운영하는 외교를 가져갔어야 했다. 실제 김대중 정부는 이를 실행에 옮겼다.

프레시안 : 1998~2002년 사이에 한일 간, 남북 간, 일본과 북한 간에 이러한 해빙 움직임이 있었는데 결국 이 흐름이 이후에도 이어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2002년 켈리 특사의 평양 방문에서 불거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농축 문제가 발목을 잡은 걸까?

남기정 : 북핵 문제도 많이 얽혀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미일 동맹에서 일본이 이탈한다는 위기 의식이 일본 내에서 생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일본 내의 미일 동맹파와 그와 연계했던 미국 내 미일 동맹파가 이러한 흐름에 대해 반격을 가했다고 본다.

▲ <기지국가의 탄생 : 일본이 치른 한국전쟁>(남기정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우리가 이러한 움직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사려 깊게 조치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2003년 이후 한국에서는 독도 문제 등을 가지고 일본과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 2005년에는 외교 전쟁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다. 한일 월드컵 이후 좋았던 양국의 분위기를 우리가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이다.

여기에는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동아시아 공동체론에서 우리가 철수한 것도 한몫했다.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김대중 정부보다 시야가 좁았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큰 관점에서 외교를 했어야 했는데, 동아시아 공동체에서 후퇴하고, 동남아시아를 빼고 동북아시아라는 좁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예를 들자면 납치 문제로 일본이 뒷걸음치고 있을 때 일본도 설득하면서 조금 더 큰 관점에서 외교 행위를 했어야 했다. 북한 문제도 납북자 사안이 있기 때문에 일본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보다 큰 평화를 구상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일본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오히려 일본을 자극하는 외교를 한 것이 문제였다고 본다.

프레시안 :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내걸었던 '동아시아 협력론'은 어떻게 보나?

남기정 : 일본 내 미일 동맹파가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여기에는 하토야마의 미숙함과 성급함도 일조했다. 하토야마의 외교가 좀 아마추어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런 큰 구상을 가지고 실제 실행에 옮기려면 외무성을 설득했어야 했다. 그런데 일본도 외무성을 설득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너무 순진하게 접근한 것 아닌가 싶다.

하토야마의 구상이 발표됐을 때 일본 외무성은 발칵 뒤집혔다. 이후 완전히 하토야마에 등을 돌리게 됐다. 하토아먀는 오키나와현 미군기지의 현외 이전을 선언하면 끝인 줄 알았겠지만 정말 그런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싶었다면 아주 치밀하게 전개했어야 했다. 국내 정치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불행한 것은, 하토야마가 코너에 몰리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데 쓰인 재료가 바로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이었다는 점이다. 하토야마는 한반도에 이러한 위기가 있고, 이에 일본의 기지가 굉장히 필요하다고 변명했다. 결국 휴전협정 체제가 존재하는 한 기지국가 일본의 가치는 유효하다는 것을 시인한 꼴이 돼버렸다.

프레시안 : 실제 정책 실현에는 실패했지만, '동아시아 협력론'과 유사한 국제정치를 펼 수 있는 정치 세력이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있을까?

남기정 :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커다란 구조를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힘들다고 본다. 대전략을 가지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

아베가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탈냉전 이후 기지국가라는 일본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1991년 걸프전에 무려 130억 달러나 되는 전쟁비용을 대고도 일본은 국제평화 공헌이 미흡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일본은 1999년 주변사태에 군사 대응할 수 있는 유사법제를 마련해 군사력 해외 진출의 길을 텄다.

나아가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2014년 각의 결정이라는 편의적 해석 개헌을 통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지난해 안보법제 제·개정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확대를 법적으로 보장했다. 이어 올해는 평화헌법의 개헌까지 노리고 있는데, 향후 아베 총리의 이러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보나?

남기정 : 일단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베 정부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아베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기지국가'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국가로서의 불안정성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일본이 이러한 국가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아베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정부에서도 언제든 나올 수 있다.

▲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014년 5월 15일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헌법 해석 변경 의지를 밝히고 있다. 아베 정부는 결국 같은 해 7월 1일 내각에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위한 결정, 즉 '해석 개헌'을 단행했다. ⓒAP=연합뉴스

아베노믹스가 아베의 트레이드 마크이긴 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경제성장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독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아베의 안보정책도 이미 그 노선은 2000년대 이후 나왔던 군사적 '보통국가' 노선 위에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정권과 달리 그 변화의 폭과 깊이와 속도가 대담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포착하면 아베 내각에 들어서서 전개되는 안보 방위정책을 아베노믹스에 빗대어 '아베큐리티'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아베의 시큐리티(Security, 안보)라는 의미이다. 아베큐리티는 '개헌'을 최종 목표로 설정한 군사적 보통국가의 확립,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의 능동적 대응, '간단없는 동맹'으로서 미일 동맹의 격상과 강화를 세 가지 요소로 하고 있다. 이를 아베큐리티의 세 가지 화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베큐리티에서 주목할 점은 그 내용보다도 가파른 속도인데, 이것이 강권정치로 비치는 이유이다.

한편 보통국가가 되려는 움직임은 기지국가로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질병인데, 이를 서서히 치유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국이 공유해야 한다. 일본이 이렇게 나가려는 것을 일탈적인 현상으로 보면서 내치려고 할수록, 일본은 계속 정식 군대를 가지려 할 것이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곳에서 이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체제에 남북한뿐만 아니라 일본도 편입돼 있다는 현재의 동북아 구조를 이해하고 일본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커다란 의미에서의 파트너십을 가져야 한다. 남북한 일본 모두가 휴전협정 체제의 포로라는, 한미일 동맹에서 북한이나 중국과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의 일본과 파트너십을 맺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조를 깨 나가는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염두에 두고 일본을 정부가 추진하는 조치들을 바라봐야 한다. 이건 특히 한국의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세력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다.

일본이 기지국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휴전협정 체제를 깨려는 노력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지국가에서 정상국가로의 변화는 휴전협정 체제의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과 동시에 진행돼야 하는 것이다. 이를 일본에도 설득시켜야 한다. 일본 내에도 이를 원하는 세력이 있고 우리가 설득시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아베 총리 역시 설득하기 나름이지, 무조건 내칠 사람만은 아니다.

좀 더 이야기하자면, 일본의 보수화와 우경화도 분리해서 봐야 한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해서 일본의 안보정책을 가지고 가려는 움직임은 분명히 있고, 이것이 일본의 정치 보수화라는 이름으로 표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우경화와는 분명히 다른 의미다.

사사분면으로 표현하자면 호헌과 개헌이 나뉘고 미일 동맹 중시와 해소가 나뉜다. 여기서 호헌과 미일동맹 해소가 가장 사회민주적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가장 반대 쪽에 우익이 자리한다. 헌법을 바꿔서 무장을 하고 이를 통해 독자적으로 일본을 정상국가로 만들면서 미일 동맹에서 빠져나오자는 논리다.

▲ 호헌/개헌과 자주/동맹에 따라 구분된 사사분면 개념도

이렇게 양 극단 외에 제가 쓰는 표현으로는 국제정치적인 의미에서 제도적 자유주의자들과 정치적 현실주의가 있는데, 아베는 기껏 해봐야 정치적 현실주의자다. 이것도 가지 못해서 안달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치적 현실주의로 가려고 해도, 즉 개헌을 하려고 해도 일본 국민들의 동의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에, 우경화적인 논리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즉 기지국가인 일본의 현실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국가주의를 자극해서 개헌을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이는 정책적으로 보자면 그래봐야 정치적 현실주의다. 일본 사회에서의 우경화는 국가개조론자들이 가지고 가려는 사회 담론에서의 우경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게 극단적으로 갔을 때 인종주의적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들은 주변 세력에 불과하다. 아베 정부가 개헌을 추진하면 결국은 사라질 세력이다.

또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는 일본 정치 안에서 우경화 세력을 약화시키는 대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일본의 어떤 세력과 손을 잡을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의 소위 '리버럴'까지 싸잡아서 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본 모두를 내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실망감은 커지고,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경화 논조에 동의해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프레시안 :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아베의 보통국가화가 동북아 전쟁 재발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반면 역사학자 김기협 선생 같은 분은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군사력을 가지려 하는 것은 국가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군사력을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남기정 : 일본은 지난해 안보법제를 제‧개정 하면서 이미 내용적으로는 보통국가가 됐다.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겠다고도 했고. 남은 것은 형식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로 탈바꿈한 일본의 자위대가 정말 '슈퍼파워'에 걸맞는 군대인지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런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슈퍼파워'가 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본다. 일본이 형식적으로도 개헌을 통해 군대를 갖는다고 해도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미들파워'에 머물러 있는 나라다.

설혹 일본의 여론이 개헌을 인정하고 국민투표에서 이를 통과시킨다고 해도 일본 군대가 갑자기 대군이 돼서 중국이나 미국과 겨룰 수 있는 군대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의 군대를 그렇게 만들자는 여론도 없고, 그럴 실력도 없다.

일본은 중국과 대결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일본 국민도 그렇고 정책 담당자들도 그렇다. 심지어 아베 총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 : 그럼 일본은 보통국가로 탈바꿈해서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남기정 : 외교적인 발언력을 키우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일본이 3류 국가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일본이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국가적 이익을 확보하고 싶다는 정도다. 보통국가를 만들어서 이를 기반으로 과거와 같은 커다란 제국을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일본 국민들의 의식도 그렇지만 객관적인 지표들을 봤을 때도 이는 불가능하다.

▲ 남기정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일단 재정 문제가 있다. 일본은 OECD 국가 중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2030년까지 재정 압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지금 아베 정부는 재정을 건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까지 포기하면서 무리해서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노선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국가 재정 건전화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는 인구 문제다. 이미 일본은 자위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자위관 모집대상 연령인 18~26세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다. 여기에 구멍이 뻥 뚫려있다. 우리로 따지면 병을 모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본의 국방력 개편의 방향은 어떻게 하면 군대를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기동성 있는 군대를 만들 수 있느냐는 고민에서 나오는 것이지, 군사 대국을 만들겠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사병급 군사들을 감축하고 간부를 중심으로 주일미군과 일본 군대가 어떻게 연계할 것인지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일본이 독자적인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는 없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하는 동아시아에서의 일본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최대의 목표다. 그래서 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현재 아베 정권의 행보가 군부가 폭주했던 1930년대 일본의 행태와는 다르다는 것인가? 1931년 만주사변은 관동군의 독단적 결정으로 시작됐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내각은 군부를 제어하지 못했다.

남기정 : 지금 아베 정권은 분명 1930년대 일본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금의 중국이 1930년대의 일본을 닮아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일반적으로 미국과 일본이 군사 동맹을 강화해서 중국과 전쟁까지 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다.

남기정 : 그건 가상적인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그런 가상적인 시나리오 때문에 파생되는 국력의 낭비도 생각해봐야 한다.

프레시안 : 일본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미일 동맹을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는 뜻인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휴전협정 체제를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보자는?

남기정 : 우리가 미국과 일본을 너무 크게 보다 보니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것 같다. 외교적 상상의 유연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더구나 북한을 "때려잡겠다"는 것도 문제인데, 이 정권이 지금은 이렇다고 하더라도 다음 정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봐야 한다. 어떻게 논의를 가져갈 것인지에 따라 분명 달라질 수 있다.

기지국가 일본이 정상국가가 되려면, 휴전협정 체제가 극복돼야 한다. 거기서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잘 생각해서 차기 정권이 어떤 방향으로 대외 전략을 가져나갈지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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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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