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도 지금쯤은 총선 결과를 보고서 놀란 가슴이 진정됐을 것이다. 명색이 진보 언론에서 밥벌이를 하는 기자도 놀랐으니, 여당의 승리를 마음속 깊이 바라며 또 확신했던 대통령은 얼마나 놀랐을까? 새벽에 개표 방송을 보면서 몇몇 동료와 청와대의 대통령 안부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을 주고받은 것도 이런 사정 탓이다.
뜬금없이 박근혜 대통령 안부로 글을 시작한 것은 개표 방송을 보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4월 13일 출구 조사 결과를 보고 나서, 또 개표 방송을 보면서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문구는 이런 것이었다. '아, 이제 드디어 공주가 할머니가 되겠구나!'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53년생이니, 이제 우리 나이로 예순네 살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가정을 꾸렸다면, 정말로 손자 손녀가 있더라도 이상한 나이가 아니다. 그러니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박근혜 할머니'로 불러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연상이다.
'박근혜 할머니'를 떠올려본 것은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정말로 '할머니'의 마음으로 국정 운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공공연히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언급을 했었고, 그렇다면 지금 박 대통령의 손자 손녀는 대한민국 미래 세대 전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한민국 보수 세력 혹은 그 안에서도 한 정파(친박이든 진박이든)의 수장이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 세대 전체의 앞날을 걱정하는 '할머니'로서 정체성을 자리매김한다면 남은 임기 동안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세심하게 구분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열거하면 이렇다.
우선 틀어질 대로 틀어진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게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통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해 왔음에도, 지난 임기 동안 남북 관계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기만 했다. 물론 거기에는 핵과 로켓 발사 실험을 멈추지 않는 북한 당국의 태도에도 한 원인이 있다.
하지만 언제 핵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런 화약고 같은 한반도를 미래 세대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다. 과감하고 파격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보수 성향의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과감하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면 오히려 국민적 합의를 더 잘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20대 총선에서 국회의 주도권을 잡는 야당의 협조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2015년)에 무리하게 추진했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포기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평소 강조하는 '창조'가 가능하려면 '다른' 생각을 용인하는 태도가 필수이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에는 당연히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도 포함된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다음 세대가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할 수 있다.
사실 이미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물 건너갔다. 여소야대의 20대 국회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저지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또 2017년 정권이 어떻게 바뀌든 진보, 보수를 떠나 역사학계 다수가 반대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원상 복귀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임기가 끝나고 나서 박근혜 대통령 의지와 무관하게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백지화된다면, 그걸 바라보는 '박근혜 할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또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 뜻대로 무리하게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던 관료, 정치인, 지식인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 또한 불행한 일일 것이다. 어차피 안 될 일, 박 대통령이 결자해지하는 게 맞다.
셋째, 더 늦기 전에 국민의 세월호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세월호 비극에 가장 마음 깊이 상처를 입은 것은 단원고등학교 친구들을 떠나보낸 미래 세대일 것이다. 그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서, 또 그 사고 이후에 박근혜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가 보였던 모습에서 엄청난 절망감을 느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임기 중반의 비극적인 사고로 정국 운영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정이 답답했을 수도 있다. 여러 곳에서 삐걱거리는 대한민국 시스템의 문제를 대통령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서 비난하고 비판하는 태도에 분통이 터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박근혜 할머니'의 마음으로 그 사고를 복기하면 어떨까?
'박근혜 할머니'의 손자 손녀나 그 친구가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면 마음이 어땠을까? 세월호 사고 이후에 국민이 박근혜 대통령께 기대하는 것은 바로 그런 '공감'이었다. 어차피 20대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개정하려는 이런저런 시도가 이어질 것이다. 그 때 정말로 '박근혜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세 가지 말고도 열거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무리하게 추진한 노동 정책을 비롯한 경제 정책 등 여러 가지가 미래 세대의 삶과 직결될 테니까. 하지만 이 모든 걸 자기 부정하길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것을 바로잡는 일은 20대 국회 또 다음에 권력을 잡을 정치인의 몫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박근혜 할머니'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나 어머니 육영수 여사처럼 비극적인 만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한국 현대사에 남긴 아버지의 공과를 떠나서, 가족사와 개인사만 놓고 보면 이미 충분히 비극적인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퇴임 후 '박근혜 할머니'의 만년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지금은 세계사는 물론이고 한국사의 격변기로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많은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박 대통령은 이제 '할머니'의 마음으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새로 파트너가 될 20대 국회와 손발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굳이 새로운 걸 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시간으로 남은 임기를 써야 한다. 그러다가 순조롭게 다음 정권으로 권력을 이양한다면, 정말로 '박근혜 할머니'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대통령 박근혜'가 아니라 '할머니 박근혜'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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