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 미국이 북한의 4차 핵실험을 사전에 알았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존 커비 국무부 대변인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4차 핵실험 직전 북미 접촉은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 제안→비핵화를 포함시키자는 미국의 역제안→북한의 거부 및 결렬'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북한은 뉴욕 접촉에서 평화협정 협상에 미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졌을 공산이 크다. 미국 NBC 방송이 북한의 핵실험 직후 미국의 사전 인지설을 보도한 것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미국의 입장 변화 여부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평화협정 논의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진전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했었다.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이 평화협정 논의에 비핵화를 의제에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이 '선(先) 비핵화, 후(後) 평화협정'에서 두 가지를 병행해서 협상하자는 쪽으로 입장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미 공조의 현실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가 맞다면 박근혜 정부가 역사상 최고라고 자화자찬했던 한미관계도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 계획을 사전에 알고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다면, 한미 간 정보 공유에는 큰 허점이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한미 양국은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이라는 입장을 찰떡같이 유지했었다. 그런데 미국이 두 가지 문제의 병행 논의를, 그것도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북한과 협의했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이 '배신'한 셈이 된다.
왕이를 겨냥한 미국의 언론플레이?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와 관련해 두 가지 문제를 더 따져봐야 한다. 하나는 왜 이 시점에 이런 민감한 보도가 나왔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보도의 진위 여부이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도 이 보도의 민감성, 특히 한미관계에 미칠 파장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월스트리트저널>에 흘린 것일까? 중국을 겨냥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 보도가 나오기 나흘 전에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제안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정신에 부합하고 필자를 포함한 일부 전문가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접근법이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한 6자회담 참가국 정부가 비핵화-평화협정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제안이다. 중국의 제안을 거부하면 '미국은 대화에는 흥미 없고 북핵 위협을 이용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는 의구심이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제안을 거부한 쪽은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다. 미국은 평화협정 논의를 개시하면서 비핵화도 포함시키자고 역제안했는데 북한이 거부했다고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의 진위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에서 동시 협상으로의 입장 변화 여부다. 미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 '이전'에는 물론이고, 중국의 제안이 나온 '직후'에도 "북한 비핵화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혀왔다. 과연 비핵화와 평화협정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오락가락 할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북한이 미국의 역제안을 일축한 게 맞느냐는 문제이다. 북한은 핵실험 이전에 평화협정 논의 개시를 요구하면서, 이렇게 되면 "미국의 안보 우려도 해소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비핵화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물론 비핵화의 수위를 놓고 북미간에 신경전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북한은 '동결'을 제안했고,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비참한 건 한국
이렇듯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는 다각도로 따져봐야 할 문제들을 품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다. 결과적으로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를 동시에 병행하자'는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한 쪽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것이다. 한미 양국은 왕이 부장의 제안 직후 "북한 비핵화가 우선"이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22일 현재까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한심하고도 비참한 현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기실 필자가 <경향신문> 기고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한국이 중국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미국을 설득해야 할 이유는 넘쳐난다. (☞관련 기사 : 제발 이것만은 받자)
우선 한미동맹이 중국의 제안을 거부하면, '협상에는 관심이 없고 북핵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중국의 의구심은 더욱 증폭된다. 한미동맹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불신이 깊어지면, 우리가 직면할 외교적, 안보적, 경제적 리스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중국의 제안을 수용하면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한중관계가 반등할 수 있다. 좌고우면하고 있는 미국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제안은 북한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중 지렛대를 내포하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면 북한의 추가적인 핵실험이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차단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 열리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북핵 고도화는 차단할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다. 반면 한미 양국이 중국의 제안을 수용했는데 북한이 거부하거나, 비핵화에는 관심이 없고 평화협정에만 집착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한미동맹은 강력한 대북 압박과 제재에 중국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렛대를 갖게 될 것이다.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협상은 개성공단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장마철이 되면 배수 시설을 가동할 수 없기 때문에 개성공단은 물에 잠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살리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되거나 막대한 복구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의 핵과 로켓, 남한의 강경 대응에 맞물린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협상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줄 수 있는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과 평화협정을 위한 4자회담을 개시하면서 남측에서 개성공단에 전력을 보내고 관련 인력을 투입하는 방안을 강구해볼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는 일언지하에 비핵화-평화협정 논의 제안을 거부하고 말았다.
답답하고 한심하긴 야권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동시 협상론은 중국보다 한국 야권에서 먼저 나왔어야 했다. 북한의 핵 고도화, 한반도 평화의 위기, 산소마스크를 낀 개성공단과 남북관계, 냉전보다 못한 신냉전으로의 돌입, 민생과 민주주의의 퇴행 등 '복합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권은 '안보 우클릭'이라는 희한한 말로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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