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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擇里志)>가 선경(仙境)으로 손꼽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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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택리지(擇里志)>가 선경(仙境)으로 손꼽은 섬

2016년 4월 섬학교는 <덕적도>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지리서 <택리지>가 묘사한 덕적도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덕적도는 숨막히게 아름답습니다. 비조봉이나 운주봉에서 바라보는 인천바다 풍경은 가히 선경이라 이를만합니다.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서포리해변은 신기루 같기도 하고 꿈결 같기도 합니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서포리 홍송숲은 서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솔숲입니다. 솔숲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치유 받는 느낌이 듭니다.

봄이 무르익는 4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4월2(토)∼3(일)일, 제47강, 1박2일 일정으로 인천 옹진군 덕적도를 찾아갑니다. 인천연안부두에서 불과 1시간이면 떠날 수 있는 해외여행^^ 덕적도 서포리해변 고요한 솔숲으로 초대합니다.

▲아득하고 아련한 서포해변의 아침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 <택리지>가 선경(仙境)으로 손꼽은 섬, <덕적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솔방울의 꿈

모든 섬은 산이다. 덕적도 도우선착장에서 진리고개를 넘다 말고 나그네는 산길로 접어든다. 사람들은 섬에 오면 대체로 해변으로 달려가지만 해변에서는 섬을 볼 수 없다. 산에 올라가야 비로소 섬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산으로 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흙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그네는 뭍에서 온 누구보다 먼저 섬의 속살에 안겨볼 수 있다. 흙과 나무와 바람의 향기, 숲에서 한번 걸러진 바다 내음도 한결 청량하다. 대체로 섬들의 산은 높지 않은 탓에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며 푹신한 흙을 밟는다.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공중의 구름을 걷는 느낌이 이러할까. 사람이 관절이 상하고 자주 무릎이 아픈 것은 걷지 않아서가 아니다. 흙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사람이 걸을 수 있는 흙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진리, 덕적면 소재지가 있는 진리 해변 모래밭에서 앞선 여행자들이 남기고간 낙서를 만난다. ‘호식이 바보’ ‘덕적도 관광 왔다. 사랑해’ ‘군 입대 D-18, 사랑해서 미안해’. 군대는 아직도 이별로 가는 특급열차인가. 남자의 군 입대를 앞두고 섬에 온 연인은 서로의 앞날이 불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하겠는가. 사랑을 지킬 수 없어서 미안한 것이지. 어차피 모래 위에 새긴 사랑의 맹세란 한 번의 파도에도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바위에 암각한 사랑의 맹서라 해서 영원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의 맹세를 써야 할 곳은 어쩌면 모래밭인지도 모른다.

진리마을 해안길의 끝에 밧지름해변과 서포리해변의 이정표가 서 있다. 서포리까지는 이십리 길. 해떨어지기 전에 닿을 수 있을까. 서포리고개에서 해넘이를 만나 잠시 서쪽 바다를 본다. 비가 오려는가 하늘이 붉다. 소년시절 승봉도로 가는 길에 덕적도에 들른 적이 있다. 아니 배가 잠깐 들렀었고, 소년은 배 안에서 서포리마을을 건너다보기만 했었다. 접안시설이 없던 때라 여객선은 서포리에 직접 대지 못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잠깐 멈춰 섰다. 당시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서포리에서 종선이라 부르는 작은 목선이 마중 나왔다. 종선은 여객선으로부터 사람과 짐들을 옮겨 실은 뒤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문득 세월이 흘렀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때 서포리마을을 건너다보던 소년과 지금 서포리에 있는 어른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밤새 꿈을 꾸었다. 서포1리마을 차부 민박집. 주인집 노인이 만든 솔방울베개를 베고 잔 때문이었을까. 밤새 솔바람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불고, 눈보라치고, 햇볕 따뜻한 봄이 오고, 비가 오고, 밤과 낮이 수시로 교차했다. 소나무에 새순이 돋고, 송홧가루가 날리는가 싶더니 해변은 떠들썩해졌다. 물놀이 하는 사람들, 솔숲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는 사람들, 고기 굽는 냄새, 조개 잡는 아이들, 찬바람이 불고 다시 해변은 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갔다. 꿈이었다. 꿈을 꾼 것은 나그네였을까. 베갯속 솔방울들이었을까.

▲방풍림으로 조성된 서포리 홍송군락지 Ⓒ섬학교


당나라 침략군의 전진기지

덕적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한강 유역의 다른 지역처럼 신라와 고구려에게 번갈아 점령당했던 경계의 땅이었다. 덕적도는 고대 황해 횡단항로의 길목이기도 했다. 당나라의 백제 침략 때 덕적군도(群島)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전진기지였다. 660년, 수륙 1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 침략에 나선 소정방의 당나라군은 4개월간 덕적군도를 13만 군대의 주둔지 겸 군수품 보급기지로 활용했다. 덕적도 바로 옆 소야도에는 당나라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남아있다. 당나라 침략자들은 덕적도에 주둔했다가 기벌포로 상륙해 신라와 협공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왜구들 때문에 섬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공도(空島)가 되었다.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그런 덕적도가 수려한 경관으로도 이름 높았다.

“덕적도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뒤에 있는 3개의 돌봉우리는 하늘에 꽂힌 듯하다. 여러 산기슭이 빙 둘러싸고 안쪽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있는데 물이 얕아도 배를 댈 만하다. 나는 듯한 샘물이 높은 데서 쏟아져 내리고 평평한 냇물이 둘렸으며 층바위와 반석이 굽이굽이 맑고 기이하다. 매년 봄과 여름이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산에 가득 피어 골과 구렁 사이가 붉은 비단 같다.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밭이고 가끔 해당화가 모래를 뚫고 올라와 빨갛게 핀다. 비록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라도 참으로 선경이다. 주민들은 모두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어 부유한 자가 많다. 여러 섬에 장기 있는 샘이 많은데 덕적도와 군산도에는 없다.” (이중환 <택리지(擇里志)>)

과거 덕적도는 덕물도, 득물도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렸다. 면적 20.87㎢, 여의도의 4.5배쯤 되는 큰 섬이다. 2009년 1월5일, 덕적면 전체 인구는 1800명. 덕적도의 인구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옛 자료에 따르면 1954년 덕적도의 인구는 1만2788명. 한국전쟁 직후라 피난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대폭 증가했다. 원주민과 피난민이 반반. 무속을 제외하면 당시에도 종교는 기독교가 대세였다. 기독교인은 500여명이나 됐지만 절은 선갑도에 하나뿐이었고 그 절에도 신도가 없이 파계승만 1인이 거주했다. 당시 덕적군도 전체에 라디오는 25대였고, 신문은 110부를 구독했다. <인천신문> 50부. <연합신문> 30부, <조선일보> 30부, 신문은 대부분이 유지들과 관공서에서 구독했다. 미군부대도 주둔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담배 등의 물품을 판매하는 좌판이 2~3개 있었다. 섬에는 의사 3, 한의사 2, 수의사 1명과 의생 3명이 살았다. 현재와는 또 다른 덕적도의 옛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민박집을 나서자 다시 길이 시작된다. 그 여름날 해변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다. 오고 감이 늘 꿈만 같다. 바닷바람이 매섭다. 얼굴이 따가워 해변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은 간곳이 없다. 방풍림이 마을사람들을 지켜준다. 저 숲의 나무들 덕에 사람들은 바닷가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섬이나 바람 거센 바닷가 마을에는 아직도 마을 숲에 대한 외경이 남아 있다.

▲조개를 캐는 덕적도 북리 어민들 Ⓒ섬학교

논을 불모지로 만들면서 또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드는 국가

서포1리 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니 서포2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너른 들판이 있다. 섬이지만 전형적인 농촌마을. 제방을 쌓아 갯벌을 간척한 논들이다. 저수지도 규모가 제법이다. 오랜 세월 섬이건 뭍이건 쌀보다 귀한 식량은 없었다. 섬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금싸라기땅, 쌀은 곧 돈이었고 화폐로도 기능했다. 갯것보다 쌀이 소중했으니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더 이상 논을 소중히 하지 않는다. 논에서 나오는 이익이 적어진 까닭이다. 논농사 직불제라 해서 휴경하는 논에 돈까지 줘가며 논농사 짓지 말 것을 장려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논을 만들기 위해 갯벌을 막는 일을 지속한다. 어째서 국가는 이미 있는 논을 불모지로 만드는 동시에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겠다고 갯벌을 죽이는가. 오히려 제방을 헐어 더 이상 이익이 나지 않는 간척지 논들을 다시 갯벌로 되돌리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미 독일이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제방의 일부나 전부를 허물어 갯벌을 복원시키고 있다. 어째서 이 나라만 유독 갯벌도 죽이고 농사도 죽이는 우를 범하는 걸까.

서포2리, 이 마을에도 폐교가 있다. 학교가 없는 마을은 쓸쓸하다. 아이들 소리 사라진 마을에 미래는 없다. 인적 없는 마을 안길로 들어간다. “아니, 저런” 한겨울 텃밭에 배추가 시퍼렇다. 마늘도 그 푸른 줄기에 윤기가 흐른다. 오래된 동백나무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남쪽 섬과 바닷가 마을에서나 겨울을 난다고 알려져 있는 식물들이다. 같은 위도상의 육지 땅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섬에서는 가능하다. 수원과 같은 위도상에 있는 덕적도의 겨울이 포근한 것은 따뜻한 물을 옮겨오는 쿠로시오난류의 영향 때문이다. 육지가 산으로 문화권이 갈린다면 섬들은 해류가 문화권을 만든다.

이 섬에는 다니는 차가 적다. 공영버스 두 대만이 드물게 다닌다. 도로는 온통 걷는 자의 것이다. 도보 여행자에게는 때때로 자동차 여행자는 꿈도 꿀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온다. 오늘은 나그네가 그 행운의 주인공이다. 걷지 않았다면 어찌 한겨울 덕적도에서 월동배추와 동백나무, 푸른 쑥과 무화과나무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덕적도 진두항, 민어의 섬을 상징하는 민어잡이어부 조형물 Ⓒ섬학교

민어의 고장,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보신탕은 하품


덕적도의 주산 국수봉 고갯길을 넘으니 북리마을이다. 지금은 한철 꽃게잡이를 제외하고는 여름철 피서지로 더 각광받는 섬이지만 과거 덕적도는 연평도와 함께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업전진기지였다. 그 중심에 북리가 있었다. 연평도 파시만큼은 아니었으나 북리에도 규모가 큰 파시가 섰다. 민어의 산란장이었던 덕적바다. 6,7월 민어철이면 덕적도 북리항에는 수백척의 어선들이 몰려들고 색주가만 수십곳이 생겼다. 예부터 이름난 민어어장은 신안의 태이도(타리도)와 재원도, 인천의 덕적도, 평안도 신도 바다였다. 과거 한국의 바다에 사는 민어는 가을이면 제주도 근해로 이동하여 월동하고, 봄이면 북쪽으로 돌아와 생활했다. 여름철 덕적도 근해는 민어의 산란장이었다. 민어는 <동국여지승람>에 덕적도의 특산물로 거론될 정도로 덕적도 바다의 대표적 어종이었다.

지금이야 워낙 귀한 고급 어종이 됐지만 민어는 이름처럼 옛날에는 백성들이 즐겨먹던 물고기다. 민어 중에서도 여름에 잡히는 것이 가장 기름지고 맛있다. 민어는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가장 많이 오르던 물고기였다. 회나 탕, 구이뿐만 아니라 포, 알포, 알젓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자산어보>의 기록처럼 지방이 적고 단백질 함량이 많아서 맛이 담백하다. 서울, 경기지방에서는 복날 민어탕으로 복달임을 했던 전통이 있었다.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으로 쳤다. 민어는 쓸개를 빼고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머릿살과 껍질의 맛이 특히 뛰어난데 껍질은 데치거나 날로 먹기도 한다. 민어껍질의 뛰어난 맛은 "민어껍질에 밥 싸먹다 논밭 다 팔았다"는 식담을 만들기도 했다. 참조기와는 달리 민어는 알이 찬 암컷보다 수컷을 더 귀하게 친다. 알밴 암컷은 알이 워낙 커서 살이 적고 살 속의 기름기가 빠져 맛이 없다. 조기가 연평바다를 떠났듯이 민어 역시 지금은 덕적바다를 떠난 지 오래다.

작은쑥개, 폐가가 된 옛 선주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쓰다버린 가구들이 나뒹구는 빈집은 쓸쓸하다. ㄷ자 한옥은 선주 가족이 살던 본채였을 것이다. 북리 선주집을 상징하는 2층집은 문간채 옆에 서 있다. 2층집 아래층과 옆 건물은 어구를 보관하는 창고다. 2층 선주집은 덕적도 북리에만 있던 부의 상징이다. 지금도 몇몇 2층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좁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무너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보지만 계단은 아직 성성하다. 2층은 전체가 하나의 넓은 방이다. 바닥은 널마루를 깔았다. 난방시설이 없는 방은 여름용이다. 건물은 방이라기보다 누각에 가깝다. 사방에 유리창을 달았고 각 방향마다 두개씩의 창문을 넣어 어느 방향이나 전망이 툭 트였다. 선주는 이곳 마루에 앉아 북리항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배를 기다렸다. 만선의 북소리가 울리면 고 선원들을 위한 잔치 준비를 서둘렀다.

먼지에 찌든 마루 한켠에는 그물이 쌓여 있다. 면사(綿絲)그물. 나이론그물이 나오기 전 사용되던 면사그물이 남아있다니! 40~50년은 족히 됐을 면그물. 2층집의 지붕과 유리창이 상하지 않아 그물은 원형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손으로 한땀 한땀 짜서 만든 면사그물, 저 그물은 이미 문화재다. 경기만 연안의 섬들 어디에도 없고 오직 덕적도 북리에만 있는 이런 형태의 2층 선주집 또한 어업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2층집도, 면사그물도 서둘러 보존해야 한다. 이 집은 그 자체로 덕적도어업박물관이다. 아주 망가지고 폐허가 되기 전에 서둘러 이 집을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황혼녘, 가로등 불빛에 물든 서포리해변 Ⓒ섬학교

머리가 가려우면 비가 왔다

과거 덕적도에는 어업과 관련된 금기가 많았다. 어느 지방이나 그랬듯이 여자들은 어선에 타지 못했다. 심지어 출어하는 날 아침에 여자를 만나면 ‘재수없다’하여 출어를 포기하기도 했다. 또 배에는 소, 돼지, 개를 제외한 다른 동물은 일절 싣지 못했다. 애기를 낳은 집의 선원은 ‘부정간다’ 했다. 그래서 3일 동안은 배를 탈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3일 전에 어선이 출어할 경우에는 복숭아나무가지를 잘라서 들고 배를 탔다. 그러면 부정이 방지된다고 믿었다. 배를 타고 나갔다 돌아온 선원이 초상집을 다녀오면 자기집 방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했다. 부정을 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궁이 속에 고개를 집어넣었다가 나와서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어민들에게 금기는 기독교의 십계명이나 불교의 계율과 다르지 않았다. 어로활동에는 날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어부들은 자연의 징후를 보고 다음날 날씨를 미리 짐작했다. 봄에 서남풍이 불면 반드시 비가 온다 했다. 안개낀 날 멀리서 기계소리는 나지만 배 모양이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했다. 또 먼 산이 가깝게 보이면 비가 온다고 했다. 낙조 때 서쪽 바다가 붉게 물들면 비가 오고 능구렁이가 울어도 비가 오고 쌍무지개가 떠도 비가 온다고 했다. 머리가 가려워도 비가 온다 했다.

비가 오려는가? 머리가 가렵다. 북리 작은쑥개를 지나 큰쑥개를 넘는다. 높은 고개를 깎아 도로를 냈다. 시멘트포장일망정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숲길을 걷는 일은 행복하다. 게다가 여기는 섬이 아닌가. 뭍의 땅을 걷는 일과 섬의 땅을 걷는 일은 본질이 다르다. 뭍을 걷는 일이 몸을 견디는 일이라면 섬을 걷는 일은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섬에서는 걸을 수 있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다. 배 시간을 기다리고, 바람과 풍랑이 멈추길 기다리고, 밤이 지나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면 섬을 걸을 수 없다. 절대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시간을 계량해서 시계란 것을 만들고, 시간을 시계 안에 가두어 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사람들끼리의 약속일뿐 자연의 시간을 계량할 수 있는 저울은 어디에도 없다. 뭍의 시간과 섬의 시간은 다르다. 공간마다 각기 다른 시간이 흐른다. 섬의 시간은 자주 정지하거나 느리게 흐른다. 태풍이나 해일 등, 간혹 자연이 행사하는 물리적 힘 앞에서 섬의 시간이 급하게 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이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데 몸과 마음이 바쁘다 해서 섬의 공간을 벗어날 수는 없다. 정지된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섬의 주재자는 오로지 자연이다. 저 바다와 바람과 구름과 태양. 사람은 다만 섬의 시간이 이끄는 대로 따를 뿐, 시간의 지배를 거역할 수는 없다. 바람이 거세진다. 저 바람이 섬의 시간을 흐르게 할 것인지 멈추게 할 것인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지금 바람 앞에서 사람은 그저 처분을 기다리는 죄수에 불과하다. 사람이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세계의 지배자라도 되는 양 오만을 떨지만 섬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은 여전히 바람 앞의 등불에 지나지 않음을. 수만톤의 배도 대양을 가르는 태풍 앞에서는 가랑잎에 불과함을.

섬학교 2016년 4월2(토)∼3일(일), 제47강 <덕적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2일(토)>

09:00 서울 출발(가까운 섬이라 느지막이 9시에 서울서 출발합니다. 8시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7강 여는 모임

-인천연안부두 출항

-덕적도 도착

-도우선착장→진리해수욕장

-점심식사(<진리섬마을식당>에서 건우럭탕 혹은 바지락칼국수)

-진리섬마을식당→진리경로당→진리성당→망재→운주봉(231m)→서포리(약4km)

-자유시간

-저녁식사 겸 뒤풀이(<올레회식당>에서 자연산광어회와 매운탕, 간재미무침 등)

-취침(<소나무향기펜션>, 다인실)


<4월3일(일)>

07:00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올레회식당>에서 꽃게탕)

-오토캠핑장-서포리솔숲-서포리 해변(약3km)

-덕적도 출항

-인천연안부두 도착

-인천어시장 장보기

-점심(신포시장 <화선횟집>에서 민어탕)

-서울향발. 제47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47강 <덕적도 걷기> 약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덕적도 파락금 해변의 일출 Ⓒ옹진군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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