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는 봄 맞으러 남녘으로 향합니다. 산행 주제는 <지리산의 봄–노고단 운해(雲海)와 매향(梅香)>. 3월26일(토) 제60강으로, 어머니의 산 지리산과 매향 흩날리는 광양 다압 매화마을을 걷습니다. 마고할미의 전설이 깃든 노고단에 올라 봄을 앞당기는 따스한 일출과 지리십경 중 하나인 노고단 구름바다 위를 유영합니다.
섬진강 줄기 따라 흩날리는 매화비[梅雨] 맞으며 매향 가득한 매화마을 속으로 들어갑니다. 꽃길 따라, 물길 따라 매화 축제와 함께 합니다. 이번 산행도 누구나 부담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안전한 산행입니다. 함께 하셔서 노고단의 운해, 바람에 실려오는 매향과 함께 남녘의 봄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6년 3월26일(토)
-산행출발 : 2016년 3월25일(금) 오후 11시30분
-산행코스 : A. 성삼재-노고단대피소-노고단-노고단대피소-성삼재
B. 광양 다압 매화마을
-산행거리 : A. 약 10.8km / B. 약 3km
-소요시간 : A. 약 4시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 B. 약 2시간
-난 이 도 : A. 하상(★) / B. 하하(☆)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3월 백두대간학교는 봄맞이 산행입니다.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지리산의 봄을 맞으러 갑니다.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봄의 전령 매화를 찾아 섬진강의 물길 따라 갑니다. 남도의 봄을 찾아 떠나는 여정입니다.
세 명의 서로 다른 성씨(姓氏) 장군이 지켰다는 마한의 전설이 내려오는 성삼재에서 어머니의 산 지리산으로 들어갑니다. 하현달이 어슴푸레 어둠을 밝히는 지리의 품속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돌로 포장된 넓은 임도를 따라 이어진 산길은 약간의 오르막이지만 걷기에는 수월합니다. 알싸한 새벽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키며 아직은 차가운 기운을 감싸고 있는 산마루를 걷습니다. 머리가 밝아지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임도산길은 노고단대피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노고단대피소에서 잠시 다리쉬임을 하고 노고단 고개를 향하여 올라섭니다.
노고단고개로 이어진 길에는 둥글고 넓적한 돌을 깔아져 있습니다. 돌멩이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가면 가파른 노고단 고개가 미명에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하늘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심장은 요동질 치며 쿵쾅거림을 반복하고 이마엔 연신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지만 어느덧 노고단입니다. 산허리를 감싸 안은 구름의 소복(素服)이 희미한 여명 속에 시나브로 눈에 들어옵니다. 운해(雲海)-구름의 바다입니다. 따스한 봄기운과 섬진강이 피워 올리는 구름바다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만복대, 고리봉, 강 너머 백운산 등이 하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습니다. 작은 조각배 띄워 둥실둥실 떠다니고 싶은 풍광입니다. 지리십경 중 하나인 노고단의 운해입니다. 노고단의 구름바다를 둥실둥실 헤엄치고 멀리 형제봉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노고단을 내려섭니다. 노고단대피소에서 함께 구름바다를 헤엄친 도반들과 아침식사를 나누고 성삼재로 향합니다.
성삼재에서 화엄사로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버스에 몸을 맡깁니다. 오른쪽으로 쏠리고 왼쪽으로 쏠리고를 수십 차례 겪다보면 화엄사를 지나 섬진강 줄기를 따라 갑니다. 벚꽃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길입니다. 성질 급한 벚나무들은 꽃망울을 터트려 어서 오라 반겨주는 꽃길입니다. 섬진강 물길 따라, 벚나무 터널 꽃길 따라 매화를 찾아갑니다. 섬진강도 물안개를 피우며 반겨줍니다. 졸졸졸 경쾌한 강물소리도 함께합니다.
섬진강을 건너면 광양 다압 매화마을입니다. 매화축제 기간이라 사람들로 붐빕니다. 매화마을로 향하는 길목길목 매향이 가득합니다. 청매(靑梅), 홍매(紅梅), 백매(白梅)가 꽃봉우리를 활짝 터트리고 은은한 매향을 흘립니다. 꽃에 취하고, 향기에 취하고, 색에 취하고, 사람에 취합니다.
산들 부는 봄바람에 매화비가 내립니다. 꽃비 속을 함께한 도반들과 노닙니다. 장독대와 어우러진 청매화, 섬진강 가를 수놓은 백매화, 육보정과 어우러진 홍매화는 진경산수화입니다. 아름다운 동양화의 화폭 속을 도반들과 함께합니다. 웃음소리 절로 나오고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함께 합니다. 그렇게 한나절 매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노닙니다. 매화가 전해주는 봄을 만끽합니다.
자리를 구례로 이동해 남도의 푸짐한 음식들로 봄맞이의 화룡정점(畵龍點睛)을 찍습니다. 음식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 그릇을 층으로 겹쳐 놓는 한정식백반으로 뒤풀이를 합니다. 물론 맛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산수유막걸리와 함께 합니다. 선홍빛 산수유막걸리 나누며 입안에 남도의 봄을 가득 머금습니다.
봄의 절창을 찾아가는 3월 백두대간학교 함께 하셔서 노고단의 운해와 매향 가득한 남도의 봄 마음껏 담아가시기 바랍니다.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다은고속관광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3월25일(금)
23:30(오후 11시30분)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2번 출구)
24:0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3월26일(토)
00:1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00:2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00:3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4:00 성삼재 도착 / 산행 준비 - 스트레칭
04:30 성삼재 출발 - 산행 시작
05:40 노고단대피소
06:10 노고단
07:00 노고단대피소 – 아침식사
08:30 성삼재
버스 이동
09:30 광양 다압 매화마을
매화마을 탐방
12:00 매화마을 출발
13:00 구례 – 서울회관
푸짐한 남도백반정식과 막걸리로 뒤풀이
14:30 구례 출발
18:00 서울 도착(예정)
*상기 시간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재킷,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우모복(다운재킷), 아이젠, 스패츠, 버프(얼굴가리개), 그리고 꼭 점심도시락 싸가지고 오세요.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2016년 4월 산행 안내]
-산 행 지 : 선자령 – 야생화 산행
-산행일시 : 2016년 4월 23(토) - 당일 산행
-산행코스 : 대관령-새봉-선자령-나즈목이-국사성황당-대관령
-산행거리 : 약 13km
-소요시간 : 약 6시간
-난 이 도 : 중하(★☆)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산행자료]
[지리산] 1915m. 1967년 12월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꽃잎처럼 떨어진 곳이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동하였던 것이다.
지리산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첫째, 신라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하였다.
둘째,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에 흐를 '류(流)'를 보태어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로 해서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풀면 지리산의 산세가 두리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지리십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예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 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 자락에서 내려 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주차장과 휴게소, 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원래의 대간 마루금은 종석대를 지나 코재로 향하지만 임도를 따라 코재를 거쳐 노고단대피소로 향한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 맞춘 돌포장 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진한군에게 쫓기던 마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달궁이야기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달궁이라는 이름은 계곡 들머리의 마한 왕궁터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어렴풋이 전해진다. 달궁계곡이 마한 왕조의 피신처였음을 밝힌 이는 김경렬씨다. 김씨는 저서 <다큐멘타리 지리산2>에서 지금의 달궁계곡에서 지리산 개산의 비밀을 풀었다. 마한왕조와 관련한 지리산 자락의 기록은 지리산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서산대사가 황령 아래 있던 절 황령암에 대해 적은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동해 가운데 한 산이 있으니 지리산이다. 이 산 북쪽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부른다.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과 정령이다. 옛날 한나라 소제 3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서 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공사케 했다. 도성이 완성된 후 고갯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 가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 험준한 산세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 팔량치라 했다. 서쪽은 정장군을 배치하고 정령(현재 정령치)이라 칭했다. 동쪽은 황장군을 배치시켜 황령으로 불렀다. 남쪽은 특히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 방어토록 하고 성삼(姓三)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오늘날 지리산 자락을 동강내고 도로가 연결된 해발 1090m의 성삼재다. 기원전 78년의 일이었다. 그때 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달궁계곡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남아 억새를 키우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 대홍수가 휩쓸면서 달궁은 전설에서 역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심원계곡에서부터 불어난 계곡물이 덮치면서 달궁터를 감추고 있던 흙이 씻겨 나갔다. 그때 드러난 것은 지금의 주춧돌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름 1.5m에 이르는 질그릇 시루와 청동제 수저 수십벌, 구리거울, 활촉 등도 출토됐다. 그러나 그 유물들은 일본 순사들이 어디론가 가져가버린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마한 왕조의 유적은 세걸산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곳곳에서도 찾아진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멀쩡하게 남아 있다. 마한의 정 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설명문에는 조각양식이 고려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인근에서는 마한장군상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12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고 보물 제1123호라고 적은 설명문에는 9분의 부처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찾아봐도 3분의 부처 이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풍화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나 탁본을 떠갈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 더 커보였다. 포수들도 마한장군상 앞에 이르러서는 ‘마한 임금님의 성지’라 하여 동물을 놓치면 놓쳤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는 것은 한말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1400여m에 이르는 고봉의 능선이면서도 마한장군상 앞은 유난히 평탄하다. 지금은 빽빽한 잣나무 숲인 이곳에서 마한의 군대가 주둔했던 터일지도 모른다. 1960년 이곳을 사탕수수밭으로 개간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그때 여러가지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그 유물들도 달궁의 유물들과 똑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노고단 일대는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기도 했고 고려조에는 몽고군과의 항전이, 임진왜란에는 왜적의 침입을 피하기도 했던 곳이다.
[코재] 종석대 동쪽이자 화엄사계곡에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깔딱고개의 끝이다. 언젠가부터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자들이 섬진강을 멀리서 구경하고 지나간다. 성삼재로 차량이 올라가기 전에는 화엄사를 산행기점으로 삼아 이곳 코재를 경유했다. 화엄사에서 올라가자면 줄잡아 3시간30분 소요된다. 화엄사에서 오르자면 코재를 앞두고 경사가 하도 급하여 ‘코가 당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부른다 한다.
[노고단] 1507m. 노고단이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仙桃聖母)를 일컫는다. 서술성모를 마고할미로 존칭하며 부르게 된데서 노고단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서술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였다.
산정부에 가까운 1100∼1200m 높이에는 원추리꽃으로 덮인 광활한 고원이 펼쳐져서 부근이 좋은 피서지를 이루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양 사람들의 별장지가 되었다. 노고단의 경관은 울창한 임상(林相)과 웅대한 산용(山容)의 경치가 훌륭하고,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서쪽 계곡에는 화엄사(華嚴寺)가 있는데, 경내에 각황전(覺皇殿)을 비롯해 국보·보물로 지정된 전각(殿閣)·석등(石燈)·석탑 등이 많다.
-마고할미 전설(반야봉)
지리산 산신 중 여신(女神)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 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광양매실] 오늘날 광양매실을 이야기하려면 광양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통했던 밤나무골 김영감님인 김오천 선생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김영감님이 1931년 일본에서 밤나무 묘목과 함께 들여온 5000주의 매화나무 묘목으로부터 광양매실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김오천 선생은 1902년 11월21일(음력)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일곱 살 나던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3년간의 광부생활로 돈을 모았고 1931년(30세때)에 귀국하면서 밤나무 1만주, 매실나무 5천주를 비롯하여 감나무, 배나무 등 양질의 신품종 묘목을 가지고 들어왔다.3년 동안 가지고 온 묘목을 심고 관리하던 김영감님은 나무 키우는데 필요한 기술과 돈을 구하기 위해 1934년 다시 일본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일본과 광양의 고향집을 수없이 오가면서 돈을 벌고 나무 키우는 기술을 익혔다. 김영감님은 두 번째로 일본에 들어가서는 당신이 광부생활을 했던 구천에서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인부를 수십 명, 많을 때는 1백여 명까지 썼고 고향마을 사람들도 10여 명에 달했다. 1944년에는 완전 귀국하여 다시 밤나무, 매실나무 키우는 일에 매달려 45만 평의 임야를 밤산으로 만들었고 집주변 언덕배기에는 매화나무를 집중해서 키웠다.또한 김오천 선생은 1952년부터 매실의 상품화에도 앞장서 해마다 매실 한약재인 오매와 금매 수십 가마를 만들어 구례, 순천, 하동 등지의 한약방에 공급하였으며, 매실농축액과 매실식초, 매실차 등 매실식품을 전통방식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하였다.
(자료출처 : 국립공원관리공단, 네이버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백과, 광양매화축제 등)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오랜 동안 백두대간학교 수석가이드로 활약해주셔서 낯익은 얼굴입니다.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학교를 열며> 얘기합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이어진 분수령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에서 1정간 13정맥이 갈래치고 또 기맥, 지맥으로 뻗어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에서 모든 강들이 시원하고 그 강줄기에 기대어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일구어졌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그 산줄기와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대어 사는 이 땅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대간입니다. 낙동정맥, 호남정맥, 땅끝기맥 등 정맥과 지맥, 기맥을 모두 아우른 백두대간입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이 땅 곳곳으로 갈래친 백두대간을 찾아갑니다. 앞으로 백두대간학교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하나, 백두대간학교의 원래 취지대로 백두대간 걸작 구간 산행을 계속합니다.
둘, 백두대간에서 갈래친 정맥, 기맥의 걸작 구간도 찾아갑니다.
셋, 월별, 계절별로 특별히 아름다운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넷, 산행과 문화유적 탐방을 아울러서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도록 합니다.
다섯, 참가자들이 희망하시는 산줄기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합니다(전체 일정은 유지하지 만, 꼭 고수하지는 않습니다).
여섯, 산행 후 계절별, 지역별 특색 있는 먹거리로 뒤풀이 자리를 마련합니다.
일곱, 멤버십 강화를 위해 정기 산행 이외에 비정기 산행(번개산행, 종주산행, 번개모임 등)도 추진합니다.
여덟,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중심이 되는 산행을 이어갑니다.
아홉, 백두대간학교가 지향하는 산행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땅 여러 갈래로 백두대간의 아름답고 소중한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그 아름다운 산줄기를 늘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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