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정부와 전문가 중심의 에너지 계획 수립 관행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기존 에너지 패러다임을 바꾸려는 에너지 시나리오에 관심을 두고 탈핵 에너지 전환을 지향하는 대안 계획이 제출되기도 했다. 아직까지 국가 에너지 기조에 큰 변화는 없지만, 에너지 전환에 동참하는 정당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 적극적인 곳은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사회라 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서울, 경기, 충남, 제주 등 광역단체가 정부와 다른 방향에서 지역 에너지 계획을 세우고 에너지 전환 정책을 펼치고 있다. 광주, 대구, 전남도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와 관련 산업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노원구, 순천시, 안산시 등 기초단체에서도 에너지 전환이나 자립 비전을 선포하고 실정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도면 그동안의 에너지 전환 요구가 아래로부터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아직 가야할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국가 에너지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에너지가 소비되는 현장에서 수요가 관리되고 재생 가능 에너지로 공급된다면, 이는 분명 다른 에너지 세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 에너지 전환이 다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많은 경우 민관 거버넌스를 구성 운영하여 전환 노력에 정당성을 얻고 시민들의 수용성을 높이고 있다. 지역 에너지 계획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의견 수렴 절차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늘고 있다. 여기서 에너지 민주주의의 단면을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에 주목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시민이 어디까지 지역 에너지 계획에 참여해봤을까? 에너지 전환의 의지가 있는 연구 기관이 수행하거나, 지역 사회와 공동으로 계획을 수립해 또 다른 전문가주의 작업 관행을 탈피했더라도, 시민은 참여와 동원의 그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결국에는 연구 수행 기관이 결정한 결론을 추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대구시 지역 에너지 계획 수립(2015년)에서 시도된 타운 홀 미팅과 포커스 그룹 미팅은 한발 더 나간 시도였다. 목표나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선호를 적극적으로 취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민 참여형 지역 에너지 계획, 나아가 시민 주도형 모델을 본격적으로 적용한 사례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물론 시민 합의 모델과 에너지 백캐스팅 시나리오를 결합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프로그램이 일정한 성과를 거두긴 했다. (☞관련 자료 : 시민 참여형 대안 에너지 시나리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는 장외에서 제출되는 대안이 현실화될 수 있는 통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3월에 마무리된 전주시의 지역 에너지 계획은 그 가능성을 열어줬다. 에너지 자립이라는 비전을 밝히고 단계적인 목표를 설정했다는 점은 물론, 전 과정에서 시민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은 다른 시민참여 경험과 차별화된다.
작년(2015년)에 이클레이 한국사무소와 전주시(시장 김승수)와 인제군(군수 이순선)은 '에너지 안전 도시' 협약을 체결하고, 지역 에너지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인제군은 기존 2045년 에너지 자립화 계획을 뒷받침하는 에너지 시나리오를 작성하였다. 에너지 자립 목표를 선언하고 그에 맞는 실행 계획을 세워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는 인제군이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농촌 지역에 새로운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주시는 어떤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주관하고 이클레이 한국사무소와 전주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참여한 전주시의 지역 에너지 계획(2016~2025년) 수립 연구는 다른 의미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시민성과 숙의성을 강조하여 기존 시민 참여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했기 때문이다.
1차로 선정된 52명의 시민 패널들은 에너지 백캐스팅 시나리오 워크숍에 참여해 2050년 비전, 핵심 가치, 2025년 정성 목표와 정량 목표를 결정하는 임무를 받았다. 세 차례에 걸친 워크숍이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소화해야 했으며 하나의 주제에서 파생되는 다른 주제에 답을 찾아가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결국 두 가지 에너지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연구진은 시나리오 워크숍을 설계하여 운영했고, 시나리오 워크숍 결과와 그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지역 사회 엔지오(NGO)와 자문 회의와 행정 부서 등의 의견을 반영하여 지역 에너지 계획을 최종 보고서에 담았다.
한마디로 2050년에 재생 가능 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 자립을 지향하는 에너지 시나리오 작성 가이드라인을 시민 패널에게 제공하고, 각 시나리오들에 대한 경로를 분석하고, 5대 추진 전략, 10대 정책 방향, 30대 주요 사업을 조합하여 구성하는 방식으로 계획수립에 개입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에너지 자립 문화 도시 전주 : 에너지 디자인 3040>이다. 이것은 전주 시민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2025년에 에너지 자립 30%, 전력 자립 40%를 달성하겠다는 구체적인 전환 계획인 셈이다. 구체적인 지표로는 2013년 에너지 사용량 대비 12.8%포인트 저감, 신, 재생 에너지로 석유 35만6353톤을 충당하는 것을 뽑았다. 이렇게 되면 석유 38만1945톤만큼의 핵에너지, 화석 연료를 대체하고, 온실 기체 90만3765톤을 감축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에너지 자립 문화 도시 전주 : 에너지 디자인 3040>의 구체적인 전략과 방향과 사업들에는 최근 발표한 전주의 지속 가능한 생태 도시 종합 계획을 뒷받침하고, 시민 참여를 극대화한 에너지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고, 전주의 지역성을 반영하여 에너지 전환의 문화적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야심찬 목표와 사업에 대해 시민들이 선택했다는 이유로 시민들에게만 그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정부의 정책 기조와 다르게 에너지 자립을 선언한, 유별난 전주시에게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지게 해서도 곤란하다. 점차 에너지 전환으로 흥하는 세상이 올 수밖에 없지만, 일정 기간에는 상당히 많은 내외부 자원을 모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전주가 정부와 시장과 사회에 제기하는 특별한 질문이 있다. 지역 에너지 전환과 자립은 에너지원의 대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공조하여 국가 에너지 시스템을 지탱하는 법, 제도, 예산, 조직, 시장, 의식 등 많은 분야에서 개혁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는 도전적 과제라는 점이다. 에너지 전환은 그 조건의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에너지 분권 없이는 에너지 전환도 자립도 없는 것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보다 직접적이고, 보다 숙의적인, 그리고 일상적으로 가능한 시민 참여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어떨까. 이제 에너지 전환 운동은 물리적, 화학적 에너지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에너지에 관심을 갖고, 이 에너지들을 어떻게 키워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이제 전주는 에너지 혁신의 새로운 롤 모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전주를 응원하고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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