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협치'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제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허용 요구에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응답을 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새누리당이 국가보훈처(박승춘 처장)에 재고를 요청했지만, 기대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 사안의 최종 결정권자는 청와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18을 기점으로 정치권은 격랑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지시 사항인데 보훈처가 단독으로 '불가' 보고 올렸다?
국가보훈처(박승춘 처장)는 16일 보도자료를 내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기 어렵다는 입장과 함께, 이틀 앞으로 다가온 올해 5.18 기념행사에서 이 곡을 제창하는 것 역시 안 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론 분열이 생기지 않는 좋은 방안을 마련할 것"을 보훈처에 지시했는데도, 이같은 방안이 도출됐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국론 분열 방지'는 일부 극우 단체의 주장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먼저 보훈처는 기념곡 지정이 어려운 이유로 관련 규정이 없다는 근거를 댔다. "5대 국경일, 46개 정부기념일, 30개 개별 법률에 규정된 기념일에 정부에서 기념곡을 지정한 전례가 없고 애국가도 국가 기념곡으로 지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할 경우 '국가 기념곡 제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또다른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창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 "부르기 싫은 사람에게 제창을 강요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고 했다.
그러나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은 보다 명쾌한 설명을 내놓았다. 정 원내대표는 "정부도 나름대로 입장이 있다"면서 "제창이 허용되면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따라 불러야 하는 또다른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명확해 졌다. 즉 박근혜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제창 식순에 넣지 못하는 진짜 이유인 셈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불허 방침이 보훈처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도 어불성설이다. 정 원내대표와 민경욱 원내대변인이 보훈처에 '재고' 요청을 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이 사안을 분리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즉, 박 대통령은 전향적 태도를 취했는데 보훈처가 문제라는 것이다. 대통령 검토 지시에 '불가' 입장을 낼 행정 기구는 없다. 차관급에 불과한 박승춘 보훈처장이 박 대통령에 항명을 했다기보다는 청와대의 뜻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대통령이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일종의 '심기 경호'라기 보다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필요하면 히잡도 쓰는 대통령, 유독 '5.18 노래'는 안 돼?
5.18 기념곡 제정 문제는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니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제창을 못하도록 한 것은 정치적 판단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정무적 판단으로 얼마든지 보훈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일 이란을 방문하면서 이슬람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 각종 논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히잡을 쓰고 포토라인에 서는 파격을 보였다. '세일즈 외교'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접근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박 대통령은 그간 프랑스를 방문해 프랑스어로 연설을 하고,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중국어로 연설하는 등, 상대 나라를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평가도 받았다. 대통령이 외국어로 연설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최소한 청와대는 이를 외교 상대에 대한 배려로 해석하고 적극 홍보했다.
그런데 국내에서 야당이 요청하고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거부하고 있다. 외교 상대국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반면, 자국의 정치적 반대 세력은 절대 보듬을 수 없다는 의지로 읽힐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5.18 기념식에 참석할 지 여부는 현재 알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2013년을 제외하고 5.18 기념식에 국무총리를 대신 참석시켜왔다. 청와대는 오는 18일 일정이 유동적이라고 설명했지만, 만약 참석은 하더라도, 제창을 끝까지 불허한 모양새는 썩 좋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비박 기용한 정진석 궁지에 몰고, 야당의 요구는 찢어버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야당의 반응이다.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과 야 3당 원내대표 회동에서 어떤 합의안도 도출되지 않았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사실상 '합의 파기'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그간 긍정적으로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당과 함께 박승춘 보훈처장의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기로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20대 국회 협치 가능한가' 세미나에서 "보훈처에 지시하겠다 해놓고 3일만에 협치 소통의 종이를 찢어버렸는데 다시 국회에서 협치하라 하면 할 수 있겠는가. 저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당의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태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 된 것이어서, 야당은 향후 국정 운영 과정에서 강공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도 궁지에 몰린 모양새다. 정 원내대표는 당 혁신위원장에 비박계 중에서도 가장 강성인 김용태 의원을 내정했고, 비상대책위원을 비박 일색으로 채웠다. '친박당'으로 불리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그런데 친박계가 강력한 집단 행동을 시사했다. 당 운영 과정에서 배제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총선 패배 후 극심한 갈등 끝에 지도부 구성을 완료했는데, 박 대통령의 친위그룹이 이를 뒤집겠다고 나선 형국이다.
박 대통령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 내부에서는 총선 패배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대 총선 득표율 관련 정확한 통계가 선관위에서 발표되면, 이를 근거로 '김무성 지도부'의 공천 실패 등을 부각시키며 역공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박 대통령과 친위 그룹이 결국 비박도, 야당도 껴안지 못한다면 그 결말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새누리당 인사들 사이에서 '정계 개편'과 '대통령 탈당'이 언급되는 것을 그냥 넘기기에는 상황이 매우 심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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