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 거라고 믿었던 선거였는데 졌다. 난리가 났다. 당 지도부는 사퇴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선거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고 복기해 보기 위한 특별 기구가 설치됐다. 하지만 이미 당내 다수파를 점한, 선거 이전의 주류 세력이 고분고분 엎드릴 리는 없었다. 일사불란한 반격은 아닐지라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저항이 일었다. 자고 나면 파열음과 마찰음이 났다. 그런 가운데 당 이미지는 엉망이 돼 갔다."
4.13 총선 이후의 새누리당에 대한 이야기일까?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몇 년 전 야당이 선거에서 졌을 때를 돌아보자. 선거 패배 책임 공방, 비상대책위원회 운영, 혁신위원회 구성…. 기시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야당 관계자와 지지자들에게 익숙한 뉴스들이 이제는 여당발(發)로 나오고 있다.
#1.
구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은 201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패배 이후, 당 대표를 겸직하고 있던 문재인 후보와 이른바 '친노' 그룹은 2선으로 후퇴했다. 문희상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했다. 문 의원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 범친노계로 분류된다. 범주류였던 셈이다.
2016년, 새누리당이 4.13 총선에서 패배했다. 김무성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사퇴한 후, 비대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주류인 친박계의 지원을 받은 정진석 의원이었다. '친노 : 문희상'과 '친박 : 정진석'의 관계는 비교적 비슷하다.
#2.
2013년 민주당, 문희상 비대위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대선평가위원회'를 당에 설치하기로 하고, 위원장으로는 '친안(안철수)' 성향이라는 평을 듣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를 위촉했다.
다시 2016년 새누리당, 정진석 비대위원장(전국위원회 인준이 무산됐으니 '비대위원장 지명자'라고 해야 하나?)은 총선 패배 원인을 진단하고 당의 체질을 바꿀 혁신위원장으로 비박계 소장파로 분류되는 김용태 의원을 임명했다.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3.
2013년 민주당. 한상진 대선평가위가 내놓은 보고서는 이른바 '친노' 그룹을 사실상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친노 쪽은 편향된 평가라며 반발했다.
2016년 새누리당. 아직 평가를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김용태 혁신위원장은 벌써 사퇴했다.
야당·친노 비난하던 친박·새누리, 스스로 돌아보길
새누리당은 늘상 야당, 특히 이른바 '친노' 그룹을 맹렬히 비난해 왔다. 언론에서 친노와 친박은 각 당 내의 주류(다수파) 그룹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 집단으로 비교되기도 한다. 폐쇄적 성격과, 지도자 또는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점이 유사점으로 꼽힌다. (물론 이런 특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권력 집단에서 발견되는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친노든 친박이든 억울한 면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비판하던 야당의 '친노'도, 또 비노도 이러지는 않았다. 위에서 살펴봤듯, 2012년 대선에 패배하자 친노 그룹은 2선으로 후퇴하고 '한상진 대선평가위'를 세워 쓴소리를 들었다. 2013년 5월 전당대회에서는 당권도 비주류인 김한길 대표에게 넘겼다.
비주류 지도부였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역시 2014년 7.30 재보선에 패배하자 미련없이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박영선-문희상 비대위원장을 거쳐, 2015년 1월 문재인 대표 당선으로 당권은 다시 친노 그룹으로 넘어갔다. 나중에 불평이야 하더라도, 선거에서 지면 어쨌든 겉으로라도 경쟁 계파에 당권을 넘기고 물러나 비판을 듣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새누리당, 특히 친박계는 야당을 향해 쏘았던 '포탄'들을 스스로 곱씹어볼 때다. 몇 대목을 소개한다.
"문재인 의원이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본인 스스로 대선 패배 후 인정했듯 준비 부족, 실력 부족, 그리고 친노 세력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반성과 성찰 없이, 내 탓은 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것은 정말 뻔뻔스럽고 스스로에게도 민망스러운 일이다." (2013.12.6.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민주당 친노 세력의 패권 다툼과 '그들만의 리그'는 십 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그들에겐 국민도, 당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친노 세력이 중요하다는 것처럼 보인다. '친노의', '친노에 의한', '친노를 위한' 세상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2013.12.23. 홍문종 당시 새누리당 사무총장)
덧붙여, 친박계는 아니지만 새누리당 소속인 김기현 울산시장도 당 정책위의장 시절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역시 지금 새누리당이 돌아볼 만한 말이다.
"세력이 약화된 친노 세력이 민주당 내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방식으로 구태 정치를 반복한다면 민주당은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현 상황을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2013.10.23. 최고위원회의)
물론 야당에서도, 선거 패배 책임론에도 불구하고 같은 계파가 연이어 '등판'한 적이 없지는 않다. 2012년 총선 패배 이후 한명숙 대표가 사퇴하고, 박지원 당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가 2개월가량 비대위원장을 맡은 뒤 한 대표와 같은 친노계인 이해찬 대표가 다시 당권을 잡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칼럼 앞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구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은 201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러고 보니, 내년에는 다시 대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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