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입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는 3월을 맞아 제48강으로, 1919년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은밀히 준비되고 비폭력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된 서울의 역사적인 현장을 찾아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서울학교 제48강은 2016년 3월 13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 옆에 모입니다.(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15(재동 83)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북쪽(진행)방향으로 100m / 버스-간선(파랑) 109번, 151번, 162번, 171번, 172번, 272번 / 지선(초록) 7025번을 타고 돈화문(비원) 또는 종로경찰서 앞에서 하차 /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헌법재판소-손병희 집터-중앙고등학교-만해당(유심사터)-대각사-탑골공원-천도교중앙교당-점심식사 겸 뒤풀이-승동교회-태화관터-기독교회관-종루-보성사터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1만세운동 유적지>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의 치밀한 계획
1919년 3·1만세운동이 발생한 사상적 기저는 3백년간 이어져온 실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안착되어 동학혁명,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민중들은 혁명의식이 고취되었고, 때맞춰 발생한 조선왕조의 멸망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주창이 ‘민족자주독립국가’에 대한 민중들의 간절한 열망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탄압 속에서 제3세 교조에 오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1905년 교명(敎名)을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고 망명지 일본에서 1906년 귀국하였으나 이미 국운은 기울어 1910년 한일합병의 비운을 맞게 되자 민족구원을 위한 다양한 준비를 주도면밀하게 추진하며 마침내 3·1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손병희는 천도교 교단 내에 민주적인 의사원제도(議事院制度)를 실시하여 지방대표를 중앙에 상주시켜 유사시에 대비하고, 비밀리에 중앙대교당(中央大敎堂)의 신축안을 내놓아 교당신축기금모금운동 명목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합니다. 또한 우이동에 봉황각수도원(鳳凰閣修道院)을 짓고 그곳에서 지방대표 483명을 선발하여 7차례에 걸쳐 49일간씩 수행을 통해 정신적인 준비를 갖추게 하고, 전국의 교도에게 1919년 1월5일부터 2월22일까지 49일간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를 여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전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에 대한 방략을 세웠습니다.
국내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해외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재미동포(在美同胞)들이 1918년 12월1일 재미한인전체대표자회의를 열고 파리강화회의에 이승만(李承晩), 민찬호(閔瓚鎬), 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한국대표로 보내기로 결의하였으나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뒤이어 재일본조선유학생학우회도 조선독립청년단을 구성하여 1919년 ‘2·8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 중국에 망명한 애국지사들도 대한청년단의 결정으로 김규식(金奎植)은 파리로, 선우혁(鮮于赫)은 국내로, 장덕수(張德秀)와 조용운(趙鏞雲)은 일본으로, 여운형(呂運亨)은 만주와 러시아로 떠나,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까지 일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움직임은 기독교청년회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에 알려졌으며,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고무되어 있던 차에 건강했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21일 중병에 걸려 그 이튿날 붕어(崩御)했다는 일본당국의 발표에 대하여 ‘일제의 고종독살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3·1만세운동이 일어날 분위가가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3·1만세운동은 초기에는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천도교는 손병희(孫秉熙)를 중심으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이 합류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합의를 보고 1월 하순 경 독립운동의 3대원칙으로 대중화(大衆化) 할 것, 일원화(一元化) 할 것, 비폭력(非暴力)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2월 초에는 최린이 중앙학교의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과 상의한 결과,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여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일본정부와 양원(兩院)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내고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을 일으켜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유림(儒林)들이 참여하지 못한 사연
천도교계에서 주도한 3·1만세운동의 최초 계획은 각 종교단체와 대한제국 시대의 저명인사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우는 것이었는데, 대한제국의 저명인사인 박영효(朴泳孝), 한규설(韓圭卨), 윤용구(尹用求), 김윤식(金允植), 윤치호(尹致昊) 등을 교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기독교계는 평북 정주에 있던 이승훈(李昇薰)을 교섭한 결과 2월 11일 이승훈이 상경하여 송진우, 신익희(申翼熙) 등과 협의하여 천도교와 기독교가 원칙적으로 함께 하기로 하였고, 최린이 평소 친분이 있었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만나 불교계가 또한 함께 하기로 하였으며, 유림(儒林) 측은 곽종석(郭鍾錫)에게 참여를 권유했으나 교섭에 실패하였습니다.
3·1만세운동에 유림들의 참여가 없었던 이유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3.1만세운동 전에 성태영에게 독립운동의 낌새를 전해 들었으나 부모님의 병환으로 바로 상경하지 못하여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며, 이를 통탄하며 김창숙은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독립진정서인 <파리장서(長書)>를 작성한 후 파리로 향했으나 파리로 떠나지는 못하고 상해에서 <파리장서>를 영어로 번역해서 파리강화회의와 해외 각국, 그리고 고국에도 보냈습니다.
기독교계의 움직임은 이승훈이 천도교와 함께 하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하였으나 그때 이미 기독교계는 독자적으로 평안도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의 두 갈래로 운동이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기독교계는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로 있던 박희도(朴熙道)와 함태영(咸台永)이 감리교 계통의 인사들과 청년학생들을 규합하였고 이승훈은 평안도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각자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가 마침내 2월21일 세브란스 병원 내에 있는 이갑성(李甲成)의 숙소에서 기독교계 간부들의 동의를 얻어 24일 천도교 측에 통보하였습니다.
불교계는 만해 한용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만해가 주석(住錫)하며 불교대중계몽지인 <유심(惟心)>을 1918년 9월부터 제3호까지 발행한 계동(桂洞)에 있는 유심사(惟心社)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1911년 종로구 봉익동(鳳翼洞)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하고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하고 있던 백용성을 2월25일경 대각사로 직접 찾아가,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 한다고 하니, 백용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를 투합하게 됩니다.
한편 1918년부터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한용운은 1919년 2월 28일 10,000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수받고 그날 밤 평소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 학생들을 자신의 계동 집인 유심사로 모이게 하여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이때 학생들은 김봉신,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입니다.
만해 한용운과 중앙학림 학생들의 활약
만해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여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한 결과,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를 하게 하였으며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는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서 마련되었는데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를,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를,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를, 정병헌은 구례 화엄사를 책임지고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1일 새벽 3시에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1일에 있은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하여 지역별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중앙학림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강제 폐교까지 당하게 됩니다.
한편 학생들의 움직임은 기독교측의 박희도가 주동이 되어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朱翼)과 재학생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璧)과 윤화정(尹和鼎),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의 윤자영(尹滋英), 세브란스의전(醫專)의 이용설(李容卨), 경성공전(京城工專)의 주종의(朱種宜), 경성의전(京城醫專)의 김형기(金炯璣) 등 8명을 관수동(觀水洞) 대관원(大觀園)에 초대하여 대체적인 합의를 봅니다. 이들은 각자의 학교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규합하기로 하고 주익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려던 차에 종교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학생들도 합류하기로 하고 그 원고를 김원벽이 승동예배당(勝洞禮拜堂)에서 불태워버리고 마침내 종교계와 학생들이 참여한 3·1만세운동의 지도부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지도부가 구성되자 제일 먼저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의 선정 작업에 들어갔는데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李鍾一), 박준승(朴準承), 나인협(羅仁協), 임예환(林禮煥), 이종훈(李鍾勳), 권병덕(權秉悳), 양한묵(梁漢黙), 김완규(金完圭),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나용환(羅龍煥) 등 15명, 기독교 측에서는 이승훈, 양순백(梁旬伯), 이명룡(李明龍),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길선주(吉善宙), 신홍식(申洪植), 박희도,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이갑성,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이필주(李弼柱), 박동완(朴東完), 신석구(申錫九) 등 16명, 불교 측에서는 한용운, 백용성(白龍城) 등 2명으로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최남선에게 의뢰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 위해 민족 대표 33인이 모인 자리에서 천도교 손병희 교주, 기독교장로회 길선주 목사, 기독교감리회 이필주 목사가 서명을 하고 네 번째로 불교계 대표로 백용성이 서명을 한 뒤 한용운은 다른 종교단체의 대표들에게 순서를 양보하기 위해 공간을 비운 채 뒷부분에 서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도부에 속했으나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과 개인사정과 거사 이후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갈 인물들은 <독립선언서>의 서명에 빠졌는데 중앙학교의 송진우와 현상윤, 정노식(鄭魯湜), 김도태(金道泰), 최남선, 임규(林圭), 박인호(朴寅浩), 노헌용(盧憲容), 김홍규(金弘奎), 이경섭(李景燮), 함태영(咸台永), 안세환(安世桓), 김세환(金世煥), 김지환(金智煥), 강기덕, 김원벽 등 16명이었습니다.
특히 최남선은 학자로서 일생을 마치고 싶다며 독립운동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독립선언서>만 작성하겠다고 하여, 최린과 현상윤이 이에 찬성하여 최남선은 민족대표에서는 빠지고 <독립선언서>만 작성하여 최린에게 건네주었는데 한용운이 독립운동을 책임지지 않을 사람이 선언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다시 쓰겠다고 하였으나 이미 탈고가 끝난 상태여서 할 수 없이 <독립선언서> 마지막에 만세운동의 행동지침인 <공약삼장(公約三章)>의 내용을 한용운이 첨가하였습니다.
완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공장장 김홍규가 채자(採字)하고 사장 이종일이 교정을 본 후 21,000부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이종일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28일 아침, 지도부 학생들이 승동예배당에 모여 종로 이북은 불교학생이, 종로 이남은 기독교학생이, 남대문 밖은 천도교학생이 맡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보성사는 1910년 말 창신사와 보성학원 소속 보성사인쇄소를 합병하여 만든 천도교 계통의 인쇄소로서 종로구에 있는 조계사 경내에 있었으며 기념비와 이종일의 동상은 현재 조계사 후문 맞은편 근린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거사일은 고종황제의 국장일(國葬日)인 3월3일로 하려고 했으나 국장일에 거사하는 것은 불경(不敬)이라 하여 하루 전날로 하려 했으나 기독교 측에서 그날은 일요일이므로 피하자고 하여 결국 3월1일로 정해졌습니다. 2월28일 밤에 33인 대표 중에 20여명이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 집에서 거사 계획에 대한 최종 검토를 한 결과, 3월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한 최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에서 거행하기로 수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학생과 민중이 많이 모여 일본 경찰과의 무력충돌을 염려하여 지도부만 따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는 보성전문학교 강기덕과 연희전문학교 김원벽이 미리 연락하여 오전 수업만 마치고 학교별로 모여든 4, 5천명의 학생들이 팔각정 단상에 태극기를 내걸고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으나 태화관(泰和館)에서 1차로 독립선언을 하고 탑골공원으로 합류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예정을 바꾸어 현장에 나오지 않자 경신학교(儆新學校) 졸업생 정재용(鄭在鎔)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한편 정오(正午)에 명월관(明月館)의 지점인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 33인중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 등 4인이 빠진 29명이 모여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2시가 되자 한용운(韓龍雲)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최린(崔麟)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있노라고 총독부에 전화를 하게 하여 모두 경찰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과 군중들은 가두시위행진을 하였는데 때마침 국장(國葬)으로 전국에서 올라온 민중들이 합류하여 수십만 명이 서울 시내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행진하다가 날이 저물 때쯤에는 교외로 퍼져나가, 오후 8시경에는 마포 전차 종점 부근에서, 밤 11시쯤에는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만세운동이 이어졌으며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으로 시위하여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이러한 비폭력 평화적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헌병 이외에도 용산에 주둔한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동원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행진하는 시위대에 의해 저지선이 뚫려 할 수 없이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시위가 과격한 양상으로 발전하여 시위대가 일본 경찰파출소를 투석, 습격하게 되고 이에 일제의 군경은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말미암아 4월에 접어들면서 시위가 현저히 줄어들고 표면적인 시위운동에서 비밀결사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산발적으로 약 3개월 가량 시위가 계속됩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기록에는 집회 참여인원이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가 4만7천여 명이었다고 하나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는 46만3086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1919년 3월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가 1,678만8천400명이었으니 전체 인구 중 2.76%에서 2.97%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조선총독부의 기록대로라면 전체 국민 중 6.31%가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3·1만세운동 후 국내외에 세워진 임시정부들
3·1만세운동은 대부분의 지도부 요인들이 투옥되어, 지속적이고 통일된 조직적 항쟁을 추진할 새로운 조직체가 요구되었으므로 이에 부응하여 국내에서는 4월23일에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상해에서는 4월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러시아에서는 3월17일에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수립되었고 간도(間島)에는 군정부(軍政府)가 조직되었는데, 이렇듯 여러 조직들이 난립한 것은 일제의 감시와 횡포가 심하여 단일한 대오를 갖추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국내 조직인 한성임시정부는 해외의 다른 조직들보다는 늦게 구성되었지만 전국 13도(道) 대표의 국민대회(國民大會) 명의로 수립된 것으로 3·1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한성임시정부의 계획은 3월17일경에 한남수, 홍면희, 이규갑, 김사국 등이 내자동 한성오의 집에 모여 논의하였는데, 한성오는 당시 현직검사로 전직검사 출신 변호사 홍면희와 친분이 있어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결정사항은 각 독립운동단체를 망라하여 국민대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천도교 안상덕(安商悳), 기독교 박용희(朴用熙)·장붕(張鵬)·이규갑(李奎甲), 유교 김규(金奎), 불교 이종욱(李種郁)을 대표로 선정하여 4월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대회’를 열어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추진단계에서 계획이 수정되어 날짜는 4월23일, 장소는 서울시내 서린동에 있는 중국음식점인 봉춘관(奉春館)에서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기로 하였으며, 마침내 4월23일 봉춘관에 13도 대표 24명이 모여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 2호를 발표한 후 가까이에 있는 종루에 모여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한성임시정부가 탄생하였는데, 이미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와 연해주대한국민의회가 있어 3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습니다.
임시정부의 이러한 난맥상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미주(美洲), 중국, 러시아의 교포 대표자들이 상해에 모여 논의한 결과 3·1만세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법통(法統)은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위치는 상해(上海)에 둔다고 결의하여 비로소 단일대오로서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 9월15일에 탄생되었습니다.
특히 한성임시정부의 선포문과 당시 국민대회취지문 및 약법의 원본은 1986년 4월 서울 종로구 이화장(梨花莊)에 있는 이승만의 유품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 공개되어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선포를 문헌으로 뒷받침하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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