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동네 만화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만화 마니아는 아니었다.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에 연재되던 만화 정도를 즐겨보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자발적인 만화 독자가 아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나 그곳에 굴러다니는 만화책을 주워서 보는 수동적인 독자였다.
내가 대학생 때는 만화방에서 연애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그때 나도 데이트 장소로 만화방을 골랐고 남들이 다 읽는 이현세나 박봉서의 만화를 좀 본 것이 전부였다. 어른이 되어서는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차 출발 시간에 여유가 좀 있으면 늘 기차역 근처 만화방에 들리곤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만화나 집어 들고 시간을 보냈던 것이 만화와의 인연의 전부였다.
보현산 천문대 워크숍으로 만화가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정말 전투적으로 그 워크숍에 참가하는 만화가들의 만화를 거의 다 찾아서 봤다. 어릴 때 만화방에 처박혀서 살던 친구들의 희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양한 만화가의 다양한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즐거웠다. 만화 속에 이렇게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니. 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만화가들이 많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만화 이야기가 나올 때면 경청을 하면서 내숭을 떨었지만 내가 급하게 읽었던 만화 이야기가 나오면 내심 뿌듯하고 기뻤다.
워크숍이 끝난 후에도 만화가들과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더 많은 만화가들을 만나게 되었고 몇몇 작가들과는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작은 공동 작업도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매일 밤 12시면 웹툰 보기 여행을 떠나는 딸아이와 함께 웹툰을 챙겨보는 고정 독자가 되었다. 만화책도 구입한다. '프레시안 books' 회의를 할 때도 만화책이 보이면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과학 만화책에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편이지만 만화 자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 <어메이징 그래비티>(조진호 지음, 궁리 펴냄). ⓒ궁리 |
그러다가 결국 사고가 터졌다. 작년에 한 출판사와 만화책 출판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내가 글을 쓰고 친한 만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우주 개발에 대한 만화책을 내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자료를 모으고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는 단계지만 한편 신이 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 두렵기도 하고 그렇다. 기회가 되는대로 참고할 만한 과학 만화책을 보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책을 찾기가 힘든 것 같다.
몇몇 지인들이 래리 고닉의 과학 만화책을 추천했다. 마침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적분>(전영택 옮김, 궁리 펴냄)이 화장실 앞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오다가다 틈나는 대로 살펴보는 중이다. 이제 겨우 45쪽 정도를 살펴봤지만 고닉의 다른 과학 만화도 보고 싶다는 공감을 일으키는 책이었다. 그러다 이 책 옆에 나란히 꽂혀있던 조진호의 <어메이징 그래비티>(궁리 펴냄)가 눈에 띄었다. 제목처럼 어메이징한 만화책이었다. 어메이징하게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작가는 한국인 조진호였다.
"중력의 역사에서 수학은 중요한 도구였다. 특히 근현대의 중력의 발견은 수학으로 일궈낸 성과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수학보다 더욱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중력의 원리와 개념을 발견해나간 사람들의 상상력이다. 중력의 역사는 기술의 발전과 보조를 맞춰간 다른 부분의 과학 역사와 달리 대부분이 인간의 상상력만으로 이루어졌다. 중력을 발견한 역사의 주역들은 이런저런 상상의 세계를 수없이 넘나들며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도 하고 구렁텅이에 빠지기 일쑤였다. 바로 이런 혼돈과 실패! 이런 방황의 역사를 찾아보자고 한 것이 이 책 <어메이징 그래비티>를 쓰게 된 출발점이었다."
만화책 <어메이징 그래비티>의 화두는 물론 '중력'이다. 부제에서도 '만화로 읽는 중력의 원리와 역사'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조진호는 중력 이야기를 하기는 하겠지만 그 자체에 대한 탐구 이전에 '중력'을 발견하기까지의 우리 조상들의 찬란하고 처절한 상상의 역사를 먼저 그려보겠다고 천명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접근 방식은 결과론적으로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인류가 중력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떻게 그 인식이 바뀌어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주에 대한 가치관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시작, 생명의 기원에 대한 탐구에 대한 역사 이야기가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꼭꼭 숨어있던 '중력'이라는 실체가 견디지 못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고야말 것이다. 그때 낚아채듯 중력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맥락 있게 '중력'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참가했던 천문학 교육에 관한 학회에서 과학사를 통한 현대 과학의 핵심 개념 교육이 효과가 있다는 논문 발표를 들었던 적이 있다. 강의나 강연을 할 때 핵심적인 개념이 나오게 된 과학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시도를 해봤는데 상당히 큰 효과가 있었다. 느닷없이 생소하게 튀어나오는 개념은 생뚱맞지만 그 역사적 뿌리부터 이야기하면 새로운 개념 자체도 개연성 높은 인과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메이징 그래비티>는 중력의 역사, 아니 중력에 대한 인류의 상상과 관측의 역사를 통해서 그 실체와 본질에 접근하고 있는 어메이징한 과학 만화책이다. 국내 저자의 작품이라는 것이 너무나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과학사를 통한 중력 인식의 역사 이야기는 이 책을 과학책 이전에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서 감동하고 동감한다. 과학 원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이미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책이 바로 <어메이징 그래비티>다. 물론 조진호의 스토리텔링이 담백하면서도 강한 흡입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진짜 미덕은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작가 서문에서 이야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종착역은 중력의 본질에 대한 소개와 성찰일 것이라고 분명히 해놓은 바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런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메이징 그래비티>는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과학책이다. 이야기를 늘어 넣으면서 독자들을 충분히 유혹하고 훈련시키면서 슬쩍 중력의 원리를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수준이나 설명 방식의 적절함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 변곡점이 자연스러운 것도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어메이징 그래비티>는 어메이징한 과학책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력에 대한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인 일반 상대성 이론을 다룬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대를 살고 있고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금 더 현재에 무게를 두는 책 구성이 아쉬웠다. 오히려 일반 상대성 이론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현재'에 가장 큰 비중을 둬야한다는 개인적인 소신에서 비롯된 아쉬움의 토로였다. 한 가지 더 적자면 중력에 대한 최신의 프런티어 이론들에 대해서도 만화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더 자세히 소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과욕일까. 300쪽 그림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맨 앞이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중력 이론의 프런티어에 있는 과학자 중 한 명이었으면 더 어메이징하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메이징 그래비티>는 지은이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어메이징한 과학 만화책이다.
사족 하나. 146쪽에서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한 것은 판타지와 과학 소설로 구별해서 분리해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SF를 '과학 소설'로 표기하는 SF 작가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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