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러한 대북 압박 수위가 단순히 북한의 비핵화 달성을 위한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다. 실제 박 대통령은 지난 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북녘 동포들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폭정을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북한의 '레짐 체인지'를 언급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과 제재로 북한 정권 붕괴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이는 너무 순진한, '나이브'한 생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압박을 한다고 북한의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 전 장관은 "폭동이 일어나서 김정은 체제가 몰락했다고 치자. 그럴 경우 더 강력한 무장력을 장악한 쪽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서 "새로운 권력은 군인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자기 권력과 집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적인 긴장을 높일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핵과 미사일 실험 횟수를 늘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정권을 교체하는 '레짐 체인지'는 어떤 권력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며 "김정은이 쫓겨난다고 해서 저쪽에 우리말을 잘 듣는 착한 정권이 들어선다는 보장이 있나"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북한이 네 차례나 핵실험을 감행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완성을 위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는 등 한반도 긴장을 높이고 있어, 과연 향후 북한을 믿고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냐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은 "북한을 신뢰하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풀어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북한에 관여, 즉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를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하면 북한이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도 있다"면서 "관여를 통해 남한과 국제사회에 대한 의존성을 키워야 북한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북한의 진정한 변화를 이루려면 정권을 바꾸는 '레짐 체인지'가 아닌, 북한 사회 전반을 바꾸는 '시스템 체인지'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에 관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채, 봉쇄를 통해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겠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희망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일갈했다.
인터뷰는 지난 29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2016년이 '야만의 한 해'가 될 것 같았는데, 한반도에서는 정말 야만적인 말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제가 '프레시안 뷰'에서 '2016년, 야만의 해가 되려는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남한은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제거하는 이른바 '참수작전'을 공공연히 언급하면서 실제 훈련을 하기도 했고, 북한은 청와대를 섬멸하겠다며 타격 대상으로 삼고 있는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막말' 행진을 보면서, 남북이 처한 각자의 내부적인 정치 상황 때문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남한은 총선을, 북한은 36년 만에 당 대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북이 너무 강하게 나가면서 남북 화해나 협력 기조가 끝나버리고 앞으로 한반도를 유사 전쟁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적대적 공존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정세현 : 올해 초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때만 해도 박근혜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일정 부분 북풍 몰이를 하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라는 말이 있듯이 북한에서 반응을 보이니까 이게 점점 고조돼서 이제는 피차 돌이킬 수 없는 대결적인 상황으로 가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지난 2월 10일 개성공단이 사실상 폐쇄되면서, '이쯤되면 총선이 끝나고 나서 다시 없었던 일로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상 남북관계 파탄의 '불가역적' 조치를 취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은 16일 국회 연설에서 사실상의 북한 체제 붕괴로 읽힐 수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는 3월 한미 연합 군사 훈련 당시, 실제 기동훈련이 아닌 시뮬레이션 훈련이었지만, 키리졸브 연습에서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제거한다는 이른바 '참수작전'을 점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북한은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안 그래도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를 붕괴시킨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일종의 피해의식인데, 참수작전까지 거론됐으니 대남 적개심에 불타게 됐죠. 북한은 여기에 발끈하고 새로 개발된 대구경 방사포로 청와대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과시는 남한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당 대회를 앞두고 주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핵 보유국'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체재 결속'을 위해 이같은 행태를 보인 겁니다. 김정은이 김일성, 김정일 못지않은 강력한 지도자라는 점, 북한 말로 이른바 '령도력'(領導力, 영도력)이 할아버지나 아버지 못지않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죠.
여기에 북한은 군사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공개해버렸습니다. 일부에서는 김정은이 나이가 어려서 사리분별이 잘 안 돼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이것도 대내용이라고 분석됩니다. 그런데 이게 또 박근혜 대통령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을 확보했다는 주장을 보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됐다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굳혔을 겁니다.
프레시안 : 남한의 총선, 북한의 당 대회라는 남북한의 정치적인 이벤트들이 끝나도 남북관계는 이런 상태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을까요?
정세현 :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때까지는 이러한 페이스로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설사 북한이 당 대회가 끝나고 핵과 미사일 능력에 대해 과시하지 않으면서 남북관계를 관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보려고 나온다고 할지라도, 박 대통령이 여기에 호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개성공단 폐쇄가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단이라도 그대로 운영했다면 이것 때문에라도 남북 대화나 관계 개선의 모멘텀을 만들어갈 수 있었는데 끊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대통령 측근이 개성공단과 남북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면 임기 중에 남북관계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측근이라는 사람이 개성공단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우리가 북쪽의 버릇을 고칠 수 있는 압박을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개성공단에 우리 국민이 있어서 마치 북한에 인질로 잡혀있는 것 같았는데, 개성공단을 폐쇄하면서 마치 이들을 구출해 온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건데요. 청와대 주변의 정서가 이렇다면 대통령 임기 내에 남북관계 개선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성향도 있을 겁니다. 그동안 철저한 대북 봉쇄, 적대 일변도로 나갔던 많은 대통령이 있었지만 박 대통령이 이 중에서도 가장 강경해 보입니다.
여기에 북한의 대남 업무를 총괄하는 당 비서도 문제입니다. 김영철 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은 사실 '인민군 정찰총국장' 이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 인물을 대남 총괄 비서 자리에 앉혔다는 김정은의 의도는 결국 남한에 대해 더 세게 나가겠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종의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에 대해 강대 강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김정은 쫓아내자? 더 고약한 정권 들어설 수도 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 대통령이나 측근들이 개성공단 폐쇄를 통해 북한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것, 이게 가능한 겁니까? 박 대통령은 핵안보정상회의에 가서도 핵 안보 차원에서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단합된 노력을 촉구한다는데, 이것도 결국 대북 압박 드라이브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건데요.
정세현 : 문제는 압박을 한다고 해서 북한 체제 붕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면 이건 너무 '나이브'(naive)한 생각입니다.
이미 유엔 대북제재도 일정 부분 동력을 잃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쪽에서는 제재의 구멍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 동북지방의 제2의 항만도시인 랴오닝(遼寧)성의 잉커우(營口)항에 북한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겠다는 보도도 나오긴 했습니다만, 이건 중국이 미국의 요청에 의해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이른바 '책임대국'으로서 일종의 퍼포먼스에 불과합니다. '보여주기'를 위한 것이지요.
중국 단둥(丹东)과 북한 신의주, 중국 지안(集安)과 북한 만포, 중국 훈춘(琿春)과 북한 원정 등 북한과 중국의 주요 접경지역은 국제적으로 관심이 높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들은 중국 당국에서도 어느 정도 통제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말고도 북한과 중국 사이에 교류가 있는 곳은 많습니다. 중강과 임강 사이에도 다리가 있고 세관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외국 언론도 이러한 곳은 잘 취재하지 않는데, 요즘 조선족들과 끈이 닿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한과 거래하는 조선족 사람들이 거래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답니다. 특별 지시가 내려온 것도 없고, 하던 대로 장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퍼포먼스인지 모르겠지만 지난 28일 <노동신문>에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고 있다고 밝히긴 했습니다. 대북제재가 슬슬 효과를 발휘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섣부른 판단으로 보입니다. 제재가 잘되고 정말 효과가 있다면, 미국 대통령이 굳이 법률보다 더 가혹한 내용을 담은 북한 제재 행정명령까지 내렸겠습니까? 이 자체가 유엔 대북제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또 이 행정명령은 대북제재가 중국과 러시아 쪽에서 느슨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중국과 러시아를 제재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대북제재 결의안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고통을 느껴서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올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나이브'한 겁니다. 차라리 '마인드 컨트롤'을 해서 붕괴시킨다고 하지 그럽니까?
일부에서는 제재를 통해 북한의 경제난이 가중되면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가 바로 통일이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 역시 아주 천진난만한 생각입니다.
폭동이 일어나서 김정은 체제가 몰락했다고 칩시다. 그럴 경우 더 강력한 무장력을 장악한 쪽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권력을 확고하게 자기 쪽으로 만들기 위해서 중국과 손을 잡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폭동이 일어나도 중국의 지원을 받는 식이 돼버립니다. 물론 중국은 드러내놓고 북한의 새로운 권력자를 지원해주지는 않을 겁니다. 잘못하면 미군의 개입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게 새로운 권력을 지원할 겁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면 결국 북한의 새로운 권력은 군인이 장악한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1961년, 1980년 등 권력 공백 상태에서는 군인들이 장악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북한에 군사 정권이 들어서게 되면 지금보다 북한을 관리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평양에 들어선 친(親)중국 정권이 중국과 보조를 맞춰서 남북관계를 풀어가지 않겠느냐는 희망 섞인 관측을 하는 경우도 있던데, 이것 역시 비현실적입니다.
군인이 장악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이들은 자기 권력과 집권의 정당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군사적인 긴장을 높일 것입니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부각시키고 핵과 미사일 실험 횟수를 늘릴 수도 있죠. 결국 제재와 압박으로 체제가 변화되고, 그렇게 해서 핵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일부에서는 4번이나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을 어떻게 믿고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합니다.
정세현 :북한을 신뢰하기 때문에 남북관계를 유연하게 풀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북한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북한에 관여, 즉 '인게이지먼트'(engagement) 하자는 겁니다.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하면 북한이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 나쁜 일을 더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1975년 서유럽 국가들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방을 유도했던 '헬싱키 프로세스'를 보더라도 관여 정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동유럽과 소련에 대한 경제지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교류협력을 하면서 서구에 대한 동유럽의 의존성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게 커지면서 서구는 동유럽의 인권 문제를 걸고 들어갔습니다.
관여를 통해 의존성을 키워야만 변화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상대한테 어떻게 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의존성이 생기면 관여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중심부 쪽으로 상대가 끌려오게 돼있습니다. 지원을 받고 싶으면, 의존하고 있는 상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유럽에 대한 의존성이 커진 동유럽은 인권 상황을 개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시스템적인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정권을 교체하는 '레짐 체인지'는 어떤 권력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더 고약한 레짐이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김정은이 쫓겨난다고 해서 저쪽에 우리말을 잘 듣는 착한 정권이 들어선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이러한 상황을 막고 진정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마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장기적인 과정을 통한 '시스템 체인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장기적인 전략도 없이, 그나마 관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채 봉쇄를 통해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겠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매우 비현실적인 '희망적 사고'의 전형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제재와 압박으로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한 6자회담도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정세현 : 가능성이 대단히 낮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변수는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입니다. 민주당 후보 중에 누군가가 되더라도, 오바마 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에 대한 반성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8년 중 6년 동안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그 기미를 보인 것이 지난해 12월 미국과 북한이 비밀접촉을 했다는 겁니다. 그 전에 오바마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야만 접촉에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변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줄 때까지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 하에 기다리겠다면서 회담에도 나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정책을 지난해 연말에 잠깐 접었다고 봅니다.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협의하자, 단 순서는 비핵화부터라는 입장이죠. 그런데 북한이 이건 곤란하다면서,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에 나온 대로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해서 비핵화 논의가 얼마나 진행되느냐에 따라 평화협정 논의도 진전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자고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한의 협상 정책 또는 전략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한 번 내놓은 사안은 관철될 때까지 바꾸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 당시 미국은 북한에 "최소한 일관성은 있다"고 평가했겠습니까?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북한과 비공개 협상을 진행한 미국은, "북한은 한 번 나눈 이야기는 끝까지 한다. 예측 가능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쨌든 미국이 비핵화-평화협정까지 왔기 때문에 다음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 빠르면 북핵 정책이 내년 4월 정도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앞으로 1년 후에 미국이 방향 전환을 하려고 할 때 박근혜 정부가 과연 미국을 따라가 줄 수 있겠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내년 4월 이후에는 남한이 대선 국면에 돌입합니다. 자연스럽게 청와대의 힘도 빠질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미국에 끌려갈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입장을 확 바꿔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거'를 그렇게 중시하는 박 대통령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결국 북핵문제 역시 내년 말까지 정체 상태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한, 5차 핵실험 감행하나
프레시안 : 북한이 4월에 추가적인 핵 실험이나 장거리 로켓을 발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는데요. 실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정세현 : 4월 15일 김일성 생일 전후부터 5월 초 당 대회 이전, 이 기간 동안에 북한이 핵 실험을 한 번 더 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제재가 동력을 잃어버리고, 중국이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묶어서 협상하자면서 6자회담 열자고 하고, 여기에 미국이 못 이기는 척 하고 따라와 준다면 북한이 핵 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자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정책 때문이든지, 아니면 한국의 대북 강경 몰이 때문에 미국도 어쩔 수 없이 중국의 정책에 협조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북한은 핵이든 미사일이든 시험을 해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의 미사일이 자신들의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이 인정하든 말든, 북한은 자신들이 '핵 강대국'이 됐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북한은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실험 강행을 통해 당 대회 성공을 목표로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일 수도 있습니다.
프레시안 :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해 1월 9일 북한이 미국에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중단하면 핵 실험을 중단하겠다는 제안을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입구로 삼았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세현 : 올해 4월 말까지 예정돼있는 훈련은 이미 끝났고, 내년을 바라보고 해야 하는데, 그런식의 해결을 하려면 올해 가을쯤부터 남북관계가 상당히 좋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중단한 적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1992년 예정됐던 '팀 스피릿' 훈련이었습니다. 당시 1991년으로 넘어오면서 남북 간 접촉에 굉장히 빠른 속도를 냈고, 결국 그해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습니다. 또 미국의 요청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만들어냈습니다. 적극적으로 북한이 협조해주니까 북한이 그렇게 간절하게 요구하는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지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결국 미국의 허락을 받고 훈련을 중지한 겁니다.
미국이 한미관계를 고려해서 훈련 중지에 동의해준 것인데, 미국이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북관계가 깊어지는 조건에서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훈련 중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규모를 줄인다든가, 기동 훈련을 하지 않고 시뮬레이션인 '키리졸브' 정도에서 끝난다든가 하는 상황이 생기려면 남북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외부적인 정세를 놓고 보면 지금과 1992년이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중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이 북한을 압박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해에서 미국의 전투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중국에게도 군사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미국이 전략 폭격기인 B-2와 B-52를 한반도에 띄우는 것은 단순히 북한 때문만은 아닙니다. 중국 견제가 숨어있습니다. 그런데도 청와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역시 박 대통령이 강하게 밀고 나가시니까 미국이 이렇게 받쳐주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100% 북한 대응 용도는 아닙니다. 미국은 제국입니다. 유라시아 전체 판을 보고 움직입니다.
'남북관계 개선'이 '경제민주화'다
프레시안 : 총선이 이제 보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남북관계는 어느 때보다 긴장이 고조돼 있는데도, 선거 의제로조차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남북관계가 경제와도 상당히 깊게 관련이 있는데도 말이죠.
정세현 : 경제민주화가 야당의 총선 전략이라고 하는데 남북관계가 험악해져서 긴장이 높아지면 전체 예산에서 국방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집니다. 그러면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서민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남북 간 안그래도 긴장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대북 적개심 때문에 말을 세게 하고, 북한도 여기에 대응하는 식이 돼버리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대비 태세를 높여야 합니다. 이는 한미 동맹 강화로 이어지는데, 한미 동맹은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한미 동맹의 핵심은 무기입니다. 한미 동맹을 강화해서 우리 대비 태세를 높이려면 미국의 무기를 더 비싼걸로 사들여야 합니다. 명분도 좋습니다. 북한으로부터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돈을 지출하는데 반대도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기도 가전제품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무기가 나오면 예전 무기는 고철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북한을 막기 위해 자꾸 무기를 사들이는 데 돈을 쓰면, 복지라거나 교육, 보육 등에 쓸 수 있는 자금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제가 성장한다면 복지나 교육, 보육 등에 쓰는 돈을 줄이지 않고도 새로운 무기를 많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경제는 연간 3% 성장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산 규모가 늘어나기 힘든 상황에서 국방 예산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겁니다.
경제민주화의 핵심이 재벌 중심의 경제에서 서민 중심의 경제로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부의 '대북 강경 몰이'를 견제하는 세력이 없다면, 서민경제를 살릴 수 있는 근본 재원이 자꾸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면 경제민주화 달성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부분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금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이른바 대북정책에서 '우클릭'을 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셈입니다. 대북정책에서의 우클릭은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 몰이를 도와주는 것이고, 결국 경제민주화의 핵심인 '서민경제 향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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