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난 40년 동안 핵발전소 건설에 매진해왔다.
이른바 '압축적 고도성장'을 달성하는데 '싼'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정부 주도의 전력 수급 계획에 따라 핵발전소가 지속적으로 건설되었다. 1980년대 한국형 표준 원자로 개발이 이루어졌고 이후 표준 원자로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1000메가와트 경수로가 건설되었다. 사기업이 핵발전소를 운영하는 미국, 독일 등에서 원자로의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건설이 지연되고 이에 따라 건설 비용이 상승한 것과 비교할 때 국가 주도의 표준 원자로 개발과 건설 기간 단축은 분명 정부 계획의 '합리적' 측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정부의 계획대로 핵발전소 건설이 추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이미 확보된 4곳의 부지나 그 인근에 추가적으로 핵발전소를 건설하면서 발전소 건설에 따른 갈등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와 더불어 사용 후 핵연료를 발전소 부지에 임시 보관하면서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문제를 미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4곳의 부지 이외에 추가되는 부지는 이미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삼척은 주민 투표를 통해 과반 이상의 주민이 핵발전소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으며, 영덕도 2015년 11월 주민 1만2000여 명이 주민 투표에 참여하여 90% 이상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정부는 핵발전소 건설은 국가 사무라 애초부터 삼척과 영덕의 주민 투표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이 지역에서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강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신규 부지 확보도 '한계'에 이르렀지만,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사용 후 핵연료를 어디에 처분할 것인가이다. 원자력진흥위원회의 2015년 회의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 공론화 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른 후속 조치를 위해 작년 연말까지 TF 팀을 구성하고 사용 후 핵연료 특별법 제정안과 기본 관리 계획을 수립한다고 되어 있다.
공론화 위원회의 권고안에 따른 로드맵에는, 2051년이면 영구 처분 시설을 운영해야 한다고 되어 있으며 2020년까지 지하 연구소 부지를 선정하고 2030년까지 지하 연구소를 운영한다고 되어 있다. 또 2020년까지 사용 후 핵연료 처분 전 보관 시설 건설을 착수한다고 계획되어 있다. 로드맵만 있을 뿐 아직 구체적인 계획안은 수립되지 않았다. 2020년까지 부지 선정이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정부는 벌써부터 각 핵발전소 부지에 사용 후 핵연료 '단기 임시 저장소'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용 후 핵연료 처분 문제는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십 수년째 미루어오고 있는 문제이다. 미룬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겠지만, 정부는 핵 발전에 따른 갈등 요인을 일시적으로 덮어버린 채 사회적 고민 없이 발전소 건설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핵발전소 건설과 사용 후 핵연료 처분 문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독일은 1970년대 중반에 이미 이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독일의 한 행정법원은 핵발전소 운영에 따른 사용 후 핵연료와 방사성 폐기물 처분에 대한 계획 없는 핵발전소 건설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법원의 판결과 더불어 정부의 관련 행정 지침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1977년 중반부터 1982년 중반까지 약 5년간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되었다. 독일정부가 신규 건설 중단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모라토리엄 상태였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지난 2000년대 초반 부안 사태 당시, 한국 정부는 반핵 환경 단체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 중단 요구를 묵살하고 신규 핵발전소 건설과 방사성 폐기물 처분 문제를 연계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입장을 여전히 지속할지라도 시민 사회의 합리적이고 책임 있는 고민이 따른다면, 핵발전소 건설과 사후 처리 문제가 결코 분리되어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2017년에 고리 1호기의 상업 운전 종료가 결정되면서, 핵발전소 해체 산업이 새로운 신성장 산업으로 부상했다. 핵발전소 입지 지역을 중심으로 '원자력해체기술연구센터'와 '원자력 경제 특구' 지정을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부산의 한 지역 신문은 부산의 '원자력 경제 특구' 추진 노력이 자칫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문제와 연계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사설에 싣고 있다(<국제신문> 2016년 1월 23일).
핵 관련 산업의 지역 경제 파급 효과를 기대하여 핵 산업 시설 유치는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용 후 핵연료 처분장을 포함한 방사성 페기물 처분장 부지까지는 지역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이 비록 이 지역만의 민심은 아닐 것이다. 어느 지역이든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 지역 이기주의(NIMBY:Not In My Back-Yard)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법이 아니다.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그의 저서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 궁리 펴냄)에서 공감과 연민이 시민의식과 밀접하게 관련 있으며, 이런 공감과 연민이 공적 합리성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고 강조한다.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개별 인간 존재의 내적인 도덕적 삶이 갖는 복잡성-투쟁과 곤경, 복잡한 감정들, 이해를 위한 노력과 두려움 등-을 고려하지 않고" 비용과 편익에 입각한 경제주의의 '양적' 합리성만이 지배한다면 인간 존재는 기계나 무생물의 존재와 별반 차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스바움은,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도덕적 능력은 바로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즉 공감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둘러싼 안면도, 굴업도, 부안 주민들의 반대 운동, 신규 부지 선정을 반대하는 삼척, 영덕 주민들의 입장, 그리고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면서 밀양 주민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시민 사회에 공감과 연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핵 발전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누리는 '편익'과 지역 주민이 받는 '고통'이 단순히 편익과 비용의 합으로 계산되어 언제나 절대 다수의 '편익'이 소수의 '고통'을 무시하는 체제가 쉽게 정당화될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런 사회는 더 이상 개별 인간 존재의 가치가 존중되는 인간의 사회가 아닌 것이다.
흔히 '전력 섬', '부존 자원 부족' 등의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하여 핵에너지 이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가피론이 구두선으로 그치지 않고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핵 발전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사용 후 핵연료 처분, 신규 부지 선정, 송전탑 건설 등을 둘러싼 문제가 핵발전소 건설의 본연의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계될 것이다. 이렇게 핵발전소 건설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전제될 때 비로소 사용 후 핵연료 처분이나 영구처분장 문제에 대해 합리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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