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연락이 된 관계로 어머님이 대문 앞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다. 시골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님을 가끔씩 찾아 위로해온 지역의 민노총 관계자와의 동행이었고, 기자 또한 나주가 고향이어서 그런지 이야기하는 동안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정하고 편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식들과 일상을 이야기 하듯 편하게 말씀하셨다.
한 위원장은 제2대 나주시의원을 지낸 한화수 씨와 어머니 임선복 씨의 3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선친인 한화수 전 의원하고는 인연이 있었지만, 한 위원장이 그의 둘째 아들인지는 최근에서야 알았다.
한 위원장은 마을 인근에 위치한 봉황초등학교와 봉황중학교를 졸업한 후, 실업계인 광주기계공고를 졸업했다.
한 위원장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1~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당시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한 집에서는 취직이 잘되는 실업계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대세였다. 실업계 중에서도 상고나 공고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바로 취업이 되는 시대였다. 한 위원장도 부모님의 추천에 두말없이 광주기계공고로 진학했다.
심성 착하고 가족에 대한 희생정신도 높아
어머니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상균이가 '어머니,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해야 쓰겄소?' 하고 물었어. 그때 내가 '대학을 보냈으면 좋은데 우리 형편이 안 돼서 못 보내겠다. 어째야 쓰것냐?' 하고 되물었지. 그렇게 말해놓고 마음이 많이 안 좋았어. 부모 잘못 만난 죄라 생각해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날 밤에 상균이가 '어머니, 그럼 나도 내 살길을 찾아 취직을 해야 쓰것소' 하더니 전기불도 없는 어두운 밤에 혼자서 경운기로 논 한 단지를 모를 심을 수 있게 다 로타리를 쳐 놓고 들어왔어. 대학 못가는 아픔을 잊으려고 일로 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었지"라고 회고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어머니는 "그랬는데 다음 날 아침 '어머니, 내가 모를 심을 수 있게 논 한 단지를 갈아 놨으니까 알아서 심으세요. 나도 일단 부산 형님한테 가서 내 살길을 찾아 봐요 쓰것소' 하고 부산으로 갔는데, 그 길로 취직을 한 곳이 지프차를 만드는 공장이었어"라고 말을 이었다.
당시 지프차를 만들던 공장은 거화자동차였고, 그 공장이 쌍용자동차로 이전되어 한 위원장은 그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쌍용차공장의 노동자로서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됐고, 2009년에는 노동조합 위원장이 됐다. 그때가 바로 쌍용차가 경영 악화를 이유로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했던 시기였다.
77일간의 장기 옥쇄파업에 3년간 옥살이도
그는 조합원들과 함께 해고는 살인이라며 77일간의 장기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이 파업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3년간 옥살이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교도소에 있을 때 많은 동료들이 해고로 인한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어 힘들어 했다"고 전하면서 "이때부터 아들의 험난한 노동운동가의 삶이 시작된 것 같다"고 술회했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는 "공부 잘한 상균이를 공고에 보냈던 게 아직도 아쉽고 한이 된다"고 토로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대학을 보냈다면 노동운동과 거리가 먼, 좀 더 편하고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겠나 하는 푸념도 많이 했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혀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투사가 되어버린 아들을 둔 어머니는 그래도 어머니여서 "옥살이를 반복하는 아들의 고생이 안타까워 그런 후회를 하곤 했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어머니는 아들 상균이의 고행이 지프차 공장에서 다니면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그 공장에 취직만 안했어도, 쌍용자동차에 근무만 안했어도 이런 험난한 인생을 살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 눈치다. 이 모두가 대학을 보내주지 못한 어머니의 책임이란 듯이 말이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 어머니는 아들의 세상을 사는 거친 인연도 어쩔 수 없는 아들 업장이라 생각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다.
순해서 남한테 듣기 싫은 소리 한번 못 하는 아들인데
아들의 성품에 대해서 묻자 어머니는 "상균이는 말도 못하게 착해. 남한테 싫은 소리라고는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돈 낼 자리는 앞장서곤 했다" 면서 "순해빠져서 남한테 듣기 싫은 소리 한번 못 하는 아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일을 앞장서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 어머니는 아들이 뉴스에서 나쁜 인물로 포장되어 나올 때 마다 속이 상해 눈물을 흘려야 했다. 어머니는 "내 아들 상균이가 도둑질을 한 것도 사람을 때려죽인 것도 아니다. 다만 서민과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앞장선 착한 아들일 뿐인데 천하의 나쁜 사람 취급하는 방송에 화가 나서 남 몰래 혼자 눈물을 흘린 적이 많다"며 억울해 했다.
"앞전에 면회 가서 그랬어. 니가 도둑질을 했냐?, 사람을 때려죽였냐?, 서민들, 노동자들 돕다가 이렇게 끌려왔으니, 그것도 죄가 된다면 죄가 있는 대로 받고 당당하게 나오라"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주문을 하기도 했다.
또 어머니는 "경찰과 방송들 빼고는 다 너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지역 사람들도 나에게 너는 앞으로 키워야할 인물이라고 인사말을 건네면서 힘을 내라고 한다"며 주변의 분위기를 전해 아들의 옥중투쟁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기가 죽으면 아들이 가슴 아파할까봐 절대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런 행동을 하면 아들의 가슴 속이 미어지고 힘이 빠진다"면서 "절대로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미 어머니는 한상균 위원장보다 더 정신력이 강한 투사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옥살이를 하더라도 너는 나오는 밥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 그것이 엄마를 위해서도, 너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한 자세"라고 말한다면서 "나도 상균이가 걱정할까봐 밥 안남기고 잘 먹고 있다고 말하고 왔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아들 건강을 우선 챙기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라도 제발 정부가 노동자들 편을 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어머니는 평소 갖고 있던 불만을 드러냈다. "예전에는 그냥 스쳐들어 몰랐는데 뉴스를 보면 정부는 돈 많은 사람들 편이더라. 돈 많은 사람들이나 기업가들은 잘못을 해도 솜방망이 처벌이고 노동자들이 다 같이 먹고 살게 해달라고 주장하고 모여서 데모를 하면 교도소에 보내는 게 우리나라의 실정"이라면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지 않아도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이 됐으면"
하지만 어머니는 곧 "어렵고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치라고 돌아가신 남편에게 들었다"면서 "그런 날이 빨리 와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지 않아도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밝혔다. 위정자들이 가슴 속에 꼭 새겨야 할 이 명언을 끝으로 어머니와의 대화는 마무리됐다.
어머니와 대화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한상균 위원장이 경찰 출두 전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말들이 강한 메시지가 되어 머리 속에 생생히 살아난다.
"저는 해고 노동자입니다.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해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포기해야 하고, 단란했던 가정은 파탄이 났습니다. 저는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개악을 막겠다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노총 위원장입니다. 저는 80만 조합원과 2000만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책임져야 할 노동자 대표로서, 부끄럽지 않게 제가 감당해야 할 책임과 몫이 있다면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레시안=시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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