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색깔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4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제30강은 양백지간(兩白之間.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길지(吉地)이면서 ‘선비의 고을’인 경상북도 영주(榮州)를 찾아갑니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답게 400여년을 세거(世居)해온 집성촌(集性村)과 그곳에 남겨진 오래된 고택, 정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번 고을학교는 산줄기, 물줄기에 자연스럽게 안겨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과 오래된 집‘들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내성천 가의 무섬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와 더불어 낙동강변의 물돌이동으로 유명하며 ‘4대강 개발’을 반대하며 내성천을 살리고자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율스님이 터를 잡고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30강은 2016년 4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영주IC-화기리(인동장씨종택/장말손유물각)-무섬마을(해우당/만죽재/까치구멍집)-이산면(괴헌고택/두암고택)-점심식사 겸 뒤풀이-영주시(제민루/삼판서고택/영주향교)-순흥면(소수박물관/소수서원)-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0강 답사지인 <영주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양백지간(兩白之間)의 살기 좋은 곳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소백산에 이르는 산줄기를 양백지간(兩白之間)이라 합니다. 그 북쪽은 산이 험준하고 골이 좁아 사람이 살 만한 터전이 별로 없는데 반해 남쪽은 산들이 유순하고 수려하며 유장하게 뻗어있고 골 사이로 널찍한 들이 곳곳에 펼쳐있어, 사람들이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고을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으뜸이 영주고을입니다.
특히 소백산 아래 첫 동네인 풍기 땅은 <정감록(鄭鑑錄)>에 이르기를, 난세에 환란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 중에서 최고의 복지(福地)이며 천재지변도 이곳을 피해가기 때문에 흉년이 없는 풍요로운 땅으로 꼽았습니다. 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소백산 비로봉 아래 펼쳐진 금선계곡에 찾아들어 ‘정감록촌’과 ‘삼포마을’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영주는 경북의 최북단 고을로서 동쪽으로는 봉화군, 서쪽으로는 충북 단양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예천군,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양백지간의 남쪽에 있는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영주의 물줄기는 봉황산과 북부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내성천이 봉화군을 관류하여 문수면 수도리(무섬마을)에 이르고,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연화봉과 죽령계곡에서 발원한 남원천,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고현동에서 합류해 서천을 이루어 영주시를 감돌아 낙동강으로 흘러듭니다.
영주는 고구려의 내기군과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으나 AD 100년 경 신라의 파사왕이 점령하여 신라로 복속시켜 급산군(岌山郡)으로 개칭하고 풍기 지역에 기목진(基木鎭)을 설치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기목진을 기주(基州)로, 급산군을 흥주(興州)로 하였다가 1348년 순흥(順興)을 부로 승격시켰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문종의 안태지로 은풍, 기천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풍기로 개칭하고 1413년 순흥을 도호부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러나 1457년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순흥도호부는 폐부되어 영천군, 풍기군, 봉화현에 분리 편입되었다가 1683년 순흥도호부가 부활되었으며 고종 때는 안동부의 관할이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합쳐 영주군으로 바뀌었습니다. 그후 1980년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고 1995년 영주시, 영풍군이 통합되었습니다.
순흥(順興), 풍기(豊基), 영주(榮州)가 중심지
이러한 연고로 영주에는 순흥(順興), 풍기(豊基), 영주(榮州)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순흥의 읍치구역은 지금의 면사무소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폐부되면서 그 자취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순흥향교(順興鄕校)는 창건 시기를 알 수 없으며 원래 순흥부(順興府) 북쪽 금성(金城)에 있었으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고을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683년(숙종9)에 다시 세워졌으며, 1750년(영조26) 석교리로, 1790년(정조14)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으며 1971년에 중수하고 1975년에 누각과 단청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와 서무, 동재, 문루인 영귀루, 삼문(三門), 협문(夾門), 주사(厨舍) 등이 남아있고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입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의 위패가 동무에,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서무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한편 순흥에는 사육신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는데, 그는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향중인사들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재차 꾀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을 비롯한 주역 21명과 순흥고을 백성 400여명이 몰살당하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되어 고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후 1719년(숙종47) 부사 이명희가 왕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신단을 설치하였고 1742년(영조18)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하고 1980년에 재청과 주사를 단소의 전면에 건립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단소는 품자(品字)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상단은 금성대군, 좌단은 이보흠, 우단은 순절의사의 단을 설치하였고 단 좌측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풍기향교(豊基鄕校)는 본래 임실 서쪽 골짜기에 있었는데,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가 1692년(숙종18) 옛 터로 이건하였고, 1735년 (영조11) 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사당영역이 남향하고 있으며 그 우측에는 명륜당과 관리사가 있고, 명륜당 앞에 동재, 서재와 양심루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습니다.
영주향교(榮州鄕校)는 영주여고 안에 있는데 <영주군지>에는 1368년(공민왕17)에 당시 영주지군(榮州知郡)인 하륜(河崙)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33년(세종15) 군수 반저(潘渚)가 중수하였고 1577년(선조10)에 군수 이희득(李希得)이 다시 중수하였는데, 하륜은 영주향교를 세워 흥학(興學)을 도모하고, 제민루(濟民樓)를 세우는 등 주민을 제도하는데 힘써 후일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승진하였습니다.
1970년 명륜당을 중수하고 1975년 대성전과 명륜당의 단청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과 동무, 서무, 동재, 서재, 그리고 존현당(尊賢堂), 횡루, 전사청(典祀廳), 전곡청 등이 남아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6현과 동국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제민루(濟民樓)는 의약소(醫藥所)로서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자생한 약재를 채취하여 저장하였다가 조정의 태의(太醫)에게 공납(貢納)하였던 곳이며, 고을사람들도 질병을 치료하였던 곳으로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모여 시가(詩歌)를 읊기도 하고 경로소(敬老所)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원래는 구성산 자락에 1371년(공민왕20) 하륜(河崙)이 군수로 부임하여 학교를 세우고 누각을 세웠던 것을 1433년(세종15) 군수 반저(潘渚)가 하륜의 뜻을 이어 옛 터에 동재(東齋)와 남루(南樓)를 지었으며 1467년(세종13)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보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1598년(선조31) 군수 이윤상(李允商)이 다시 의국(醫局)을 지었으나 1961년 대홍수로 붕괴되어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습니다.
삼판서고택의 사연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은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세 명의 판서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삼봉 정도전의 생가로도 전해집니다. 세 명의 판서는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정도전의 부친 정운경(鄭云敬), 정운경의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 황유정의 외손자인 이조판서 김담(金淡)이며 그 후로는 김담의 후손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김담은 조선 최고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로 장영실(蔣英實)의 사촌여동생과 결혼했는데 노비 출신인 장영실이 과학적인 식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김담의 역할이 컸던 걸로 추측되며,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외편은 중국의 베이징이 아닌 한양을 기준으로 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 역법(曆法)으로 그 의미가 큽니다.
또한 이곳은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하여 사헌부 지평 황전, 집현전 교리 김중 등 수많은 학자와 명신들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 고택입니다. 특히 정도전은 몇 번의 유배에서 풀려날 때마다 아버지가 머물렀던 이곳 고택에 머물며 심신을 달랬다고 하는데 고택의 마루 위 회벽에는 삼봉이 조선 개국 직전에 정몽주 등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나주 유배 뒤 고향으로 이배되어 내려와 있을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 한 수가 걸려 있습니다.
한 그루 배꽃은 눈부시게 밝은데 (一樹梨花照眼明)
지저귀는 산새는 봄볕을 희롱하네. (數聲啼鳥弄新晴)
은둔하는 자 홀로 앉아 무심하니 (幽人獨坐心無事)
뜰에 자란 풀만 한가로이 바라보네. (閒看庭除草自生)
영주는 선비의 고을답게 사립교육기관인 서원과 서당도 많았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1543년(중종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서원의 효시(嚆矢)이자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입니다. 건립 당시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으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당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왕명을 받고 서원의 명칭을 정할 때 지은 이름으로, 명종이 직접 '소수서원'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下賜)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고려 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의 연고지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었던 숙수사(宿水寺) 터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칭하였고 그후 안축(安軸) 선생과 안보(安輔) 선생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오계서원(汚溪書院)은 1579년(선조3)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이 학문 연마와 심신 수련을 위해 건립한 오계정사((汚溪精舍)의 후신입니다. 1665년(현종6) 도존사(道存祠)를 건립하고 간재의 위패를 봉안한 후 1692년 오계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이 침수로 피해를 입자 1711년(숙종37)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724년(경종4)에 그의 장자인 이시(李蒔)를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서원 안에는 사당인 도존사(道存祠)와 강당인 명륜당, 동재인 관성재(觀省齋), 서재인 험위료(驗爲僚), 정문인 입도문(入道門)이 있고, 서원 밖에는 군자정(君子亭)과 관리사가 있으며, 서원 입구 양쪽 언덕에 연어대(鳶漁臺)와 활발대(活潑臺)가 있습니다.
간재 이덕홍은 영춘 현감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성호종일등공신(聖扈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었고 퇴계의 수제자로 학문이 뛰어나 퇴계가 죽음을 앞두고 모든 서책을 간재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특히 간재는 퇴계의 명으로 선기옥형(璇璣玉衡-渾天儀)을 제작하여 천리 연구에 활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귀갑선도(龜甲船圖. 거북선 설계도)가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유일한 거북선 원형 설계도이며, 주역과 심학(心學)에 능하여 퇴계학의 종지를 집대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선비의 고을답게 많은 서원과 서당들
이산서원(伊山書院)은 1573년(선조6)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1574년에 ‘이산(伊山)’이라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어 8칸의 이산서당만 남아 있다가 1996년 복원되었습니다.
도림서당(道林書堂)은 두월마을 뒤쪽 서당골에 있으며 1625년(인조3) 박록, 송상헌, 전이헌 등 선현들이 처음 창건하여 도봉산(道峰山) 아래 임고촌(林皐村)에 자리잡았다고 ‘도림(道林)’이라 이름지었고,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1872년 현 위치로 옮겼습니다.
금양정사(錦陽精舍)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학문을 닦고 교육하던 곳입니다. 황준량은 퇴계가 행장(行狀)을 지을 정도로 아끼는 문인이었으며 1540(중종35)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박사, 호조좌랑 겸 춘추관서기관, 성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중종(中宗) 인종(仁宗)의 실록편찬에도 참가하였고, 1866년(고종3)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주에는 400여년 간 세거해 온 집성촌이 여럿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오래된 고택과 정자가 많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고택들은 ‘까치구멍집’과 ‘ㅁ자집’ 형태입니다.
까치구멍집은 경상북도 북부지방 서민가옥의 대표적 형태로, 집안에서 나는 냄새와 연기를 외부로 배출하기 위해 지붕의 용마루 양쪽 합각 부분에 둥근 구멍을 냈는데 그 구명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주로 경북 북부지방의 안동, 영양, 청송, 영덕, 울진, 봉화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일종의 겹집 모양으로 □자형의 집이 축약된 것 같은 폐쇄형 가옥으로, 대문만 닫으면 외적의 침입이나 맹수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막혀도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원래 이름입니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과 영주천(榮州川)이 합수되어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끼고 마을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고, 내 안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톱 위에 마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型)의 길지(吉地)로 꼽힙니다.
무섬마을은 17세기 중반에 반남(潘南)박씨인 박수(朴檖)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으며 이후 영조 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宣城)김씨 김대(金臺)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지금까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현재 약 48가구에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가옥 중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입니다. 그 중에 해우당과 만죽재 등 전통가옥 9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집의 형태가 까치구멍집 또는 ㅁ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우당(海愚堂)은 김대의 셋째 손자인 김영각(金永珏)이 1830년에 건립하여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金樂灃)이 중수한 경북 지방의 전형적인 ㅁ자집입니다. 해우당은 김낙풍의 호이며 그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했던 연고로 고택에 있는 ‘해우당’ 현판과 안채에 있는 '대은정' 현판이 모두 흥선대원군이 쓴 것으로 무섬마을에서 제일 큰 집입니다.
만죽재(晩竹齋)는 반남박씨의 입향조인 박수가 1666년(헌종7)에 지은 집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입니다. 무섬마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죽재의 편액은 박태보(朴泰輔)의 후손이며 고종 때 궁내부대신을 지낸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의 글씨입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지은 □자집인 김위진 가옥, 200여년 전에 반남박씨가 건립하여 선성 김씨가 매입한 김덕진 가옥, 약 200년 전에 건립된 까치구멍집인 김뢰진 가옥, 6칸 까치구멍집의 초기 변형의 예를 보여주는 김규진 가옥, 조선후기에 건립된 9칸 까치구멍집으로 담장 없이 지어진 김정규 가옥, 6칸 까치구멍집의 초기 변형의 예를 보여주는 박천립 가옥, 6칸 까치구멍집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는 박덕우 가옥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집성촌, 무섬마을
무섬마을의 또 하나, 중요한 볼거리는 350여년간 무섬마을과 강 건너를 연결시켜준 외나무다리입니다. 1979년 수도교(水島橋)가 놓이기 전까지 무섬마을의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하였는데 장마철이면 불어난 강물에 다리가 떠내려가기 때문에 매년 새로 다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동장씨는 화기리(花岐里)의 꽃계마을과 금광리(金光里)에 세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었습니다.
화기리 꽃계마을은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 경윤(景胤) 장말손(張末孫)의 현손인 장언상(張彦祥)이 터를 잡고 400여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인동장씨 집성촌을 이룬 곳입니다. 동쪽으로 연화산, 서쪽으로 주마산과 황귀산, 남쪽으로 멀리 학가산의 연봉이 나지막이 늘어서 있고, 마을 앞에는 동서로 길게 펼쳐진 꽃계들과 반구들, 그리고 마을 중앙에 옥계천이 관통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전통마을입니다.
화기리에 있는 장씨종택은 입향조 장언상이 16세기 중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ㅁ자집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독립된 평면 구성이 특이하고 건립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뒤쪽 언덕에는 장말손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장말손 영정, 적개공신 장말손 상훈교서, 장말손 종손가 소장고문서 등이 보존된 유물보호각이 있습니다.
금광리는 단산(壇山)을 배경으로 하여 좌측에 가랑봉, 우측에 불로봉을 거느리며 내성천이 내려다보이는 인동장씨의 또 다른 집성촌으로서 입향조는 사계 장여화(張汝華)입니다. 금광리에 있는 장씨 고택은 사계의 6세손 장태득(張泰得)의 집으로, 그의 손자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증직된 장연구(張衍矩)가 건축하여서 영감댁(令監宅)이라고도 불립니다.
의관댁(醫官宅)은 민간가옥으로는 큰 규모로서 정면 7칸 측면 4칸의 囗자형으로 조선 후기 경북 북부지방의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현 소유주의 증조인 장익문이 고종 연간에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여 가옥의 이름을 ‘의관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만연헌은 장여화의 아들 장용경(張龍慶)이 건립한 정자로 ‘만연헌’은 조여익이 장용경에게 써 준 것입니다. 1738년(영조14)에 증손인 장한공이 지본(紙本)이 더러워지자 판각하여 걸었다고 하며 그후 유실되었던 것을 1957년 후손 장형문이 새로 지은 것입니다.
이산면 우금마을은 약 400년간을 세거한 예안(禮安) 또는 의성(宣城)김씨의 집성촌입니다괴헌고택(槐軒古宅)은 괴헌 김영(金瑩)이 1779년(정조3년) 아버지 덕산공(德山公)으로부터 물려받은 살림집으로 1904년(고종 광무8)에 손자 김복연(金福淵)이 일부를 중수하였고 1972년 수해 때 월은정(月隱亭)이 무너져내려 지금은 편액만 남아있습니다.
고택은 문간채, 정침, 사당채로 구성된 ㅁ자형의 가옥으로, 문간은 솟을대문이며 장고방, 고방 등의 수납공간이 다양합니다. 안방의 피난 다락과 사랑방 다락 뒷벽의 은신처를 둔 것과 사랑방 뒷벽 밖에 장독대를 만든 것은 이집의 특색이며 사당은 동북 귀퉁이에 따로 일곽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습니다.
덕산고택(德山古宅)은 괴헌고택과 접한 대지에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덕산 김경집(金慶集)이 1756년(영조32)에 신축하여 당호를 덕산정(德山亭)이라 하였다가 1779년(정조3)에 고택의 왼쪽에 괴헌공의 살림집을 축조하면서 뒤쪽에 서당을 건립하여 인근의 후학들에게 배움터로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건물의 배치구조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연결하여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민가건축으로서는 드물게 서당까지 잘 갖추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또한 마루를 설치한 곳간과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 동선 등 특징적인 부분이 잘 남아있어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두암고택(斗巖古宅)은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이 18세에 혼인하고 20세에 분가하면서 창건하였다고 하니 153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함집당(咸集堂), 안채, 사랑채, 사당채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김우익은 1612년(광해군4)에 문과에 급제하고 해미현감을 역임한 후에 한성부윤을 지냈습니다.
만간암(晩看庵)은 김우익의 손자인 함집당(咸集堂) 김종호(金宗灝)의 셋째 아들 김동주(金東柱)를 백암(栢巖) 김륵(金玏)의 증손자인 김종부(金宗溥)에게 양자로 보내면서 자주 볼 수 있도록 1676년에 ‘두암고택’ 옆에 지어준 것으로, 그후 가세가 번창하자 김종부의 손자 성균관 생원 김지가 1748년 고쳐지으면서 자신의 호를 따서 당호를 ‘만간암’이라 하였습니다.
곳곳에 정자들도 즐비
영훈정(迎薰亭)은 1468년(세조14)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영접(迎接)과 전송(傳送)을 할 목적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라 하였으며 이후 폐지되었다가 1643년 인조(仁祖21) 군수 신속(申洬)이 다시 세우고, 이황(李滉)이 명명하고 현판(顯板)을 썼으며 일제 강점기 때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보편화되었던 각 가문(家門)의 정자(亭子)와는 달리 관용(官用)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던 점이 특이합니다.
군자정(君子亭)은 오계서원과 이웃하고 있으며 정자 앞에는 군자당(君子塘)이란 연못이 남아 있고 건립연대는 오계서원이 1636년 대홍수로 유실되자 1711년(숙종37)에 현 위치로 이건할 때 함께 건립되었습니다.
심원정(心遠亭)은 금광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사계 장여화(張汝華)가 정자를 건립코자 한석봉에게 현판 글씨를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가 100년 뒤 후손인 진사 간은(艮隱), 처사 금리(錦里)가 선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심원정을 건립하였는데, 금광리(金光里)에서 마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면서 공동체의 회합장소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천운정(天雲亭)은 이조판서를 지낸 백암 김륵(金玏)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1588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김륵은 김담의 4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여 그 공헌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고 1633년(효종4)에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증직받았으며, 1788년(정종12)에 민절(敏節)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만취당(晩翠堂)은 예조좌랑, 충청도도사, 강원도도사, 옥천군수를 역임한 김개국(金盖國)이 건립한 정자입니다. 만취당은 그의 호이며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워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가 되고 1650년(효종1)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습니다.
일우정(逸愚亭)은 우엄(愚广) 전규병(全奎炳)이 1866년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있는 바위에 ‘일우대(逸愚臺)’를 새긴 후 1868년에 정자를 짓고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에게 청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규병은 유주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862년(철종1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습니다.
모은정(慕恩亭)은 영일정씨 정태용이 만년에 서암(西庵)을 건립하여 독서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그후 암자가 무너지자 현손(玄孫)들이 서암 터에 정자를 세워 ‘모은정’이라 편액하였다고 합니다.
야일당(野逸堂)은 김란(金鑾)이 17세기 중엽에 중건한 정자인데, 김란은 병자호란의 굴욕적인 항복에 분연히 세념(世念)을 끊고 초가를 짓고 지내면서 ‘야일당’이라 편액(扁額)하였는데, ‘초야에 묻힌 백성(山野逸民)’이란 뜻으로 그의 호가 되었습니다.
금선정(錦仙亭)은 금선계곡 중간 쯤 물가 절벽 위에 있는데 주변의 경관이 절경이고 정자 아래는 널찍한 반석이 대(臺)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고장의 대표적 유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금선대(錦仙臺)라 하였습니다.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금선대’란 글씨를 바위벽에 새겼으며 이후 황준량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 하였고, 이 계곡을 금선계곡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보온 차림,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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