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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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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실크로드 역사 단상 ⑦

작년(2015년)에 인기를 끈 영화 <암살>에 나오는 장면이다. 간도 한인 학살의 주범 가와구치 마모루와 악질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하러 떠나는 독립군 황덕삼이 김원봉에게 묻는다.

"피치 못할 땐 민간인 죽여도 됩니까?"

김원봉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안 된다."

그러자 황덕삼이 덧붙여 묻는다.

"일본 민간인은요?"

김원봉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힘주어 대답한다.

"모든 민간인들은 죄가 없지. 그냥 총알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하자고."

이 장면은 작가나 감독이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넣은 것 같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김원봉의 의열단 등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매도하는 일본과 국내 일부 뉴라이트의 왜곡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학생들을 포함해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는 점에서 이 장면을 넣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한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칠가살(七可殺)', 즉 죽여도 되는 일곱 부류 가운데 '일본인'을 으뜸으로 꼽았다는 부정확한 정보가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실제로 1920년 2월에 나온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찾아보니까 칠가살의 첫 번째로 꼽은 '적괴(賊魁)'는 일본인 가운데 총독, 정무총감, 헌병경찰 등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 침략에 책임 이 있는 자들을 특정한 것이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무고한 민간인은 처단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들의 독립운동이 숭고한 인간 해방의 대의에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제 침략자들은 독립의 기를 누르기 위해서라면 간도 참변이나 난징 대학살 같은 민간인 살육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사람 값'은 식민 통치의 달콤한 대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1월 12일 터키 이스탄불의 술탄아흐메트 광장에서 일어난 폭발 테러는 숭고했던 우리의 애국선열과 비교할 때 그 원인과 대의가 어디에 있든 간에 용납할 수 없는 반인륜적 폭거였다. 독일인 관광객을 주로 노렸지만 워낙 전 세계의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한국인 부상자도 나올 만큼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테러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문제의 광장에 여러 차례 들렀다. 그곳은 마치 서울의 광화문 광장처럼 관광의 핵심 요지이기 때문에 항상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현재의 이름은 광장 남서쪽에 유럽 최대의 이슬람 사원(술탄 아흐메트 모스크)을 지은 술탄 아흐메트에서 유래했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차지하기 전 이 도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을 때는 대전차 경주장으로 쓰였다. 그래서 서방인들에게는 전차 경주장을 뜻하는 '히포드롬' 광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테러가 일어난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광장의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강응천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는 2만1000개에 달하는 파란색 타일과 260개의 푸른빛 유리창으로 장식되어 '블루 모스크'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이 사원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로마 제국의 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졌던 성소피아 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다. 술탄 아흐메트가 17세기 초 블루 모스크를 짓게 한 것은 바로 이 성소피아 박물관에 대한 라이벌 의식에서였다고 한다. 그럴 만큼 성소피아 박물관은 동로마 건축의 대표작으로 1500년 가까이 건재를 과시해 왔고, 내진 설계마저도 완벽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으로 군림하고 있다.

성소피아 박물관 뒤로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자금성에 버금가는 오스만 제국의 궁성 톱카프가 자리 잡고 있다. 또 광장 북쪽에는 동로마 시절 전시에 대비해 물을 저장해 두던 지하 궁전('예레바탄 사라이')이 땅 밑에 웅자를 숨기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유적들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술탄아흐메트 광장이다.

이번처럼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2001년 9.11 이래 일정한 진화 과정을 거쳤다. 9.11 테러가 미 국방부나 세계무역센터처럼 상징적인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면, 작년 11월 13일 파리 테러와 이번 이스탄불 테러는 정치적으로 어떤 책임도 없는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차별 살상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지구상에 사는 모든 민간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테러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인류에 대한 선전포고이다.

테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힘 있는 권력자가 아닌 일반 민간인을 죽여도 정치적 효과를 볼 수 있게 된 사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독립군은 의로운 투쟁을 벌였지만 만에 하나 그 과정에서 일본 민간인이 죽었다고 해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눈 하나 깜빡했을까? 오히려 이를 빌미로 수천 배, 수만 배의 한국인을 죽였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들고 일어난 의병을 역도로 몰아 죽여 버리던 왕조 시대의 통치자들이 일반 백성의 희생에 대해 무슨 책임을 졌을까?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군주제 시대의 왕과 같은 존재들이다. 당연히 그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돈 따위로 매길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는 해당 국가의 지도자에게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의 국민이 더 많은 위험에 처하거나 말거나 자신의 입지를 위해 더 큰 폭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는 결코 민주주의 시대의 지도자라 할 수 없다. 지도자는 국민 단 한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라도 훼손할 수 없다는 결기를 가지고 모든 말과 행동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알제리 독립 전쟁을 다룬 프랑스 영화 <친밀한 적>을 보면 '괴물'이 되어 가는 알제리 해방군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원인이 바로 프랑스의 제국주의 정책에 있음을 통타하고 있다. 오늘날 민간인 테러에 나서는 자들 역시 서방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역사가 낳은 '괴물'이다. 서방 세계가 다른 지역에 대해 반인륜적 침략과 파괴를 자행하면서 자국 내에서 실시했던 민주주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그런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중동과 이슬람 세계를 대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는 자신들의 무고한 국민에 대한 상시적 위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은 극우 세력의 준동 속에 그나마 이들 나라에 존재하던 민주주의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전라북도 익산에 들어설 국가 식품 클러스터에 '할랄 음식 단지'도 세워진다고 하자 일각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무슬림이 먹는 할랄 음식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무슬림이 들어오게 되면 자칫 테러범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런 논란과 우려는 국가가 책임지고 한 점 의혹 없이 불식시키고 한 사람 남김없이 이해시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논란 속에 모든 무슬림을 잠재적인 테러분자로 몰아가는 주장도 들리는데, 이는 사실도 아닐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다. 전 세계의 18억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찍는 사고방식이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생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작년 11월 술탄아흐메트 광장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한 소녀가 영어로 '시리아 난민'이라 쓴 피켓을 들고 달려왔다. 그리고 또렷한 한국말로 "시리아 난민!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현지 주민은 그 아이를 가리키며 "2년 전엔 조그맣더니 많이 컸네"라고 했다. 중동 난민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인 터키의 거리에는 이 소녀와 같은 난민들이 곳곳에서 관광객의 동정을 구하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이 처할 운명은 정말 생각도 하기 싫다.

이 비극적 상황은 국민 개개인과 무슨 상관인지 모를 그 무슨 '국가적 이익'을 내세워 약소국을 강권으로 대하는 강대국 통치자들과 그에 맞서 인륜 따위는 무시해 버린 테러리스트 '괴물'들의 합작품이다. 나와 남을 함께 끌어안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어떤 것도 테러를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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