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착암기가 바닥에 구멍을 뚫습니다. 약 15미터(m) 정도 깊이로 직경 12센티미터(㎝)의 구멍을 낸 뒤 그 안에 화약을 집어넣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발파를 합니다. 석회석이 무너져 내리면 로우더(loader, 굴착기)가 덤프트럭에 실어 줍니다. 덤프트럭은 석회석을 크러셔(crusher, 조쇄기)로 운반하고 크러셔가 잘게 부순 돌은 벨트라인을 타고 생산 공장으로 공급됩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주된 업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천광산에서 착암기, 휠로더, 덤프트럭 운전을 하고 발파팀은 발파를, 조쇄팀은 크러셔와 벨트 라인이 원활히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동양시멘트에는 45광구, 46광구, 49광구 그리고 생산 공장이 있습니다. 대부분 4조 3교대 근무로 현장은 365일 시간 쉬지 않고 가동합니다. 하루 8시간씩 주 5일 근무하는 형태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잔업'을 포함해 하루 16시간 근무를 수시로 합니다.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고 다시 아침 7시 40분까지 출근해야 합니다. 오후 4시에 출근하면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근무하는 것입니다. 쉬는 날에도 16시간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고, 잔업만 200시간이나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직원을 더 고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양시멘트는 부족한 인원을 쥐어짰고, 임금도 잔업을 해야만 겨우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잔업을 거부하면 관리자들은 말합니다.
"임금이 적으니 잔업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 동료를 위해서 해야 한다. 회사에 찍히면 남들 임금이 오를 때 너는 올려 주지 않는다."
동양시멘트는 이렇게 당연히 회사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들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겼습니다.
야간 교대 근무만 해도 건강은 물론이고 수명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잠잘 시간도 없이 기계처럼 일만 하는 노동자의 삶이 어땠을까요? 어떤 동료의 아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아빠 없이 살았어요. 얼굴 볼 시간이 없었어요. 그냥 오고 가면서 인사나 나누는 사이였어요."
그리고 아빠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아빠 죽은 거 아니야? 왜 안 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료의 얼굴은 무척이나 어두워졌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들 속에서 가족과의 추억조차 만들 수 없는 삶이 너무나 암울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그 때문에 술에 의존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명 하나 없는 어두운 산꼭대기에서 중장비의 불빛 하나에 의존해서 졸음과 싸워 가며 자칫 잘못하면 15m 높이의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현장에서 우리의 안전은 뒷전이었습니다. 덤프트럭 운행 중에 깜빡 졸다가 깨면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때도 많습니다. 졸음을 떨치려고 장비를 잠깐 세우면 작업을 재촉하는 무전이 왔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40m 정도 되는 절벽 아래서 작업을 시킵니다. 폭설이 내린 밤에 해무(海霧)가 올라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작업할 것을 강요합니다. 타이어가 다 닳아져 철심이 보여도 교체해 주지 않아 그 타이어가 터져서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돌조각과 모래가 튀면서 온몸에 박혀 피가 나고 고막이 터졌습니다. 물론, 산재 처리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2000만 원이 넘는다는 타이어 하나보다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정규직과의 차별이었습니다. 같은 현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았습니다. 2012년 당시 신규 입사자가 시급 4710원(법정 최저임금 4580원)으로 잔업을 제외한 기본급은 114만 원 남짓, 근속 연수 13년 차의 반장 직책을 가진 노동자의 시급이 6420원. 하청노동자의 60퍼센트가 최저임금을 받으며 인격적으로도 무시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차별과 생활고였습니다. 평생을 일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줄 있고 빽(뒷배)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 정규직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당함에 견딜 수 없었고 이에 맞서고자 2014년 5월 17일,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2월 말일 자로 전원 해고되었습니다. 동양시멘트는 하청 회사와 도급 계약을 해지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길거리로 내몰았습니다.
고용노동부 태백지청,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모두 동양시멘트의 불법행위(위장도급,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를 지적하며 부당 해고된 하청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입사일로부터 하청 회사가 아닌 동양시멘트의 정규직이라는 것입니다. 하청 회사는 바지사장을 내세운 형식에 불과한 유령회사라는 판정입니다.
그러나 동양시멘트는 정부 기관의 판결을 비웃기라도 하듯 직접 고용은커녕 노동조합을 없애기 위한 탄압에만 골몰했습니다. 조합원들에 대해 각종 고소·고발을 남발했으며, 16억 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하면서 은행 통장과 전월세 임차 보증금까지 압류하는 치졸함을 보였고, 지금은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진행 중입니다. 동양시멘트를 인수하기 위해 실사를 나온 '삼표' 자본에 우리의 요구를 알리는 문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경과 경찰 2개 중대를 동원해 조합원들을 폭력, 강제 연행했습니다. 구사대로 나온 관리자들과의 몸싸움은 폭력 행위로, 정당한 요구를 하는 선전전은 업무방해로 둔갑해 지부장과 수석 부지부장을 비롯한 8명의 조합원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습니다. 같은 혐의의 사건에서 조합을 탈퇴하고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을 취하하면서 동양에 굴종한 5명은 집행유예로 풀어 주는 강릉지법의 편파 판결이 있었습니다. 동양시멘트는 구속되었던 동지들에게까지 호시탐탐 회유를 일삼았습니다. 20년 넘게 온갖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동양시멘트는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과하는 이행강제금을 무는 것이 고작입니다. 2015년 9월에 동양시멘트는 삼표 자본에 인수되면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많은 조합원들이 떠나갔습니다. 삼표-동양시멘트에 굴복하고 다시 하청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해고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계가 어려워지고 가족과의 갈등이 커지면서, 그리고 온갖 고소·고발과 구속에 대한 두려움에서 우리의 투쟁이 쉽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열악한 현장에서 흙먼지를 마시면서 밤새도록 졸음과 싸워 가며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차별받고 무시당하며 소외되었던 서글픈 기억들을 애써 지워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동양시멘트 이전에 제가 해 왔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차별 없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일터를 찾아 직장을 몇 군데 옮겨 다녔습니다. 매번 힘들게 입사했지만, 어딜 가나 비슷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양시멘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바꿔 내지 않으면 어딜 가나 똑같다. 저항하지 않고,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
지금 남아서 투쟁하는 동지들 또한 우리가 왜 이 싸움을 시작했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겪어 왔지만, 왜 포기하면 안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수개월간 구속되었던 동지들과 함께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연대 동지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하자!'고 결의하고 있습니다. 삼척에서 서울에서 우리의 투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동양시멘트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긴다!"
"미련 없이 투쟁하고 당당하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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