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12일, 돈의문1구역 뉴타운 지역에서 강제철거가 진행됐다. 스물한 가구 중 마지막 한 가구가 최종 합의를 하지 못하고 홀로 싸우고 있었다. 지난 17일 강제철거된 '옥바라지 골목' 구본장 여관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일식집을 운영하던 고모 씨가 마지막 한 가구였다. 끝까지 남아 버텼지만 결국 그의 식당은 용역 직원에 의해 강제철거됐다.
주목할 점은 안타깝게도 고모 씨는 철거 과정에서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을까. 고인의 유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모(67) 씨가 서울 강북삼성병원 앞에서 일식집을 연 것은 1999년이다. 16년째 장사를 하고 있다. 처음엔 아내와 함께 영업하다 식당이 자리를 잡자 직장에 다니던 아들이 합류했다. 그간 열심히 일하면서 단골도 많이 만들었다. 인근에 있는 경향신문 기자들도 자주 고 씨 가게를 찾았다.
그러던 중 2006년부터 재개발 소문이 불기 시작했다. 고 씨의 가게가 속해 있는 돈의문 지역에 뉴타운사업 인가가 떨어지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설마 재개발이 진행될까 싶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재개발 광풍이 잠잠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또다시 뉴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6년 장사한 고 씨, 뉴타운 광풍에 휩쓸려
2014년 말 GS건설이 이곳 1구역에서 '경희궁 자이' 아파트 2415가구(전용면적 33~138㎡)와 오피스텔 118실(계약면적 69~107㎡)을 분양하며 본격적으로 뉴타운 사업이 진행됐다. 그러면서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돈의문 뉴타운 조합은 일정 평수를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면서 동시에 일정 용적률 상향을 인센티브로 받았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이다.
고 씨가 장사하는 가게는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는 곳으로 책정됐다. 서울시는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한다고 했다. 하지만 고 씨와 같은 세입자 관련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언급되지 않았다. 고 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세입자들과 대책위를 구성하고 적절한 보상금을 요구했다. 조합 측에서 제시하는 보상금으로는 다른 지역에서 가게조차 열수 없었다. 수억에 달하는 권리금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기존 운영하던 가게가 재개발 지역으로 묶이면서 가게를 팔 때 받아야 하는 권리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이가 가장 많은 고 씨가 세입자 대책위 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철거가 임박해오면서 하나둘 인근 상가세입자들이 자리를 떠났다. 빈집이 늘어나면서 장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먹고는 살아야 했다. 아들과 함께 하는 가게였다. 인근에 망한 어학원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선 가게부터 냈다. 여기저기에서 빚을 끌어다 썼다.
그런 사이 버티는 세입자도 고 씨를 포함해 네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자 정비업체 측은 고 씨에게 네 가구 일괄합의를 전제로 각 3000만 원의 합의금을 줄 테니 나머지 세입자들도 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라고 요구했다. 그 말만 믿고 고 씨는 세 가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 가구는 금액이 적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 돈으로는 다른 곳에서 가게를 열 수 없었다. 이들 세 가구는 서울시에서 공원을 만들 경우, 그곳에 만들어지는 상가의 우선 입찰권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고 씨는 서울시청 담당자를 찾아가 합의가 어려우니 중간에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서울시 담당자는 조합 관계자에게 관련 민원을 전달했으나 조합에선 전권이 정비업체, 즉 철거 용역에 넘어갔다며 자기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혼자가 된 고 씨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렇게 고 씨가 합의하자고 했을 때는 거부했던 세 가구가 고 씨를 제외하고 자기네들끼리 조합과 합의한 것. 오롯이 고 씨 혼자만 남게 됐다.
마음이 다급해져서 철거 용역 관계자를 만났다. 다른 세입자들도 합의했으니 자기와도 합의하자고 부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정했다. 애초 고 씨에게 요구한 나머지 세 가구 설득이 실패했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했다. 애초 약속했던 3000만 원 대신 이사비용 100만 원을 받고 나가라고 했다.
고 씨는 철거 용역들에게 그동안 이용만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4월 12일 낮 1시께였다. 철거 용역이 고 씨 가게를 강제 철거했다. 철거를 미처 알지 못했던 고 씨였다. 아들이 운영하는 인근 새 가게에서 점심장사를 도운 후, 자신이 운영하던 옛 가게로 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대부분 집기가 철거돼 있었다.
자신이 십수 년 쓰던 물건들이 길바닥에 내팽개쳐 있는 것을 보고 눈에서 불똥이 튀었던 것일까. 아니면 바보같이 이용만 당한 뒤, 버려졌다는 상실감에서 그랬던 걸까. 당시 현장에 있던 용역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고 씨는 철거현장을 목격하고는 조용히 가게 바깥 쪽에 숨겨둔 시너를 자기 몸에 뿌리고는 불을 댕겼다고 한다.
죽기 전날까지만 해도 칠순 기념 여행한다던 고 씨
고 씨의 유가족은 아직도 고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자살할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는 것. 죽기 전날까지만 해도 합의만 잘 되면 칠순 기념으로 처제 부부와 전국 여행을 다닐 거라고 했던 고인이었다.
고인이 자기 몸에 끼얹은 시너는 스스로 분신하기 위해 준비해둔 게 아니라고 용역을 대비한 위협용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가게들이 모두 합의하고 나간 뒤, 홀로 남겨진 가운데 호신용으로 준비해두었다는 것. 고 씨 부인은 "고인은 용역이 철거하러 들어올 경우, 시너를 뿌리면 물러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시너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고 씨 유가족들은 용역직원이 철거과정에서 고인과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이 과정에서 분을 참지 못한 고 씨가 자기 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댕겼다는 것. 그럴 경우, 현장에 있던 용역 직원에게 자살방조죄가 적용될 수 있다.
고 씨의 딸 은정(가명) 씨는 "현장에 있던 용역 직원은 아버지가 조용히 시너 있는 곳으로 가서 혼자 불을 붙였다고 진술했다"며 "하지만 당시 출동한 서대문119 소방대원과의 대화에서는 현장에 있던 용역직원과 시비가 있었고 이후 아버지가 시너를 붓고 불을 붙였다는 내용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은정 씨는 "게다가 사고 현장에는 평소 아버지와 갈등이 있던 용역 직원이 가게 인근에 배치돼 있었다"며 "그런 용역 직원들이 아버지가 시너가 들어있던 간이창고까지 가도록 순순히 뒀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 몸싸움을 벌였거나 극단적인 마음을 먹도록 자극했다는 것.
"아버지가 2년간 매달린 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현재 종로경찰서에서 이 사건을 조사 중이다. 이미 당시 현장에 있던 정비용역, 집행관 등을 소환 조사했다. 사건 현장 조사는 다 마친 셈. 하지만 유가족이 주장하는 고인과 용역 간 몸싸움 관련해서는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기 힘든 상황이다. 고인은 이미 진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일뿐더러 사건 당시 현장에는 CCTV나 제3의 목격자가 없었다.
당시 상황 조사는 철거를 진행했던 집행관, 인부, 정비업체 직원들의 진술로만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고 씨 유가족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 은정 씨는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서울시가 나서서 사고가 발생한 지역의 재개발을 유보해 달라고 요구했다.
아직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사건의 현장이 보존되지 않는다면 사건에 대한 진실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다. 은정 씨는 "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며 "지난 2년간 여기에 매달린 것은 보상금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었다. 마지막 고인이 가시는 길에 이것을 지켜드리고 싶다"고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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