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프레시안>에서 '박점규의 동행'을 연재했던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이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박점규의 수다'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 이들과 함께 연대해온 사람들을 만나 막걸리 한잔 하면서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는 '속 깊은 인터뷰'입니다.
"배밀이(오체투지) 할 때야. 너무 언 땅을 기어서, 흥희야, 할아버지야. 땅바닥이 너무 얼음덩어리야. 한 5초만 앉아야 배를 따뜻하게 하고 해. 할아버지 명령이야. 그러면 벌떡 일어나 앉을 줄 알았어. 그런데 흥희가, 저는 노조 결정만 따른다고 그러잖아. 팔십이 넘은 할아버지가 벌벌 떨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좋으면서 한편으로는 서운했어. 유흥희가 노동자의 결의만 따르겠다고 하잖아. 유흥희랑 밥 안 먹어." (웃음)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은 유흥희에게 백기완 선생님이 건넨 이야기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2014년 12월 22일부터 '비정규직 법제도 폐기'를 내걸고 세 차례에 걸쳐 오체투지 행진을 벌였다. 오체투지는 불교식 큰절로 무릎을 꿇은 뒤 두 팔꿈치를 땅에 댄 다음 마지막으로 이마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이다. 그 때를 떠올릴 때마다 백 선생님은 유흥희를 약 올리신다. 통일문제연구소에는 유흥희의 오체투지 사진으로 만든 포스터가 걸려있다.
백기완 선생님이 서대문 형무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온갖 고문을 당했던 군사 독재 시절 감옥살이도, 청춘을 오롯이 보낸 장기수 선생님의 긴 옥살이도 아닌, 한 여성 노동자가 제 발로 들어간 노역살이 14일. 그러나 사회적 파장은 적지 않았다. 백기완 선생님은 꽃을 들고 찾아온 유흥희의 손을 꼭 잡아주셨다.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유흥희 분회장(46). 그는 2005년 7월 노조를 만들고 불법파견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라며 파업을 벌여 해고됐다. 김소연 전 분회장의 94일 최장기 단식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흥희의 단식 일수는 자그마치 67일이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싸워 1895일 만에 정규직화에 합의했지만, 사장이 야반도주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업무상 배임과 사기죄를 위반한 사장을 무혐의 처분한 검찰, 도망간 사장을 만나겠다며 초인종을 누른 그녀에게 벌금 150만 원을 선고한 법원. 유흥희는 너무 억울했다. 금속노조에 신분보장기금을 신청해 벌금을 낼 수 있었다. 경찰서 유치장은 여러 차례 경험했지만 일찍이 관운이 없어서 옥살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걱정도 되고,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불의한 판결을 인정할 수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 노역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제 발로 들어간 서울구치소에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구치소는 '주거 침입죄'로 들어온 그녀가 20년을 넘게 싸워온 '꼴통' 노동 운동가라는 걸 알지 못했다.
"어디서 들은 건 있나 본데, 시대가 바뀌었어."
강제 알몸 검신을 거부하자 여자 교도관이 뱉은 말은 유흥희에게 충격이었다. 공안수가 아닌 일반 사범들, 소위 '잡범'들에게 인권은 없었다.
일찍 찾아온 더위, 시원한 맥주를 앞에 놓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 14일의 기록을 보면서 얘기를 전해줬다.
- 4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과에 출두해 서울구치소로 이송된 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
= 서울구치소에 도착해 수갑을 풀고 검신실로 갔는데, 한 교도관이 수술 자국이나 문신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속옷까지 모두 탈의하라고 했다. 나는 수술 자국과 문신도 없고, 마약사범이나 강력 범죄자에게 하는 알몸 탈의는 못 하겠다고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교도관이 나가더니 두 명을 데려와 양팔을 붙잡고 강제로 탈의시키고, 수인복을 입혔다. 검신실에 가운이 걸려있었는데 아무런 안내도 안 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계속 울었다. 신입방으로 들어가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겠다고, 진정서 양식을 달라고 했다.
- 강제 알몸 검신을 당한 후 방에서 어떻게 지냈나?
= 40만 원 벌금을 못 낸 언니가 신입방에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큰 소리로 울다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울었는지 언니가 밤에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 온 몸이 쑤셨다. 약을 달라고 했더니, 의약품은 처방전 없이 지급되지 않는다며 사서 먹으라고 했다. 큰 병이 아니면 안 준다고 하더라. 가진 돈 10원도 없고, 몸이 아파서 견딜 수 없으니 약을 달라고 싸웠다. 결국 진통제를 받아서 먹었다.
- 조합원들이 서울구치소에 들어가서 모처럼 바깥 일 좀 잊고 쉬라고 했다던데.
= 쉴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일흔 넘은 할머니가 들어왔는데, 척추 수술을 해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환자였다. 병상방으로 옮겨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요구한 끝에 할머니는 점호할 때만 일어나고, 다른 시간에는 누워서 지내기로 했다. 내가 할머니를 부축해서 걷고, 목욕할 때도 도와야 했다. 다음날에 방에 들어온 아주머니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이 헐떡거렸다. 공황장애가 있다고 했다. 두 분을 돕느라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서를 늦게 썼다.
- 기륭전자 김소연 전 분회장이 면회를 다녀와서 밖에서도 알게 됐는데
= 5월 2일 김소연 전 분회장이 면회를 와서 처음으로 알몸 검신에 대해 밖으로 알렸고, 3일 윤지영 변호사가 접견을 신청해 알몸 검신 상황에 대해 묻고 갔다. 5월 4일 김소연이 <한겨레> 정은주 기자와 함께 면회를 왔다. 운동하고 있는데 교도관이 와서 정은주 이름을 대면서 아느냐고 물었다. 지인이라고 얘기했다. 알든 모르든 나를 면회 온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요즘 워낙 왜곡 보도 때문에 걱정이 돼서 그런다고 하고 갔다. 기자는 면회를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서울구치소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 교도관들이 정치인들이나 공안사범이 아닌 이른바 '잡범'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었나?
= 감옥에 간 민주노총 간부들이 많지만, 알몸 검신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첫날 나랑 같이 수갑 차고 왔던 아주머니는 내 옆 칸에 들어갔는데 교도관이 알몸 상태로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방에서 만난 언니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교도관에게 고개 돌리라고 하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5월 9일 전방(방을 옮기는 것) 와서 다른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변호사가 접견을 와서 나가는데, 생리를 하고 있다고 해도 가차 없이 벗으라고 했다며, 변호사를 만나러 나가는 일까지 너무 치욕적이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교도소에 들어올 때만 검신을 하는 게 아니다. 검찰 조사, 재판, 변호사 면회까지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검신을 한다.
- 서울구치소 알몸 검신 소식으로 5월 9일 인권, 노동단체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고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안에서는 소식을 들었나?
= 5월 9일 계장 면담을 통해서 알게 됐다. 이후 면회를 통해 자세하게 들었다. 5월 10일 저녁에 같은 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신문을 보여줬다. 이 언니가 이렇게 유명한 언니냐고, 신문에 난 기사를 오려서 자기 일기장에 붙이고, 그걸 소재로 편지를 써서 전방 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랬다. 자기들은 용기가 없어서 못 했는데, 정말 고맙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더라. 면회 온 사람들이 사과를 넣어주면 반은 썩거나 시든 사과가 들어온다며 억울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대신 싸워주는 건 없다고, 당사자가 얘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용기가 안 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나가서라도 얘기하라고 국가인권위 주소를 알려줬다.
- 혼자서 20인승 호송차를 타고 법원에 왔다는데, 어떻게 된 일이었나?
=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이 주거 침입으로 고소한 다른 사건 재판이 5월 10일 있었다. 아침 9시에 출정 가는 사람들 부르는데 안 불러서 재판이 있는데 왜 안 부르냐고 했더니 법원으로부터 연락받은 게 없어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사건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계장을 면담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김소연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 번호를 확인해줬더니, 이번엔 차가 없어서 못 나간다고 하더라. 중요한 재판이어서 개인 차량으로라도 나가게 해달라고 했다. 혼자서 결정을 못 한다고, 교도과장에게 전화하겠다고 하더니, 어렵게 호송 차량이 마련됐다고 했다. 법원까지 20인승 버스를 혼자 타고 갔다. 운전하는 아저씨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더라. 재판받고 나오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만나서 좋았다.
-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나왔나?
= 5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두 명이 왔다. 당일 있었던 사실과 수감자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서울구치소가 알몸 검신을 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강제로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교도관들이 가운을 입으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조사관들이 오후에 다시 불러 검신 받은 과정을 재현해줄 수 있겠느냐고 해서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 교도관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 교도관들도 정말 알몸 검신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자신들도 너무 싫다고, 정말 괴로운데 위에서 내려오는 일이니까 한다고 하더라. 그 중에는 정말 못된 것들도 있지만 미안해하는 교도관들도 많다.
- 언론에 알려지고 분위기가 달라졌나?
= 대우가 달라졌다. 내가 발이 작은데 맞는 고무신이 없었다. 고무신이 벗겨지고 뒤꿈치가 까지더니 피가 났다. 맞는 사이즈가 없다고 하더라. 운동화가 그나마 나을 것 같아서 바꿔달라고 했더니 바꿔줬다. 치료실로 오라고 해서 소독하고 약 발라주고 대일밴드를 붙여줬다. 신입방에 있을 때였다. 일주일 넘게 입을 수 없으니까 속옷을 달라고 했더니 사서 쓰는 거라며 안 주려고 하더라. 그럼 연고도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싸웠더니 갖다 줬다. 힘없는 사람에겐 인권도 없고, 돈 없는 사람에겐 존엄도 없는, 그런 곳이 교도소였다.
- 노역 끝나고 서울구치소를 나오는 날, 노동인권 단체들이 '잡범도 인권은 있다'는 문화제를 밤새 벌였다는데
= 마지막 날엔 출소방으로 가서 기다리는데, 우리방 사람들이 출소방에 가면 먹을 게 없다고 빵과 커피까지 싸주고, 고생했다고 박수 쳐주고, 나가서 우리 얘기 꼭 하라고 했다. 의약품 안 주고 무조건 사서 쓰라고 하는데, 싸워서 얻는 것 처음 본다고, 고맙다고 했다.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음악 소리가 나서 깼다. 창문으로 가서 목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잘 들려서 누가 왔는지 금세 알겠더라. 먼 곳까지 온 사람들이 고마워서 한참을 울었다.
- 집에서는 알고 있었나?
= 엄마한테는 중국 출장을 갔다고 했다. 동생에게는 미리 귀띔을 해놓았다. 그런데 동생이 알몸 검신 사건을 최근에 알고 전화를 했다. 조카가 페이스북을 보고 얘기를 해줬다고 하더라. 기사에 달린 댓글이 대부분 괜찮아서 다행이었다.
- 다시 태어나도 노동 운동을 할 건가?
= 사실 고등학교 때 그놈의 투쟁(서울 정화여상 사학비리 척결 사립학교 민주화 투쟁)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정말 가기 싫었는데, 집안이 어려워 상고에 간 것부터가 이런 길로 접어들게 한 것 같다. 다시 태어나봐야 알겠지만, 사는 게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좋아지거나, 아예 모르고 살거나 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불의에 저항하며 살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도 깨달았지만 진짜 안 싸우면 그냥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이번 일로 잡범이라고,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사범이라고 인권을 유린당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알몸 검신은 꼭 없어졌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게 산 건 아닌 것 같다.
집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초인종을 눌렀다는 이유로 대법원은 유흥희에게 벌금 150만 원을 선고했다. 경찰에 잡혀가 하루를 지내서 내야 할 벌금은 140만 원이었고, 유흥희는 서울구치소에서 14일 노역을 살았다.
과거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 위반 벌금은 100만 원을 넘지 않았고, 당시 법원이 책정한 일당은 5만 원이었다. 그런데 광주법원은 벌금 254억 원을 선고받은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일당 5억 원이라는 '황제 노역'을 판결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법원은 '잡범'들의 노역 일당을 10만 원으로 올렸다. 하지만 그보다 벌금 액수가 훨씬 많아졌다. 세월호 집회를 비롯해 돈 없는 노동자, 서민, 학생들에게 200~300만 원이 넘는 벌금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유흥희는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5.18 광주 항쟁 36주년을 맞아 광주를 찾았다. 그녀를 알아본 학생들이 손을 잡고 인사했다. 집회와 시위에 벌금이 많이 나와 노역을 살러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쓴 '노역 일기'가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돈으로 양심을 옥죄고, 벌금으로 두 손을 묶는 세상, '노역 학교'라도 열어 집단 저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유흥희의 친구들은 그를 향단이라고 놀린다. 온갖 궂은 일은 그녀가 다 도맡아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투덜거리면서도 맡겨진 일을 피하는 일이 없다. 그는 면회를 온 친구에게 몸이 아픈 할머니와 아주머니를 돌보느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쓸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돈도, '빽'도 없는 잡범들에게만 가해진 폭력과 인권유린을 본 유흥희가 싸운 14일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그의 벗들은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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