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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활짝, 토종 동백에 도다리쑥국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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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 활짝, 토종 동백에 도다리쑥국이 그립다

2016년 3월 섬학교는 <통영 두미도>

남해안 최고의 봄 음식은 도다리쑥국입니다. 3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47강으로 2016년 3월5(토)∼6일(일) 양일간 도다리의 본고장인 통영의 섬 두미도(頭尾島)로 떠납니다. 여객선 출항시각에 맞추기 위해 출발은 4일(금요일) 자정에 집결해서 심야에 출발합니다. 통영의 새벽 어시장 풍경도 둘러봅니다.

▲보물처럼 진귀한 자생 겹동백 Ⓒ섬학교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이 발견된 불국토, 두미도에서는 그 청초한 흰동백과 보물처럼 귀한 자생 겹동백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섬 둘레를 따라 난 한적한 일주도로는 내내 한려해상의 바다와 섬들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최상의 트레일입니다. 도다리의 고장답게 두미도에서 맛보는 도다리쑥국의 맛은 달달합니다. 도다리는 가자미의 일종인데 옛날에는 비목어(比目漁)라 했습니다. 비목어란 외눈박이 물고기란 뜻입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비목어가 “눈이 하나뿐이므로 두 짝이 서로 합해야만 전진할 수 있다”는 속설의 허황됨을 지적했지만 비목어 이야기는 사랑하면 외눈박이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쑥 향기 날리는 봄철이면 남해안 섬지방 사람들의 외눈박이 물고기에 대한 사랑이 절절 끓습니다. 원래 깊이 사랑하면 먹거나 먹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네 살과 피가 내 피와 살이 되고, 내 피와 살이 네 살과 피가 되니까요. 그렇게 사랑은 먹고 먹힘으로써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겠지요. 봄이 오는 길목, 외눈박이 물고기의 섬 두미도로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월 답사지, <통영 두미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통영의 섬이지만 생활권은 삼천포로 이어지고

긴 항해 끝에 여객선은 두미도 북구에 나그네를 내려 준 뒤 통영으로 회항한다. 오늘 북구 마을에 내린 사람은 도합 여섯. 주민 두 사람과 나그네, 사내 아이 하나를 데려온 부모는 낚시 가방을 맸다. 뱃머리 어느 집 앞, 줄에 널려 말라가는 도다리를 구경하는데 노인 한분이 말을 건다.

"어디서 오셨소?"
"멀리서 왔습니다."
"혼자서 오셨소?"
"예."

서해안의 섬들에서는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주민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말을 붙여도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섬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외지인이 드문 낙도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남해안은 작은 섬이라도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더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아무래도 분단 상황에 기인한 바가 큰 듯하다. 특히나 서해 북단의 섬들은 오랜 세월 극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에 있었으니 그 피해의식이 클 것이다.

두미도는 해안선 11km의 작은 섬이지만 섬의 산은 높다. 섬 중앙의 천황봉(468m) 기슭에 마을들이 위태롭게 들어서 있다. 두미 북구마을도 급경사에 집들이 층계마다 서있는 형국이다. 마을을 오르는 길이 곧 등산로처럼 가파르다. 몇 그루 밀감나무에서는 거두지 않은 밀감들이 그대로 말라간다. 노지 밀감은 신맛이 강하기 때문에 마을사람들이 손도 대지 않고 버려둔 것이다. 신 것을 좋아하는 나그네는 밀감을 따서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마을의 산 중턱쯤에 붉은 벽돌건물 한 채가 언뜻 보인다. 마을의 당집이라도 되는 걸까. 풀숲을 헤치고 건물에 들어서 보니 옛날 디젤발전소 건물이다. 해저케이블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발전소는 폐쇄됐다.

두미도에는 60여 호의 주민들이 산다. 남구와 북구에 각각 반씩 나뉘어 살지만 마을은 북구가 약간 더 크다. 고기잡이가 주업이다. 파도를 막아줄 지형이 없어 양식업은 불가능하다. 주민의 80% 이상이 노인들이니 농사를 짓기 어렵다. 비탈 밭에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어 섬에 두 마리뿐인 소로 밭을 갈기도 하지만 그도 여의치 않으면 괭이로 직접 일궈야 한다. 농사의 고통이 심하니 겨우 마늘이나 고구마를 심어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정도다.

두미도는 통영시에 속한 섬이지만 주변의 욕지도나 노대도 사람들과 달리 섬사람들의 생활권은 삼천포다. 통영보다 삼천포가 더 가까워서만이 아니다. 100여 년 전, 남해 출신 사람들이 처음 두미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남해 사람들은 또 대처인 삼천포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두미 섬사람들도 자연히 삼천포로 핏줄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5일장도 삼천포 장을 보러 가고 수산물도 삼천포에 가서 판매한다. 삼천포는 4, 9장. 5일장 날에는 통영에서 오는 여객선이 삼천포까지 항로를 이어준다. 결혼식도 남해나 삼천포에서 한다. 아이들 교육도 삼천포에서 시킨다.

▲소복의 여인처럼 청초한 토종 백동백 Ⓒ섬학교

통일신라 때 금동불상이 발견된 섬

지금은 섬에 절이 없지만 마을 주민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불교신자다. 교회가 있어도 신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욕지도나 노대도 주민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인 것과는 정반대다. 민박집 주인은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두미도(頭尾島)가 본래 둔미(屯彌)섬이었다고 들었다 한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기사에도 둔미도(芚彌島)란 이름이 등장한다. 두미도 이전에는 섬의 이름이 둔미도였던 것이다. 둔미도란 ‘미륵이 머물다간 섬’이란 뜻이다.

"연화세계를 알려거든 세존께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불교경전 속의 두미(頭尾)든 둔미(屯彌)든 모두 불교와 연관이 깊다. 두미도는 연화도 등과 함께 불교문화의 자장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섬인 것만은 명확하다. 1937년 두미도의 감로봉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 입상이 발견되었다. 불상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회수돼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남해 금산에서 세존도, 두미도, 욕지, 연화도를 거쳐 미륵도까지 남해의 섬들은 이미 신라 때부터 불국토를 지향했던 것이다.

4일, 삼천포 5일장이 있는 날이라 섬은 아침부터 부산하다. 통영에서 들어온 배가 섬사람들을 삼천포장까지 실어다 주고 장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실어올 것이다. 민박집 안주인도 객의 아침 밥상을 차려 놓고 장을 보러 갔다. 바깥주인은 고기잡이 나갔다. 이번 겨울 두미도에서는 도다리와 물메기가 많이 잡힌다.

마을회관 앞에는 ‘두미 개척 10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1996년에 세워졌으니 그로부터 또 십수 년이 지났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섬에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 여러 섬들을 다녀보니 유행처럼 섬마다 선호하는 비석들이 다르다. 어떤 섬은 유난히 선정비나 공덕비가 많고 어떤 섬은 열녀비가 많다. 또 어떤 섬은 효자비가 많다. 비석은 그 섬이 중요시하는 가치의 표현이거나 권력 관계의 지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건너자 길 옆에 ‘두미 개척 60주년 비’가 낡아간다. 욕지도에도 ‘개척 기념비’가 있었다. 이 근방 섬사람들의 중심 가치는 개척정신인 듯하다.

▲해안 둘레길에 환상처럼 펼처지는 섬들 Ⓒ섬학교

작년에 칠십, 올해 육십,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시고

하천 옆 양지 녘에 할머니 한 분이 칼을 들고 그물 손질을 한다. 할머니는 로프에 붙은 그물을 긁어낸다. 찢겨진 그물을 뜯어낸 뒤 로프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다.

"어디서 왔소?"
"아주 멀리서 왔습니다."

"구경하러 왔습니까? 친척집에 왔습니까?"
"그냥 구경삼아 왔어요. 할머니."

"우리 집에도 오라고 하고 싶지만 메느리도 있고 아들도 있으니 내 맘대로 못합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여기는 뭐 바닷가하고 산이니 구경할 데가 별로 없어요. 밥은 사자셨소?"
"예, 할머니. 할머니는 여기가 고향이세요?"
"등 너머. 대판이라고, 여서 멉니다. 산 넘어야지. 옛날에 이 마을로 시집 왔습니다. 전엔 거기도 많이들 살았는데 지금은 안 삽니다. 여도 이젠 빈 집이 많아. 좋은 학교도 있었는데 다 뿌사져 빌고."

이 외진 섬에서 할머니는 또 어떤 세월을 살아오셨던 것일까.

"밭일 하고, 옛날에는 밭 메고, 베 짜고, 삼 삼고, 모시 삼고, 배 짜. 옛날에는 옷을 호빡 길쌈 해가 안 해 입었습니까. 보리 갈아 도구탱이 찍어가 밥 해먹고, 밀 심어서 국시 해먹고 개떡 해먹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힘들다고 농사일 안 하재. 바다 배 타고 다니면서 고기나 잡어 폴고."

할머니는 섬에서는 큰아들 며느리랑 함께 산다. 아들 둘, 딸 둘은 부산에 산다.

"부산에는 자주 가세요?"
"젊어서는 자주 갔는데 요즈음은 잘 못가요. 거기 가면 돈 많이 들어."

"할머니 연세는 어찌 되세요?"
"육십입니다."
"에이 할머니도 참."
"작년에 칠십이었으니께."
"그럼 재작년에는 팔십이셨겠네요?"
"예."
"해마다 나이가 줄어드시는군요?"
"그래도 서른 될라먼 아직 멀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이를 거꾸로 드신다. 마침내 0살이 되면 할머니는 이승을 하직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야생의 쑥이 듬뿍 들어간 두미도의 도다리쑥국은 격이 다르다. Ⓒ섬학교

두미도 자생 겹동백을 만난 행운

폐교된 초등학교를 지나 두미 남구로 간다. 북구에서 남구로 가는 길은 산길이다. 남쪽 섬의 가을이나 겨울 산길을 갈 때는 도시락이 없어도 좋다. 운이 나쁘지만 않다면 산열매나 과일들을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어선이나 여객선을 이용하니 굳이 몇 개의 고개를 넘어 산길을 다니는 주민은 없다. 옛 길은 뭍에서 온 여행자들이나 다니는 잊혀진 길이 되었다. 산길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마을 전체가 폐가다. 폐촌이 된 것이다. 섬을 떠나 뭍으로 간 사람들, 이승을 아주 떠나간 사람들.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고향은 없다.

고향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감나무에 감이 익어도 더 이상 감을 딸 사람이 없다는 뜻일까. 옛 집터 감나무에는 홍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그네는 감을 따 점심 공양을 한다. 산에 먹을 것이 풍성한지 새들도 잘 익은 홍시만 더러 파먹었을 뿐 나머지는 입도 대지 않았다. 맛난 것부터 찾는 성정은 사람이나 새가 다르지 않다. 단 열매들이 사라지고 나면 저 감들도 새들의 요긴한 식량이 될 것이다. 옛 마을의 집들은 허물어지고 사람은 떠났어도 오늘도 마을 앞 바다로 배들은 무시로 오고 간다.

세 개의 고개를 지나서야 두미 남구마을이다. 남구마을도 절벽에 매달린 꿀벌집처럼 온통 비탈진 언덕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초입부터 동백이 지천이다. 보기 드문 백동백도 꽃이 피었다. 변종인 백동백은 씨앗을 심으면 다시 붉은 꽃이 핀다. 꺾꽂이를 해야만 흰 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전설 같은 자생 겹동백을 만났다. 이런 행운이 있을까. 토종의 자생 겹동백을 만나기란 자생 흰동백 보기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원예용인 개량종 겹동백은 꽃이 풍성하지만 동백이라 이름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격이 떨어진다. 토종 홑동백은 시들지 않고 절정에서 통으로 뚝 떨어진다. 하지만 개량종 겹동백은 꽃이 필 때만 잠깐 화려할 뿐 시들시들하다가 이내 갈가리 찢겨지며 떨어진다.

도대체 동백 특유의 절조와 단아함이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꽃 시절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그 비루함이 안쓰러울 정도다. 그런 까닭에 겹동백이 보이면 나그네는 서둘러 눈을 돌리고는 한다. 하지만 오늘 이 섬의 자생 겹동백은 겹동백에 대한 편견을 일시에 날려버린다. 홑동백에 뒤지지 않는 기품과 결기가 느껴진다. 마을사람들이 뒷산에 자생하는 고목 동백나무 가지를 꺾어다 삽목으로 심었던 것이라 한다. 이 자생 겹동백은 흰동백처럼 홑동백의 변이종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겹꽃을 피우지만 홑동백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꽃 시절에 대한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생의 절정에서 온몸으로 떨어지는 자생 겹동백. 온몸을 던져 스러지는 그 결기, 그 절조, 그게 진짜 동백이다. 그게 진짜 겨울의 심장이다. 오늘 나그네는 자생 겹동백의 자태에 반해 쉬이 발길을 돌릴 수가 없다. 두미 남구마을은 동백나무 고목들이 방풍림을 이루어 마을의 안녕을 지킨다.

방파제 안 부두에서는 어장을 보고 온 내외가 배 위에서 생선을 분류 중이다. 부부는 삼천포에 살면서 어장철에만 여자의 친정이 있는 두미도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다. 광어나 도다리, 간재미 따위 생선은 배의 바닥에 넣어 살리고 물메기는 배를 따서 손질한다. 선창가는 온통 줄에 걸려 말라가는 물메기 천지다. 물메기는 말린 것이 더 맛있다고 여자가 알려준다.

광주리에 담긴 물메기 한 마리, 아직 숨이 붙어 있는지 눈을 꿈뻑거린다. 여자는 꿈틀거리는 물메기의 머리에 칼을 꽂아 숨통을 아주 끊어버린다. 등줄기를 따라 칼집을 넣고 내장을 파낸다. 물메기 손질이 끝나자 내외는 활어를 싣고 삼천포로 떠난다. 호위병처럼 갈매기들이 뒤따른다. 늙은 친정어미는 홀로 남아 할복한 물메기들을 널어 말릴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세월이 간다.

▲도다리가 많이 잡힐 때면 도다리쑥국에 도다리구이가 곁들어 나오기도 한다. Ⓒ섬학교

섬학교 2016년 3월 5(토)∼6(일)일, 제47강 <통영 두미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4일(금)>
24:00(자정) (뱃시각에 대기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3월 4일(금) 24시(자정)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7강 여는 모임

<3월5일(토)>
00:20 압구정 출발
-통영 도착
-새벽 서호시장 탐방
-아침식사(원조시락국)
-통영항 출항
-두미도 도착
-천황봉(468m) 트레킹
-점심식사(두미도 도다리쑥국)
-두미도 둘레길 걷기(10km)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도다리구이 등)
-휴식 및 취침(<두미도 마린리조트>, 다인실)

<3월6일(일)>

06:00 기상
-아침식사(도다리미역국)
-도미도 출항
-통영 도착
-서울 향발
-점심식사(휴게소에서 충무김밥)

▲섬학교 제47강 <통영 두미도> 답사약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스틱, 버프(얼굴가리개), 무릎보호대, 선글라스,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아직도 지게 지고 산에 오르내리는 나뭇꾼이 있는 섬 Ⓒ섬학교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 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 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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