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4.13 총선 또 2017년 대선에서 호남 민심은 어디로 갈까요? 호남 주민은 대대로 선거에서 이른바 '민주 후보'와 야당에게 몰표를 던졌습니다. 1997년의 정권 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대통령,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기적 역시 호남이라는 '상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호남의 몰표는 정작 자신이 대통령으로 만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도 조롱을 당했죠("호남이 날 좋아서 찍었느냐, 이회창이 싫어서 찍었지"). 하지만 호남은 또 2012년 대선에서 야당 후보로 나온 '영남 출신' 문재인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습니다. 아시다시피 그와 야당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야권은 분열했습니다. 지금 호남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호남의 토호-엘리트 등이 더불어민주당과 안철수 의원의 국민의당으로 이미 분열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호남의 보통 사람 사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물론 그 틈에 정의당, 녹색당과 같은 진보 정당이 굴기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요. 김욱 서남대학교 교수의 도발적인 책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 펴냄)과 이에 대한 장은주 교수의 역시 도발적인 칼럼을 계기로 '호남'을 둘러싼 날선 공방이 <프레시안> 지면에서 진행 중입니다. '호남의 선택'을 둘러싼 이모저모는 프레시안 옴부즈만을 비롯한 여러 독자가 직간접적으로 공론화를 요청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관련 기사 : ①
호남이 '세속화' 되어야 한다고?(장은주) ②
선거 전엔 '호남 몰표'! 선거 후엔 '호남 없는 개혁'?(김욱) ③
"호남 타령 그만하고, 영남 너나 잘하세요!"(윤중대) ④
'친노'도 '영남 패권'도 없다! 문제는 '서울'!(정희준) ⑤
영남 패권, 새누리당 고립으로 죽이자(장은주) ⑥
'노무현 이데올로기'를 죽여야 세상이 바뀐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교수와 김욱 서남대학교 교수 사이의 날선 토론이 다시 시작됩니다. 정희준 교수가 김욱 교수에게 다시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프레시안>은 이 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를 언제든지 환영합니다(tyio@pressian.com). 나는 김욱 교수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져 내려오는 대구-경북(TK)에 기반을 둔 극우 군사 독재 세력을 '영남 패권'으로 설정해놓고는, 그 패권의 원죄를 고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엉뚱하게 부산-경남(PK)의 민주 개혁 세력, 즉 '친노'에게 뒤집어씌우며 비난하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나의 문제 제기에 김욱은 이렇게 반론한다.
"TK든, PK든, 이런 실없는 얘기가 지금 왜 필요한가?" 김욱이 TK 군부 독재 세력과 PK 민주 개혁 세력의 구분을 "실없는 얘기"라면서 일축하고, 계속 이들을 뒤섞어 오락가락하며 편리하게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 둘을 구분하면 자신의 논리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책은 '영남 패권'만 말하든지, 아니면 '친노 패권'만 말하든지, 둘 중 하나를 정했어야 했다. 이 둘을 섞어 쓰다 보니 김욱의 표현대로 '논리적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친노"가 도대체 누구?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다. 김욱이 "영남 패권주의의 존재를 정교하게 입증할 수 없다"고 책에 쓴 부분을 내가 "영남 패권주의의 정의 또는 실체를 밝히는 것을 포기"했다고 덮어 씌었다면서 그는 자신의 책에 제시된 영남 패권주의에 대한 정의를 소개했다. 학자가 스스로 입증도 못 하는 것을 비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정의를 제시했었다는 사실은 깨끗하게 인정한다. 사과한다.
변명을 하면서 이어갈까 한다. 그는 내가 책도 읽지 않고 글을 쓴 것처럼 비난하지만 사실 나는 밑줄까지 쳐가며 끝까지 읽었다. 쉽지는 않았다. 왜?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어떤 내용? 친노에 대한 비난 말이다. 중반부 이후엔 계속 한 말 또 하는 '동어 반복'의 수준이라 계속 붙들고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읽은 이유는 김욱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친노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이 긴 책을 읽고 나면 친노의 실체가 밝혀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딘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없었다. 내가 속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이 친노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에 의해 쓰였음에도 친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친노 패권주의의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들도 대부분 10년도 더 이전에 노무현, 유시민 등 지금은 사라진 이들이 했던 말들이다. 스스로도 민망했던지 그는 반론에서 이렇게 썼다.
내 주된 관심은 사람으로서의 친노보다는 노무현 이데올로기에 있으며, 정파로서의 친노의 궤멸보다는 노무현 이데올로기의 궤멸에 있다. 난 사람으로서의 친노가 영남 패권주의가 아닌 반영남 패권주의에 투항하기를 원한다. 만약 그들이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영남 패권주의에 투항한다면 노무현 이데올로기는 과거가 아닌 현재, 나아가 미래의 문제다 (…) 그래서 내겐 '노무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은 결코 "허깨비와의 싸움"이 아니다. 이제 한 발 물러서는 것인가. 10년이 넘도록 친노가 민주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패권을 거머쥐고 위선과 독재를 일삼으며 호남을 능멸한다고 비난했던 김욱이 이제 "정파로서의 친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런데 또 "사람으로서의 친노"는 도대체 누구인가? "반영남 패권주의"에 투항하라는데 이 말은 국민의당을 지지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영남이나 친노 정치인들은 상종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영남 패권주의에 투항"하지 말라는 뜻은 앞으로는 야당의 전국 정당화를 꿈꾸지 말라는 것인가?
또 그는 "'노무현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은 결코 "허깨비와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맞다. 이데올로기엔 분명 행위자가 있기 때문이다. 남성(가부장제)이든, 삼성(자본주의)이든, 미국(신자유주의)이든, 추장(부족주의)이든 이데올로기적 지배자는 엄존하고 우리는 그 행위자를 지목해 비판한다. 김욱도 노무현 이데올로기와 투쟁하겠다면 그 행위자를 말하기 바란다. '사회과학자'에겐 최소한의 덕목이다. 아, "영남 패권주의"에 대한 입증을 포기한 것처럼 이것도 대충 뭉개고 지나갈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다시 "허깨비와의 싸움"일 뿐이다.
투항하는 패권?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 김욱의 책은 호남인들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한 시도인데 '감정'을 '논리'로 만들려다 보니 무리수를 두게 되고 결국 모순에 이른다. 그 주장의 핵심은 패권이다. 패권(覇權)이란 무엇인가. 보통 국제 정치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경제력이나 무력으로 압박하여 자기의 영역을 넓히려는 권력 행위를 의미하는데 영어로는 헤게모니(hegemony)이다. 패권이든 헤게모니든 그것은 현존하는 권력이자 지배력이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노무현과 친노를 공격해온 김욱이 친노의 시간을 초월한 권력을 입증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 바로 "은폐된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이다. 그러나 이는 자체로서 논리 모순이다. 우선 지난 칼럼에서 밝혔듯 노무현은 지역주의 타파를 은밀하게는커녕 국회의원 때부터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또 이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감하는 내용이다. 나는 그가 왜 "은폐된"이라는 단어를 왜 갖다 붙였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정작 문제는 "투항적"이다.
김욱에게 묻겠는데 세상 어느 구석에 패권이 항복하는 경우가 있나. 투항했다면 그게 더 이상 패권인가? '몰락한 패권,' '붕괴된 패권' 등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형 패권이라면 몰라도 이미 투항한 패권을 지금도 권력이라고 칭하는 경우를 나는 처음 본다. '투항적 패권'은 간단히 논리 모순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된다면 궤변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말이 되게 하려다 보니 말이 자꾸 길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실체도 없는 친노, 존재하지도 않는 친노 패권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연결될 수 없는 두 개의 개념을 접합시켜 마치 그럴듯한 개념인 것처럼 끈질기게 써먹으려는 의도일 뿐이다. '패권 없음'만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결국 김욱 주장의 핵심 개념인 이데올로기도, 패권도 실체가 없거나 모순투성이인 것이다.
출신지만 보는 이데올로기? 지난 칼럼에서 나는 한국 사회의 최고 패권으로 서울 패권을 꼽았고 그 밑의 다양한 하위 패권 중 하나가 영남 패권인데 이는 영남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는 게 아니라 (고향이 영남일 뿐인) 서울인들이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김욱은 이렇게 반박한다.
비유하면, 정희준은 유대인이 월스트리트의 금융 자본을 패권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유대인이 뉴욕에 살면 뉴욕 사람이고 뉴욕의 패권이지 그게 어디 유대인의 패권이냐고 우기는 것과 같다. 이 놀라운 단순함과 지적 게으름을 내가 무슨 수로 당하겠는가? 김욱의 글을 보니 그는 내 글을 읽으며 네댓 번은 놀랐던 듯하다. 나도 내가 그렇게 놀라운 글을 쓰는지 미처 몰랐다. 죄송할 따름이다. 그런데 김욱은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망하는 것 같다. 그 유대인이 뉴욕에 살고 있으니까 월스트리트를 지배하는 금융 자본가가 되는 것이지 텔아비브에 있었으면 패권이 있겠는가. 월스트리트 패권은 그 유대인이 없어도 패권이다.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유대인은 월스트리트 없으면 그냥 유대인일 뿐이다. 출신지만 보는 사람에겐 세상은 안 보이고 출신지만 보이나보다.
미안하지만 한 번 더 놀랍도록 단순하게 설명해 보겠다. 김욱은 한국 사회에 오로지 영남 패권만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궁금하다. 지금도 호남의 많은 이들은 더 좋은 학교와 직장을 찾아 이주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영남 패권에 투항해 영남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호남인 있는가? 영남인조차 영남 패권에 투항하기를 원치 않는다. 모조리 서울로 가지 않나! 무슨 영남 패권이고 이데올로기인가.
사실 한국 사회에는 수많은 군소 패권들이 있다. 계급적으로도 존재하고 지역적으로도 존재한다. 부산도 부·울·경 지역에서는 패권 도시로 존재한다. 경남의 아이들이 집을 떠나 부산에 와서 대학 다니고 부산에서 직장을 얻어 결국 부산에서 결혼한다. 최근엔 부산과 울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생기고 거제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기자 그쪽 사람들이 부산에 와서 돈을 쓰고 간다. 한반도 동남권에서 작동하는 '부산 패권'이라고나 할까.
호남 패권 인정하고 광주 패권 고민해야
그렇다면 '호남 패권'은 없는가. 서울에 가면 비록 영남 패권에 비해서는 열세이겠으나 결집력은 더 강한 호남 패권이 있다. 이를 호남 패권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유는 서울 내에서의 영향력이 강원, 충청, 제주 등에 비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북 지역과 경기도 산업 도시에서는 정치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또 '광주 패권'은 없겠는가. 광주도 부산처럼 주변 지역과 나눠야 할 혜택을 독식하는 도시이다. 그나마 주변에 산업 도시들이 포진한 부산에 비해 광주는 주변 지역과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상황이다.
대구, 부산, 광주, 대전의 지역 내 총생산(GRDP) 비교가 가능한 1989년 이후 통계청 자료를 들여다보면 2014년까지 25년간 전국 평균 GRDP 증가율은 3.67배인데 이 기간 대구는 2.49배, 부산은 2.53배에 그쳤고 대전도 2.96배에 머물렀는데 광주는 가장 높은 3.33배를 기록했다. 이번엔 각 도별 성장률을 비교해보자. 경북은 3.63배, 경남과 전북은 2.83배인데 전남은 2.79배로 꼴찌였다. 그러니까 지난 4반세기 GRDP 성장률의 도시 간 비교에서 대구가 꼴찌였고 광주가 1위였는데 도 간 비교에서는 경북이 1등이고 전남이 꼴찌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호남의 전반적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광주만 홀로 성장한 것이다. 서울이 지방의 돈과 인재를 다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것과 똑같이 광주도 호남의 희생과 출혈을 자양분 삼아 나 홀로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참고로 같은 기간 경기도의 GRDP 성장률은 무려 5.59배, 충남은 6.22배다. 호남의 지식인들은 이 비상한 시국에 다른 동네에 있지도 않은 패권을 비난하기보다는 중앙의 독식을 비판하든지, 아니면 호남의 불균형 발전을 문제 제기하고 이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는 게 어떨까.
세상은 요지경이다. 위 통계 수치는 대전·충남 지역의 <디트뉴스> 김학용 주필의 칼럼에서 간추린 것인데 그는 최근 '영남당'과 '호남당'이 각축을 벌이는 것을 '영호남 패권주의'라고 명명했다. 과거 자민련에서 실제로 "영호남 패권주의를 깨자"라는 구호를 내걸기도 했단다. 재미있지 않은가. 영남인인 나는 서울 패권에 주목하고, 호남인 김욱은 영남 패권을 비난하고, 나는 김욱에게 호남 패권에도 관심 가지라고 하는데, 정작 충청도에 사는 김학용은 우리를 보고 영호남 패권이라 싸잡아 비판한다.
일부 호남의 지식인들이 제기하는 영남 패권 문제는 광주의 그 엄중한 역사적 무게와 제1야당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에겐 한 지역의 이기주의 정도로 비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그러지 않았나. 정치적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대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노무현이 시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해가 원한으로 친노에 대한 호남의 거부감을 확산시키는 데 불쏘시개 노릇하는 괴소문들이 많다. 헛소문이거나 전후 맥락이 제거된 왜곡된 정보들이다. 아직도 온라인상에서는 "참여 정부 때 청와대에서 호남 사람은 청소부까지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떠돈다. 너무나 황당해서인가. 아무도 바로잡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정동영을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이 정동영 후보를 지원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정동영이 노무현의 지원을 거부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 역시 아무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문의 근원은 무엇일까. 찾아보니 주미 대사관에서 미국 국무부로 보낸 정보 보고가 한국 언론에 공개된 것이었다. 청와대 행정관이 미 대사관 직원을 만나 노무현의 지지자들, 즉 노사모 일부가 정동영 아닌 문국현과 유시민을 돕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사모 일부가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엉뚱하게 "노무현이 정동영을 버렸다"는 식으로 지금도 사실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또 불순한 소문이 돌면서 증폭을 거듭하다보니 기정사실이 되어버린다. 최근 홍세화는 한 칼럼에서 "스스로 '부산 정권'이라고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언급하며 이를 "투항적 영남 패권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부산 정권' 발언은 문재인이 한 것이다. 2006년 5월 부산 지역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지방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는 지적에 그가 대통령이 부산 정치인임에도 부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답답해하며 "부산 정권인데…"라고 했던 말이다.
이때 원래 이 자리에 초대받지 않았지만 우연히 참석했던 모 언론사 기자가 이 발언을 담아 기사를 썼는데 이를 본 보수 신문들이 이 발언을 제목으로 뽑아 다시 대서특필하면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은 지금까지도 전후 맥락이 제거된 채 매우 의도적이고, 또 갈등유발을 위한 불순한 방식으로 계속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보수 언론의 장단에 우리가 10년째 춤을 추고 있는 꼴이다.
호남인들이 모욕적으로 느끼는 게 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이다. 그런데 노무현이 야당인 한나라당에 총리 임명권과 내각 조각권을 주면서까지 얻으려 했던 게 무엇일까? 김욱은 책 말미에 독일식 비례 대표의 실현을 호남인의 미래로 보았는데 노무현이 자신의 권력을 내주고 얻으려 했던 것은 바로 독일식 비례 대표제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그 저의를 의심했고 무엇보다 여당 내부로부터의 총질이 시작돼 결국 실패한 제안이 됐다. 호남으로부터는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된다. 김욱은 독일식 비례 대표제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1987년 당시의 거대한 물결이 필요하다고 예상했다. 앞으로 그런 물결은 없을 것이다.
또 호남인들에겐 호남 후보 불가론이 모욕적으로 다가갔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치적 산술의 문제이지 패권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은, 심지어 영남인도 그런 계산(?) 없이 살아가고 투표한다. 김욱은 반영남 패권주의에 투항할 것을 요구하는데 내겐 출신 지역은 중요하지 않다. 민주주의, 평화, 복지를 우선시할 사람이나 정당이라면 투표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 호남의 인구 열세 때문에 '그래도 호남보다는 영남 후보가 나서는 게 야권의 정권 탈환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일반화되다보니 이것을 이데올로기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다 치더라도 호남의 모든 문제를 지금은 사라져 버린 친노에게 있는 것처럼 희생양 삼아 몽땅 뒤집어 씌워 욕하는 것은 상식적이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하여
2007년 대선 때 나는 정동영에게 투표했다. 정동영이 특별히 좋아서 찍은 것은 아니다. 우선 '대통령 이명박'이 싫었고 정동영이 민주주의에 더 적합한 사람이라 여겨 찍었다. 아내에게도 정동영 밖에 없다고 설득해 그에게 투표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호남 사람들이 나 좋아서 찍었나? 이회창 보기 싫어서 찍었지"라고 말 한 것과 비슷하긴 하다.
생각해 보니 정동영이라는 정치인은 부산 정치엔 각별하게 다가오는 인물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 의장이던 그가 선거 유세 중 그 유명한 노인 폄하 발언을 했다. 그때 부산은 20% 이상 앞서던 지역구가 다섯 개나 되는 쾌조의 진군을 하며 꿈같은 기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동영의 그 발언 때문에 당 지지도는 열흘 동안 무려 25%가 빠졌고 결국 선거 5일 남겨놓고 그는 사퇴해야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지지도 추락이 멈추긴 했다. 그러나 그 사이 부산은 20% 이상의 리드가 다 뒤집혀버렸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152석의 과반의석으로 잔치가 벌어졌지만 부산은 전패였다.
그때 그들 중 네 명은 오늘도 부산 시내 골목골목에서 유권자들에게 인사를 거듭하고 힘겹게 다니고 있다. 12년이 지났다. 이들은 어쩌면 이번이 4선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것일 수도 있었던 자들이다. 그래도 이들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여기고 힘을 내서 다니고 있다. 군말 없이. 이들에겐 지금 정동영을 탓할 시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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