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한 핵심 주변국인 중국과 미국이 '북미 평화협정'을 연이어 거론했기 때문이다.
중국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지난 17일 베이징(北京)에서 줄리 비숍 호주 외무장관과 양자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비핵화를 실현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을 동시에 추진하는 협상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선(先)비핵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왕 부장의 제안은 북한이 원하고 있는 '북미 평화협정'과 관련한 논의가 진지하게 추진돼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선(先)비핵화' 입장에서 양보하게 된다면, 중국이 이와 관련해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 부장의 제안이 나온 직후 미국과 한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최우선 과제"라며 이를 일축했다.
그러나 이날 미 국무부 존 커비 대변인이 "북한이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를 일부 시인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고 있다. 커비 대변인은 보도와 관련해 "우리는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 제안을 신중히 검토한 후 비핵화가 논의에 포함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즉 북한의 평화협정 논의 제안이 먼저 있었고, 미국이 비핵화 의제를 포함시키자고 역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아가 미국이 "비핵화를 실현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안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우리 정부는 그러나 "비핵화가 먼저"라며 "한미 공조"에 이상이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내놓았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22일 "외교부에서 설명할 것"이라며 "혹시 청와대에서 설명할 게 있는지 파악해보고 알려드릴 게 있으면 알려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청와대는 관련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한국과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가 우선시 돼야 한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며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서도 비핵화가 우선시 돼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특히 "평화협정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기존 입장은 변한 것이 없다"며 "한미 양국은 북핵 등 북한문제 관련 제반사항에 대해 긴밀히 협의하며 공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도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는 비핵화 논의가 우선"이라며 "평화협정은 미국과 북한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국이 주도적으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염두해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면서, 한국 정부가 현 정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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