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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능선에 핀 <독립>과 <민주>의 넋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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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달래능선에 핀 <독립>과 <민주>의 넋들

4월 서울학교

4월입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학자, 서울해설가) 제49강은 4월을 맞아,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독립투사들과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4.19혁명을 주도했던 민주열사들이 잠들어있는 북한산 진달래능선을 순례합니다.

▲진달래능선에 활짝 핀 진달래 ⓒ우보천리

진달래능선은 북한산성의 대동문에서 우이동으로 내려뻗은 산줄기로, 해마다 4월이 오면 온통 핏빛 진달래 천지가 되는 곳으로 골짜기 곳곳에는 독립열사들의 묘가 들어서 있고 능선의 끝자락에는 꽃잎처럼 스러진 젊은 넋들이 잠들어 있는 4.19국립묘지가 있습니다.

4.19묘원은 지금은 국립묘지가 되었지만 군사독재시절에는 이곳에 참배하는 것만으로도 불온시하여 4.19혁명정신을 계승하려고 참배를 강행하려는 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전투경찰에 의해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로 끌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서울학교 제49강은 2016년 4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시 국립4.19민주묘지 정문 앞에 모입니다(강북구 4.19로 8길17. 시내버스 지선:강북01,1119(4·19방향),1144,1166,1218 간선:101,104,109,120,144,151,170).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립4.19민주묘지 앞-진달래마을-신숙묘-김도연묘-서상일묘-김창숙묘-양일동묘-섶다리-유림묘-이시영묘-17위의 광복군합동묘-김병로묘-신하균묘-신익희묘-이준열사묘-점심식사 겸 뒤풀이-국립4.19민주묘지(기념관/중앙분향소/묘역/영정보관소)

▲<독립>과 <민주>의 넋들이 피어있는 <진달래능선> 순례길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진달래능선에 잠든 11분의 독립열사와 17위의 광복군

우리는 대한의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삼천리금수강산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들 있다 왜놈 발에 밟힌 꽃포기 있다

북간도, 서간도 만주땅 골짜기를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며 오직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며 불렀을 <독립군가>는 가사의 내용이 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은 크게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과 실력양성운동(實力養成運動)의 두 가지로 전개됩니다.

항일무장투쟁은 국가와 군대가 존재하지 않은 조건에서 그 성과를 거두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뿐만 아니라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주도권 싸움이 전개되면서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할 수 없었기에 항일무장투쟁은 다양한 소단위(小單位)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비록 미미한 수준일지라도 당시에 74개의 독립군 단체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실력양성운동은 한국이 독립할 역량이 아직은 없으므로 먼저 실력을 기른 후에 독립을 도모하자는 이른바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이라는 준비론적(準備論的) 입장의 애국계몽운동으로 개화파를 계승한 지식층과 대한제국의 관료 그리고 유학자(儒學者)들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 물산장려운동, 교육진흥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진달래능선에는 11분의 독립열사 묘역과 17위의 광복군 합동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이념과 투쟁 이력이 모두 다릅니다. 그 이유는 항일무장투쟁이 이념적 당파성을 갖게 됨에 따라 최초의 시작은 국내 독립운동, 해외망명, 무장투쟁 등의 노정을 걷습니다만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사상적 입장 차이로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으로 나뉘고 이는 해방정국에서 통일을 저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조금은 지루할 것 같으나 이곳에 잠드신 11분의 독립열사를 소개합니다.

▲199위의 민주영령들이 잠든 국립4.19민주묘지 Ⓒ서울학교

신숙(申肅 1885~1967)
강재(剛齋) 신숙(申肅)은 경기도 가평(加平)에서 태어났으며 1903년에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 김남규(金南奎) 등과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는데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2월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李鍾一)의 지휘 아래 김영륜(金永倫)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고 1920년 봄 극비리에 신상태(申相泰)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북만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에는 홍진(洪震), 지청천(池靑天)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할 때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 등 3대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해방 후 난민수송선을 타고 부산을 통해 귀국하여 1947년 천도교보국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4월 11일에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 저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자유당 시절에는 민주혁신당 중앙위원장,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독재정권과 투쟁하였고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나 갑작스런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김도연(金度演 1894~1967)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은 수천 석의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극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고 특히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으며 이같은 인연으로 훗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그곳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일제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여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28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큰사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시키려고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는데 당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상산은 1942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으며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에 주역으로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하였습니다.

서상일(徐相一 1887~1962)
동암(東庵) 서상일(徐相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였으며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48년 초대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6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되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 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62년에 사망했습니다.

▲아나키스트 유림의 묘역ⓒ서울학교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경북 성주(星州)에서 태어났으며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한 탓에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자칭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시작되자 심산은 전국단연동맹회(全國斷煙同盟會) 성주 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으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성주 지방에서 모은 단연금(斷煙金)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東岡) 김우옹을 모신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성명(星明)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선생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상경을 미루다가 3.1독립선언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결국 3·1독립선언이 유교계 인사들이 빠진 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대표들만으로 발표되자,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상해로 가서 이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사, 공사, 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과 한인동포에게도 보냈습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李會榮)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만주 동삼성 일대에 한인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 장년을 훈련시켜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방략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첫 사업으로 자금을 유자명(柳子明)에게 주어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하게 한 뒤, 천진에서 나석주(羅錫疇)를 만나 이를 전해주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는데 나석주는 식민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본인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부상 입히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탄환으로 자결하였습니다.

심산은 광복 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하였고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을 재건하여 학장,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습니다.

김병로(金炳魯 1887~1964)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의 의병부대에 18세의 나이로 채상순(蔡相淳) 등 5~6명의 포수들과 함께 가담하였습니다. 그후 고정주(高鼎柱)가 설립한 창흥의숙(昌興義塾) 고등과 속성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가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과 어울리며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변호사가 되면 첫째 아무리 일본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가인이 맡았던 정치색이 짙은 이른바 ‘시국사건’은 1921년 보합단(普合團)사건, 1923년 김상옥의거, 제2차 의열단사건, 1926년 6.10만세사건, 1927년 제1차조선공산당사건, 고려혁명당사건, 정의부(正義府)사건, 1928년 제1차간도공산당사건, 1929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 통의부(統義府)사건,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조선공산당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 흥농사(興農社)사건, 1931년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 등이 있으며 또 안재홍(1928), 안창호(1932)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았습니다.

미 군정청(軍政廳)도 선생의 능력과 명망을 무시할 수 없어서 1946년 미 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 군정청 사법부장, 1947년 사법부 내 6인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948년 8월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어 국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만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 처벌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됩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반민족행위자들의 처벌이 민족적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 공정한 재판을 강조하였으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1950년 골수염 치료를 위하여 왼쪽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1957년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하고 1964년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운명하였습니다.

▲이준 열사 묘역 ⓒ서울학교

양일동(梁一東 1912~1980)
현곡(玄谷) 양일동(梁一東)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30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중동중학교를 퇴교당하고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민탁고등학교(北京民鐸高等學校)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1935년에 일제에 잡혀 징역 3년6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市谷)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복역 2년8개월 만에 신병으로 가석방, 고국으로 압송되어 광복 때까지 향리에서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가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여 자유당 때에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반독재운동에 민주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5·16군사쿠데타 후에는 구 신민당의 원내총무, 정무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당선에 이르기까지 5선 의원을 지냈고, 두 번의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였고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 반공법(反共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으며 1973년 동경에서의 이른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 때에는 참고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971년 신민당 주류의 유진산(柳珍山)과 결별하고 1973년 통일당(統一黨)을 창당, 당수로 있으면서 신민당의 반체제운동에 동조하는 제2야당의 구실을 하였으며, 비록 재정적인 어려움과 원내세력의 미미함 때문에 통일당의 존재가 큰 각광을 받지 못하였지만 신민당과의 합당의 길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자 재야의 반체제세력과의 합작으로 제3당의 출현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유림(柳林 1894~1961)
단주(旦洲) 유림(柳林)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유화영(柳華永), 별명은 고상진(高尙眞)으로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이어서 서당교육을 받았는데,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다녔습니다.

1919년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동반하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는데, 이곳에는 1911년 망명한 이상룡(李相龍)과 김동삼(金東三) 등 안동 출신의 스승과 선배들이 이회영(李會榮)을 비롯한 신민회 계열 인물들과 주축을 이루어 경학사(耕學社),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부민단(扶民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이어지는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20년 여름, 유학을 위해 상해로 갔고 거기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옮겼으며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 김창숙을 만나 당시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고(天鼓)>의 발행을 도왔고 이 무렵 한창 아나키스트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던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나키즘(anarchism)에 대하여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이란 그리이스 말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다. 본래 ‘안(an)’은 없다는 뜻이고 ‘아키(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권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 배격하지, 자율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렇게 볼 때 일제시기 아나키즘은 강제적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 독립운동 이념으로 기능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일제경찰에 쫓긴 상당수의 학생들이 만주로 탈출해 왔으며 이에 1929년 말부터 이듬해 체포될 때까지 단주는 4백 명이나 되는 학생을 수합하여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창립하여 한인(韓人) 유학생의 중국학교 입학을 알선하면서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의성학원 운영에 몰두하고 있던 단주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직후인 10월 초에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환국 이후 선생은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적 통일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쓰던 중, 1961년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습니다.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은 경주 이씨로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으며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가 출신입니다.

1905년 외부(外部)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이 강요되고 있었던 상황으로 이것을 막아내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성재는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때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는데,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성재는 형제들과 더불어 가재(家財)를 처분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1910년 말 서간도(西間島)로 가서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에 정착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는데,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습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 발전되었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가면서 독립군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이때 경학사 초대 사장은 이상룡(李相龍),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추대되었으며 1920년의 청산리대첩의 승리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시영 일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의 한 사람으로 환국하였으나 바로 위인 넷째 형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다른 네 형제도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세상을 떠났으니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혼자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재는 세 가지 일에 힘을 쏟았는데 하나는 정치활동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으로 활약한 것이고 둘째는 종교활동으로서 성균관 총재를 맡은 것과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한 것이고 셋째로 교육운동에 앞장선 것입니다.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 양성에 착수하였으니,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51년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를 떠났고 다음해인 1952년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습니다.

신익희(申翼熙 1894~1956)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는 1894년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草月面)에서 태어나서 191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유학하여 독립운동의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켰습니다. 정세윤(鄭世胤), 송진우(宋鎭禹), 문일평(文一平),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學之光)>의 주필, 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1919년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학교 학생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하여 3월5일 남대문역,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진두지휘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어 3월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해공은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하여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성안된 <대한민국임시헌장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선포되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고 이 와중에서도 1946년 국민대학(國民大學)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棟梁)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自由新聞)>을 발행하여 민족자주성을 함양하였습니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초대 국회부의장과 이승만(李承晩)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에 주력하다가 5월 5일 호남선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습니다.

신하균(신익희의 아들)
신하균(申河均)은 호를 평산(平山)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관 평산 신씨에서 따온 것으로 독립이 불확실하다고 내다본 부친인 신익희가 나중에 죽더라도 본관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아들의 호를 평산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평산은 1923년에 모친과 함께 상해로 부친을 찾아가 공부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고 중국 중앙은행의 과원조장, 신탁국조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아버지의 정치활동을 보좌하였으며 이후 민주국민당에 입당한 이래,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신민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고 1956년 8월23일,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경기도 광주군 제3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고 이어서 제5대, 제6대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이준(李儁 1859~1907)

일성(一醒) 이준(李儁)은 북청군에서 학자인 부친 이병관(李秉瓘)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을 만나서 협성회를 조직하였고 독립협회 평의원에 피선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을 주도하고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활동하였습니다.

1904년 일제가 송병준(宋秉畯) 등 친일분자들로 하여금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매국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尹夏榮), 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선임되어 반(反)일진회 투쟁을 벌였습니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투척하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하였으며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위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고종을 만납니다. 거기서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특사로는 정사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 부사로는 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 주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李瑋鍾)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는데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연일 애통해 하다가 1907년 음력 7월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습니다.

일성의 유해는 순국 3일 후 헤이그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고, 같은 해 일제통감부에서는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은 처교(處絞),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징역을 선고하였으며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른 후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하였고 1964년에는 서울 장충단공원에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헤이그묘소에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국립4.19민주묘지에 잠드신 199위의 민주영령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 마다
그날 스러져간 눈물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풀리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치 어깨위로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이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해마다 4월이 오면 강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지만 잠들 수 없는 스러진 꽃잎들이 누워 있는 진달래능선 아래 국립4.19민주묘지에는 한스럽게 남은 이들의 추모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1960년 4월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권력에 항거한 시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만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경찰의 발포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로 인해 국민적 분노가 전국적으로 분출되어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았던 이승만 독재정권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이때 꽃잎처럼 스러진 199위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국립4.19민주묘지입니다. 한땐 ‘혁명’ 또는 ‘의거’로 불리다가 5.16 이후에는 ‘의거’로 공식화되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그냥 ‘4.19’ 불리다가 1993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되어 비로소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 오던 4.19묘지도 성역화사업을 거쳐 1995년 4월19일(4.19 35주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7년 4월19일에는 전시실 기능을 갖춘 4.19혁명기념관을 개관함에 따라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교육장임과 동시에 민주이념의 최고성지로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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