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코리아라는 말을 실감한다. 가는 곳마다 한국 분들이 계신다. 현지에서 보고 느낀 얘기를 청해 듣는다. 그러면 그 나라 못지않게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언론사 특파원을 만나서 인상적인 경우가 좀처럼 드물다. 대개 취재보다는 번역에 능하다. 외신을 소개하는 중계자에 그친다. 구태여 그곳에 살아야 할까 싶다. 사람 탓만은 아니다. 제도적 문제이다. 장기간 체류하며 전문가로 숙련되지 못한다.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러니 축적이 안 된다. 좀 알 만하면 귀국한다. '박사님보다 아는 게 적을걸요.' 겸손함이 아니라 겸연쩍음이다.
대기업 주재원들도 만난다. '지역 전문가'로 파견된다. 회사에서 학습 비용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현장 보고서를 꾸준히 작성한다. 보고서가 직무 평가에 반영되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눈치이다. 덕분에 개별 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역 정보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한계 또한 뚜렷하다. 대개 가정부 딸린 집과 운전수를 곁들인 차를 제공받는다. 식사도 업무비로 처리할 수 있다. 아무래도 좋은 곳을 찾는다. 교류하는 이들도 관료나 기업가들이다. 사무실 밖, 자동차 밖의 세계는 잘 모른다. 그 사회의 밑바닥까지 훑어 전체를 망라하기는 힘든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전면적 접촉보다는 점과 점의 연결로 작동한다.
내가 선호하는 경우는 사업가이다. 현장에서 승부를 거는 경영인들이다. 현지인들과 매일같이 살을 부딪치며 살아간다. 경영은 절반 이상이 사람 관리이다. 나와 남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자연스레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익숙해진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무심할 수가 없다. 상호 진화, 상호 융화가 일어난다.
그 중 일부는 공부에도 열심을 낸다.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학습하는 '주경야독'을 실천하는 것이다. 실무와 독서가 공진화하여 독자적인 안목에 이른다. 간혹 이런 분을 만나면 견문의 질이 확 달라진다. 100쪽의 책을 읽는 것보다 100분의 대화가 월등하게 이롭다.
미얀마에서도 그런 분을 만났다. 10년 넘게 공장을 운영하면서 미얀마(및 동남아시아) 공부를 병행하셨다. 물론 생면부지였다. 그러나 온라인 코리아는 촘촘했다. 인터넷 카페, 이메일, 카카오톡으로 이어지는 세 번의 연결망으로 이틀 사이에 접속되었다. 마침 내가 미얀마에 머무는 동안 임팔 전투 현장을 가볼 계획이라 하신다. 그때 임팔(Impal)이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다.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는 독일과의 전쟁에 치중되어 있다.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사는 중국과 미국에 편중되어 있다. 그래서 대일본제국과 대영제국이 다투었던 임팔 전투는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그런데 이참에 돌아보니 결정적인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유라시아 대전'의 전모를 한층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얀마의 교통망은 부실하고 열악하다. 혼자라면 가기 힘들었다. 그 분 덕에 지프차를 빌려 돌아볼 수 있었다. 운수대통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은 파죽지세였다. 홍콩,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 인도네시아 등을 차례차례 점령해갔다. 특히 싱가포르가 중요했다. 일본 해군이 태평양과 인도양을 갈랐다. 영국과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사이의 바닷길을 끊어냈다. 해양을 접수한 일본은 태국(타이)으로 들어가 미얀마로 북상했다.
내륙의 미얀마는 싱가포르 못지않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위치가 절묘하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자리한다. 이곳을 차지하면 중화민국과 영국령 인도 간의 '버마 로드'를 끊어낼 수 있다. 국민당 정권의 마지막 생명선을 절단냄으로써 마침내 중국 대륙 정복을 완수할 수 있었다.
나아가 벵골 만을 지나 인도까지 도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大東亞(대동아)도 모자라는 말이 된다. 중국과 인도를 모두 장악하여 '대아시아 공영권'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20세기에 실현되는가 싶었다.
해가 뜨는 나라가 약진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저물어갔다. 일본의 미얀마 진격은 콜카타와 델리, 런던을 경악시켰다.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마저 풍전등화가 된 것이다. 인도의 규모는 싱가포르나 홍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도의 상실은 곧 대영제국의 몰락을 의미한다. 영국은 랭군에서 만달레이로, 만달레이에서 인도의 아삼으로 거듭 후퇴했다.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긴 철수였다.
떠나는 모습도 볼썽사나웠다. 런던의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던 석유 지대에 불을 질렀다. 추격하는 일본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시커먼 연기가 불교 성지인 파간(Pagan) 일대를 한 달이나 뒤덮었다. 그 먹구름을 뚫고 동양의 태양이 솟아올랐다. 아편 전쟁 이후 100년, 서구의 지배가 저물고 아시아의 세기가 도래하는 듯하였다.
불꽃과 태양, 그리고 벼락
랭군(양곤)을 점령하는 일본군 사이에 몇몇 미얀마 인들이 섞여 있었다. 맨 앞에 섰던 이가 아웅산이다. 그 옆에 있던 이가 네윈이다. 아웅산은 그들 사이에서 테자(Teza)라고 불렸다. 미얀마 어로 불꽃이란 뜻이다. 네윈(Ne Win)도 개명한 이름이다. 빛나는 태양이라는 뜻이다. 불꽃과 태양, 욱일승천기에서 영감을 받은 이름들이다.
1940년 8월 14일이었다. 랭군에서 밀항선을 탄 청년이 중국의 샤먼에 내린다. 1930년대 양곤 대학 학생 운동의 지도자였다. 영국의 식민 경찰을 피해 도주한 것이다. 난생 처음 경험한 바다 여행으로 지칠 대로 지쳤다. 막상 중국 땅에 내렸으나 돈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허송세월 끝에 중국공산당 소식을 접한다. 한때는 그도 버마공산당에 가담한 적이 있다. 마침내 출구가 보이는 듯했다. 동아시아의 해방구, 옌안으로 가고자 했다.
우연한 운명이 그를 낚아챈다. 옌안이 아니라 도쿄로 가게 되었다. 중국이 아니라 일본, 공산주의가 아니라 군국주의에 기울게 되었다. 대일본제국의 한 장교가 그를 발탁한 것이다. 타이베이를 거쳐 도쿄에 이르렀다. 당시 도쿄는 제국일본의 수도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아 공영권의 '皇都(황도)'였다. 마침 나치 독일과 조인식을 마친 시점이었다. 축하 행사가 한창이었다. 욱일승천기와 나치 깃발이 붉은 물결을 이루었다. 청년은 압도당했다. 신세계의 서막을 목도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대어를 낚은 것이다. 장래가 촉망받던 미얀마의 청년 지도자를 도쿄까지 끌어 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주도면밀한 지도 아래 청년은 '아웅산 장군'으로 성장했다. 독일과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염원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당, 하나의 영도, 미니멀한 파시즘은 황홀한 것이었다. 영국식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는 어지럽고 혐오스런 것이었다. 영국은 지는 해고, 일본은 뜨는 해였다. 아웅산은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어 이름도 지었다. 자발적 창씨개명이었다.
사상 개조를 마치고 미얀마에 잠입했다. 비밀 공작을 개시했다. 옛 학생 운동권 동료부터 접촉했다. 세계의 정세를 설명하고 일본의 현재를 설파했다. 호응한 이들을 이끌고 중국의 하이난 섬으로 이동한다. 이미 일본이 점령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이동이 한결 쉬웠다. 스즈키 대령이 선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서른 명의 최정예 집단이었다. '30인의 지사'라고도 한다. 6개월간 지옥 훈련이 시작되었다. 일장기에 경례하고, 일본 군가를 부르고, 일본식 제식 훈련을 받았다. 스즈키의 훈시도 이어졌다. 아시아의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인주의-자유주의-자본주의를 박멸하자고 선동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유럽인을 죽였는가도 자랑스레 떠벌렸다. 시베리아 전투에서는 러시아 여성과 아이의 목을 일본도로 베어버렸다고 했다. 영국 식민지 출신의 신청년들은 감동하고 감격했다. 감화되었다. 그럼에도 훈련은 너무 고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포기하려 했다. 이들을 격려하며 무리를 이끈 이가 아웅산과 네윈이다. 두 사람은 별도의 특별 훈련까지 소화했다. 둘은 30명이 아니라 3000만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훗날 미얀마를 지배하는 '선군 정치'가 그곳에서 그렇게 잉태되었다.
1941년 11월. 이들은 진주만 공습 한 달 전에 방콕으로 이동했다. 하와이를 미국에서 해방시키는 작전과 동시에 동남아시아 또한 유럽에서 해방시킬 작정이었다. 버마독립의용군이 정식으로 닻을 올렸다.
이번에는 스즈키 대령도 미얀마식 이름을 갖기로 했다. 모교(Mogyo)라고 지었다. 벼락이라는 뜻이다. 벼락이 되어 영국의 우산을 박살내자고 했다. 미얀마 저잣거리에서는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모교가 미얀마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민동(Mindon)의 장남 밍군(Mingun) 왕자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자 만달레이를 떠나 사이공으로 탈출했다.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도쿄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얀마와 같은 불교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힘을 빌려 기독교 국가를 몰아내고자 했다. 마침내 그가 '영국령 버마'를 타파하고 '미얀마'를 복원하기 위하여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뜬소문이고 괴담이다. 스즈키와 아웅산이 합작하여 조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이야 어떠하든 불꽃과 태양, 그리고 벼락의 등장에 미얀마 인들은 환호했다. 그들이 56년 영국의 통치를 분쇄시켰다.
1943년 8월 1일, 독립 행사가 열렸다. 아웅산은 버마군의 수장이 되었다. '하나의 피, 하나의 소리, 하나의 사명'이 군대의 모토였다. 지금까지도 미얀마 군부의 슬로건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이난 섬에서 훈련된 그 30명의 지사들이 해방 이후 미얀마 정치를 통솔했기 때문이다.
물론 독립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1931년 만주국과 유사한 괴뢰국이었다. 그럼에도 효과는 대단했다. 동남아시아는 대만, 조선, 만주와는 달리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반세기 이상 경험한 곳이다. 전혀 다른 문화와 가치를 신봉하는 외세의 억압과 착취를 오래 겪었다. 그래서 비록 허울일망정 독립의 감각적 경험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들의 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경례할 수 있었다.
1945년 말, 영국은 스즈키를 BC급 전범으로 기소하여 미얀마로 연행했다. 하지만 그를 석방시켜 준 이가 아웅산이다. 네윈은 집권 시절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남기관 인사들과 재회했다. 그들과 해후할 때는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의 옛 시절로 돌아갔다. 일본어로 대화하며 추억에 잠기기를 즐겼다.
가끔은 1962년 쿠데타와 군사 독재를 維新(유신)에 빗대기도 했다. 스즈키 대령은 1981년, 미얀마 독립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국가의 최고 영예인 아웅산 훈장을 받는다. 대동아의 후일담은 제법 길다.
제국의 종언, 내전의 기원
말이 영국군이었지 그 다수를 점한 것은 인도인들이었다. 인도 용병들이 미얀마를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북진하면서 '버마군'의 규모는 커져갔다. 곳곳에 있는 민족주의자들을 충원해 갔다.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겠다는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버마 족 군대였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영국군에서 인도인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카렌 족이었다. 전형적인 분리 통치였다. 다수 민족인 버마 족은 군대와 경찰에서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외부에서 온 인도인과 산간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들을 무장시켜 미얀마 통치의 헌병으로 삼았던 것이다. 즉, '버마독립군'의 진격으로 카렌 족의 무장을 해제시켜 간 꼴이다.
카렌 족은 영국인 장교와 인도인 병사를 따라서 아삼으로 철수하지 않았다. 고산 지대로 돌아가 가족들을 지키기로 했다. 버마 족으로부터 카렌 족을 수호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있었다. 램프 속의 지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아삼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은 대반격에 나섰다. '국제연합'군이었다. 이라크에 있던 사단을 인도로 옮겨왔다. 이집트에 있던 2개 사단도 이동시켰다. 유라시아의 서부에 있던 대영제국 군대가 유라시아의 동부 전선으로 결집한 것이다. 여기에 장제스의 국민당도 2개 사단을 파견했다. 미국은 공군을 지원했다.
1944년 3월, 동남아시아 최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나아가 유럽과 아시아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차대한 전쟁이었다. 대일본제국은 임팔을 통해 아삼으로 진격하려 했고, 아삼에서 출발한 대영제국은 임팔로 향했다. 영국이 투입한 병력은 50만이었다. 5만 대의 탱크에 인도의 코끼리까지 싹쓸이하여 투입했다. 이에 맞선 일본(과 버마독립군 및 일본에 동조했던 인도국민군)은 20만을 헤아렸다. 임팔 전투는 양측의 사생결단 총력전이었다.
총성이 그치고 포섬이 멈추었을 때, 일본군의 절반에 가까운 8만이 전사했다. 연합군도 2만이 희생되었다.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제 일본이 퇴각했다. 영국의 미얀마 재점령이 시작되었다. 일본도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만달레이 성을 보루로 삼았다. 만달레이 일대에서 두 제국이 대치했다.
대일본제국과 대영제국의 전선이 미얀마를 절반으로 갈랐다. 유럽의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을 합한 것보다 더 거대한 전선이었다. 만달레이 성에서 격전이 일어났다. 미얀마 마지막 왕조의 찬란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던 장소가 화염에 휩싸였다. 영국이 재탈환한 만달레이는 '식민지 근대성'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잿더미였다. 초토화되었다.
이제는 랭군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영국은 병사를 충원했다. 카렌 족을 재등용했다. 카친 족도 동원했다. 다급한 김에 자치권을 약속했다. 독립까지도 운운되었다. 버마 족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을 선택한 것이었다. 카렌 족과 카친 족은 버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영국에 의지한 꼴이었다. 동서 양대 제국의 충돌 이면에서 종족 간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것이다.
버마 족은 식민 모국 영국에 협조하는 카렌 족과 카친 족을 즉결 처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카렌 족이 운영하는 교회와 고아원에도 불을 질렀다. 그러면 카렌 족도 버마 족 마을을 습격하여 보복을 개시했다. 정글에서는 카친 족의 활약이 돋보였다. 다리와 철도를 폭발시켜 일본의 보급로를 파괴하고 통신을 방해했다. 일본군을 흉내 내어 목을 벤 숫자가 5000을 헤아렸다.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버마 족이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 대일본제국은 3년 천하로 붕괴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영제국의 복귀를 원하지는 않았다. 유라시아의 동과 서 끝자락에 자리한 양대 제국이 서로가 서로를 소진시키며 제국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명료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가 불투명했다. 버마 족과 카렌 족, 카친 족 모두가 무장하고 있었다. '독립'에 대한 구상도 저마다 달리했다.
1945년 8월 신생 버마 군대가 생겨났다. 아웅산과 네윈이 이끄는 버마 족들은 일본이 훈련시켰다. 반대편에는 영국이 훈련시킨 카렌 족과 카친 족이 있었다. 직전까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이들이 절반씩을 차지했다. 한 지붕 두 가족은 출발부터 위태로웠다. 일사분란 해야 할 군 조직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세계 최장기의 미얀마 내전이 이미 격발되고 있었다.
어떤 광복군의 후세
영국에 의지해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것은 카렌 족과 카친 족만이 아니었다. 충칭으로 천도한 중화민국도 영-미와 연합하여 일본을 대륙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여기에 조선인들도 가세했다. 충칭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임팔 전투에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분리 통치와 以夷制夷(이이제이)를 가동시킬 수 있었다. 카렌 족-카친 족을 통하여 버마 족을 상대했듯이, 일본과의 전쟁에는 조선인을 활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는 어학 능력이 요긴했다. 일본군의 노획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대일 선전전을 수행하는데 적임자였다. 이 업무에 최종 선발된 이가 9명이다. 정글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학습 능력을 겸비한 우수한 인력이었다.
이들이 콜카타로 이동한 것이 1943년 8월이다. 그리고 델리로 이동해서 문서 번역과 전단 작성 방법을 배웠다. 장소는 영국군이 주둔하던 레드 포트(Red Fort)였다. 무굴제국의 황궁을 영국군이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이들을 훈련시킨 사람은 월리엄 선교사였다. 조선말로 강의했다.
그는 충청남도 공주에서 30년 넘게 선교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조선에서 강제 추방되어 인도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 3년 후 델리에서 대영제국의 미얀마 재탈환에 투입될 한국광복군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도 광복군과 더불어 조선반도로 돌아가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일군 교회와 학교가 공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9명의 광복군은 당시에 이미 충칭과 쿤밍, 콜카타와 치타공, 만달레이와 랭군을 넘나들었다. 오늘날 'BCIM(방글라데시, 중국, 인도, 미얀마)'으로 기획되고 있는 지역을 앞서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도둑처럼 해방을 맞은 조국은 분단국이 되었다. 그리고 곧 통일 전쟁이 발발했다. 그 중 한 분은 국군으로써 인민군과 맞섰다. 중국국민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뜻을 맞추었던 이들과 대결했다.
15년 후에는 동남아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도 또 다른 내전이 한창이었다. 남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을 통솔하는 고위 간부가 된 것이다. 전장은 시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제법 큰돈을 모았다. 돌아와서는 군복을 벗었다. 알짜배기 중견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세계화 물결을 타고 재차 동남아시아로 진출했다.
나를 임팔 전투의 현장으로 인솔해준 분이 바로 그 광복군의 외손자였다. 그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미얀마를 잇는 한국인 교민지 <인도차이나>를 발행하고 있다. 월간 정보지로 벌써 50권을 넘게 발행했다. 그 독특한 한인 잡지에 동남아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글을 연재하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한국인들의 '아류 제국주의'를 나름으로 교정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럼으로써 외할아버지가 20세기에 지은 업(카르마)을 풀어내고 싶다고 하셨다. 미얀마인들 만큼이나 그도 불심이 두터운 분이었다.
임팔 전선에 투입된 광복군 얘기도 그 잡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실로 제2차 세계 대전의 내막은 복잡하고 다단했다. 동유라시아 전선은 더더욱 그러했다. 일본을 편들었던 아웅산과 네윈의 무덤에 침을 뱉을 수 있을 것인가. 미얀마 독립의 반대편에 섰던 한국광복군을 나무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베트남 전쟁까지 참여했던 이의 운명은 무어란 말인가.
도저히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아시아의 냉전 또한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다툼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양분법이야말로 두터웠던 역사를 말소해버리는 이데올로기이자 프레임이다. 그래서는 동아시아의 대분단 체제도, 남아시아의 대분할 체제도 제대로 살필 수가 없다.
여전히 20세기는 올바른 이름을 갖지 못했다. 다음에는 독립(1945년)과 독재(1962년) 사이에 자리했던 미얀마의 '가지 못한 길', 해방 공간으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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