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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던 레고 제국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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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던 레고 제국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나?

[프레시안 books]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

레고(Lego)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블록 완구의 대명사인 이 회사는 1932년 덴마크의 조용한 시골 마을 빌룬에서 일어난 지 8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세계 최고의 완구 회사 지위를 유지한다. 세계적 금융 위기 시기였던 2007년부터 2011년 사이 레고의 세전 이익은 오히려 네 배로 늘어났다. 진입 장벽이 매우 낮고(레고를 모방한 완구는 세계 각지에 널려 있다), 컴퓨터 게임과 같은 강력한 대체 오락물이 활개치는 이 시대에 경이적 성과라 할 만하다.

조금이라도 레고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레고가 위기를 딛고 일어선 이야기를 대충은 알 것이다. <포천>이 '세기의 장난감'으로 레고 블록을 선정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은 2003년, 레고는 역사상 최대 손실을 발표했다. 그룹이 지속한 혁신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

위기 극복을 위해 긴급 영입된 외르겐 비그 크누스토르프 전략 개발 책임자가 이해 6월 그룹 이사회에 보낸 서한에서 "우리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워낙 적자 규모가 커, 그룹이 와해되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레고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고성장 질주를 이어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년이었다.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데이비드 로버트슨·빌 브린 지음, 김태훈 옮김, 해냄 펴냄)는 이제 경영학 마케팅 연구 사례로도 널리 인용되는 레고 그룹의 성장과 위기, 그리고 극복 과정을 정리한 책이다. 당연히 이 책은 경영 모델 연구서에 가깝다. 회사 관계자와의 인터뷰, 자세한 통계치를 곁들여 기업이 어떻게 위기를 맞는지, 어떤 방식의 혁신이 회사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지, 위기 극복을 위한 혁신적 아이디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등을 정리했다.

그러나 경영학 연구자나 기업가가 아니라 해서 이 책을 잡지 않을 이유는 없다. 완구 기업으로서 레고가 가진 독특한 위상과 유명세, 그리고 그룹의 위기 극복 과정의 참신함이 흥미를 돋우기 때문에, 완구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라도 읽기 어렵지 않다.

▲ 레고 마니아들은 레고의 로봇 브랜드 '마인드스톰'을 응용해 실제 작동하는 인쇄기, 연구 보조 장치 등을 만들고, 제작 방법을 공유한다. 사진은 마인드스톰을 이용해 만든 스도쿠 머신. 물론 잘 작동한다. 레고는 이런 괴짜들의 힘을 이용해 다시 일어났다. ⓒpic.google.com

레고 위기 극복 과정의 핵심 단어를 한마디로 꼽자면 '기크(geek)'다. '괴짜' 정도로 요약 가능한 이 단어는, 10대 시절 풍요로운 대중문화 세례를 누린 성인을 일컫는 말이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IT, 만화, 게임 등 성인의 대중문화와 얼핏 연관 없어 보이는 분야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나아가 이 분야에 전문가 뺨치는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을 일컬을 때 쓰인다. 레고는 '기크'에 문호를 과감히 열어 위기를 극복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완구에 관심을 지닌 성인 마니아를 이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건담 등 1970~80년대 만화를 소재로 한 완구 조립을 꾸준히 하는 성인, <공각기동대> 등 옛 만화 영화의 세부적 내용을 줄줄 외는 성인, 마블, DC 코믹스 등의 단행본을 원서로 사 모으며 누구보다 깊이 해당 이야기를 꿰는 사람들이 적잖다. 이들을 위한 시장은 젊은이가 많이 모이는 도심을 중심으로 단단히 저변이 형성되고 있다.

유아를 위한 블록 장난감으로 치부하기 쉬운 레고 역시 이제는 성인의 오락물로도 간주된다. 어릴 적 레고 블록 쌓기의 즐거움을 안 성인은 커서도 레고 블록을 응용해 놀라운 조립물을 만들어낸다. 인터넷에는 전 세계 레고 팬을 위한 포럼인 레그넷(LUGNET), 사용자가 만든 창작 조립물을 자랑하는 모크(MOC, My Own Creations) 페이지 등이 35만 곳 넘게 존재한다. 레고 조각물 거래 페이지인 브릭셸프, 2만4000여 쪽에 걸친 리뷰와 포럼을 담은 브리키피디아(레고 마니아의 위키 백과) 등이 탄탄한 저변을 과시한다.

레고는 전자오락이 급격히 세를 갖추어 가자, 위기 극복을 위해 다방면의 혁신을 단행했다. "현대의 아이들은 조립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분석 결과에 발맞춰, 유아용 블록인 '듀플로'를 폐기하고 (나중에 되살렸다!) '익스플로어' 시리즈를 냈고, 콘텐츠 시장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자체 제작 영웅인 '잭 스톤' 시리즈를 뒷받침하는 블록 모델을 출시했다. 사용자 주문 제작 모형을 제작 가능한 '레고 디지털 디자이너' 역시 출시해 컴퓨팅 세계에도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모조리 실패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레고는 그룹의 뿌리로 돌아갔다. 그룹의 원래 가치인 조립을 통해 얻는 즐거움을 꾸준히 제공하려 했다. 나아가 성장하는 팬에 발맞춘 새로운 조립 모형 시리즈 '바이오니클'과 조립하는 로봇 '마인드스톰' 시리즈를 출시했다. 여기서 레고는 위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바이오니클 시리즈는 보기 흉측해 보이는 어두운 곤충형 악인 시리즈였으나, 이는 10대 소년을 중심으로 광적인 인기를 끌어냈다.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데이비드 로버트슨·빌 브린 지음, 김태훈 옮김, 해냄 펴냄) ⓒ프레시안
더 놀라운 건 마인드스톰 시리즈였다.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블록을 중심으로, 사용자가 조립하면 로봇처럼 움직이는 이 시리즈는 당초 개발부가 아동을 대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형에 성인이 열광했다. 어릴 적 레고를 좋아했던 성인들이 이 작품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 스탠퍼드 대학원생은 소프트웨어 블록을 분해해 해당 언어를 인터넷에 공개했다. 모토롤러의 프로그래머는 아예 새로운 프로그래밍 도구까지 만들었다. 해커들이 이 프로그램에 가장 먼저 열광해, 자신들만의 새로운 로봇 언어를 덧씌우기 시작했다.

레고는 여기서 가능성을 봤다. 이들을 규제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도록 하고, 아예 차세대 모형 개발에 마인드스톰의 팬 4명을 직접 참여하도록 했다. 돈 한 푼 주지 않더라도 이 시리즈에 얼마든 정열을 바칠 자발적 혁신가를 대상으로 회사의 문호를 완전히 열어버린 것이다. 레고는 2010년 4월, 전 세계 마인드스톰 팬을 대상으로 한 '퍼스트레고리그' 로봇 경진대회까지 열었다. 이 대회에 1만6000개 이상의 팀이 몰렸다.

인터넷 혁신이 일으킨 변화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기존 권력은 단단히 유지되며, 일부에서는 오히려 인터넷이 권력의 힘을 더욱 강화하는 듯하다. 하지만 일부 사례에서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레고의 사례처럼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되는 혁신이다. 대체로 콘텐츠 산업, 콘텐츠 비평과 같은 2차 콘텐츠 산업에서는 기존 권력(비평가, 콘텐츠 제작자)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소비자가 이들의 자리를 대체했다.

레고는 이 혁명의 시기에 성인 괴짜에 눈을 돌려, 그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 혁신이 전자오락이 범람하는 현대에도 레고를 일류 기업의 지위에 올렸다. 그러니 세계의 기업이여, 괴짜를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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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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