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나는 잘 모른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 나누지만 딱히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같이 무언가를 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했던 말 하나가 잊히질 않는다. 2009년 8월 6일이었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비가 지금 오네요."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비 말고 없었던 순간
그날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77일간의 파업이 종결된 날이었다. 경찰특공대 100명과 경찰병력 2500명이 투입된 그날, 아찔한 높이의 공장 지붕에서 한 노동자가 떨어졌다. 인권침해감시단으로 평택에 갔던 나는 허리가 부러진 노동자를 만나러 병원을 찾아갔다. 당시 상황을 물어봐야 하는 모진 짓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말하기 힘들어하는 그의 곁에서 그의 아내가 말했다.
"이렇게 얘기해봤자 결국 사람들은 우리를 탓하잖아요. 지금까지도 이 엄청난 폭력이 안 알려진 것도 아닌데, 이제 더 얘기할 힘이 없어요."
쌍용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 이후, 사측이 물과 의약품 반입마저 차단하고 경찰이 헬기로 최루액을 날라 공장 안으로 쏟아 붓거나 테이저건을 사용해 다치게 하는 일들은 이미 알려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탓했다. 정부는 이기주의와 불법이라는 말로 몰아붙였고 언론은 정부를 거들었으며 가까운 동료였던 노동자들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 잔인한 여름의 어느 날 누군가는 고무총탄을 맞고 누군가는 방패에 찍혀 팔이 부러지면서 공장에서 쫓겨나야 했다. 국가폭력은 무엇이 잘못인지 따지는 일에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한상균과 공장을 점거했던 노동자들이 경찰호송버스에 태워지던 그때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최루액이 쏟아지던 때 마실 물도 없으니 씻을 수는 더욱 없어 한없이 기다렸던 비. 그러나 공장 밖으로 내쫓긴 그때, 이미 반가울 수 없는 비였다. 그래서일까. 내게는 이 말이 어떤 빚처럼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기다리던 비가 온 순간은,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비 말고 없었던 순간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현실 앞에 다시 목이 타는 노동자의 모습에 나는 '한상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살아나온 몸들이 죽음을 껴안고 살아내던 시간
무자비한 국가폭력을 견디고 살아나온 몸들에 고마워할 수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폭력은 무기를 갖춘 경찰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리해고 자체가 폭력이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발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입천장까지 차올랐지만 조합원들은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말이 씨가 될까 두려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움츠리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2011년 '희망버스'가 엿보게 했던 희망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함께 만들었던 희망이기도 했다. 그해가 저물어갈 때 쌍용차 평택 공장 앞에 희망텐트촌이 만들어졌다.
2012년의 첫날을 자원해 그곳으로 갔다. 왁자지껄했다는 전날의 송년행사를 떠올리기 어렵게 조용했다. 몇 명의 조합원들과 장작불을 가운데 두고 불을 쬐는 동안, 세 아이가 1년 동안 저금통에 모은 돈을 전하러 온 이들이 있었고 라면 두 박스를 들고 와 슬며시 놓고 가는 이도 있었다. 공장 안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해고 노동자들의 곁에 서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저녁에는 조합 사무실 안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시작했다.
'제이 스치는 바람에 제이 그대 모습 보이면….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살아나온 몸들이 죽음을 껴안고 살아내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삶만큼 무겁지도 죽음만큼 무섭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석쇠 위에 석화를 먼저 올릴지 쭈꾸미를 먼저 올릴지 투닥거리는 시간이기도 했고,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괜히 핀잔주다가도 어느새 둘러앉아 목청을 뽑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수행할 자체 미션을 정했다. 찌뿌둥한 하늘로 기어이 태양이 떠오르던 아침, 노끈으로 기타를 둘러메고 공장 정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수감 중이라 그 자리에 없었던 '한상균'이라는 이름도 겹쳐두기로 했다.
다시 평화를 꿈 꿀수 있는 유일한 이유
171일의 송전탑 농성이 있었고, 101일의 굴뚝 농성이 있었고 수차례의 단식이 있었다. 그사이 해고는 무효라는 판결을 뒤집는 대법원 판결이 있었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연대의 장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문 앞도 그러했으나 대한문이 아닌 곳에서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스스로 연대의 장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다. 2014년 겨울 한상균이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됐다는 소식은 내게 이런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2015년 민주노총에 거는 기대도 그랬다. 물러서지 않고 만들어내는 장소에서 연대를 이뤄내기를.
민중총궐기는 그랬다. '민중총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정부나 언론은 공격을 시작했다. 민주노총과 여러 단체들이 사회에 대단한 혼란을 일으킬 것처럼 몰아가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 조합원들의 권리를 지키느라 노동개혁을 못하고 있다며 밟아댔다. 그러나 혼란이 없는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가 아니다. 2009년 공장을 나오며 노동자들이 터덜터덜 걸어갈 때의 정적과 작은 흐느낌들, 2012년 천막도 분향소도 깔개조차도 빼앗겨버린 거리의 차가운 밤, 이런 것은 평화가 아니다. 기다릴 것이 비 말고는 없는 순간, 다시 평화를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서로 등 기대는 사람들, 함께 하는 조직이다.
한상균은 레인메이커가 아니다
'한상균'을 구속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노동조합, 민주노총, 또는 함께 살기를 도모하는 모든 조직에 평화를 꿈꾸지 말라는 경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부는 민주노총이 가진 것을 움켜쥐려고만 드는 이기적 집단이라고 한다. 이미 체포영장이 떨어진 위원장의 체포를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범법 집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기본적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가진 것도 지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조직이 아니라 가진 것 이상을 넘볼 수 있는 조직이다.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한 위원장을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잡아간다는데 말이 아니라 몸으로도 막을 수 있어야 조직이다.
민중총궐기 건으로 위원장 말고도 구속된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고 소환자 수는 1500명을 넘는다. 이들 모두 평화를 꿈꿨을 뿐이다. 석방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다만 나는 '한상균'의 이름을 조금 더 내밀고 싶다. 그 이름은 한상균의 것만이 아니다. 77일의 공장 안에서, 외로운 감옥에서, 아찔한 고공과 시린 길바닥에서, 함께 살기를 도모한 사람들이 오늘도 살아내고 있는 시간이 빚어낸 이름이다.
'한상균'은 레인메이커가 아니다. 그는 비를 기다리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기다릴 것이 비 말고 없는 세상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도 그렇다면, 그것이 '한상균'이 석방되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한상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한상균 석방 콘서트
일시 : 2016년 1월 21일(목) 오후 7시
장소 :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지하 대성당
소셜펀치 www.socialfunch.org/hsgfree
한상균을 기다리는 사람들[김덕진, 이은정(천주교인권위), 고동민(쌍용차지부), 박진, 아샤(다산인권센터), 배서영(4.16연대), 유명희(노동자뉴스제작단), 박병우, 곽이경(민주노총), 지정환(공연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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