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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붉은 전사, 이슬람에게 돼지치기 강요-무차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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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붉은 전사, 이슬람에게 돼지치기 강요-무차별 학살

[유라시아 견문] 윈난 : 이슬람 중국

따리와 리장

여행 가이드북이 중국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동하는 버스에서 듣고자 몇 편의 팟캐스트 방송을 다운로드했다. 절반도 듣지 못했는데 따리(大理)에 도착하고 리장(丽江)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고속도로가 새로 생긴 것이다. 굽이굽이 산맥에는 터널을 뚫었고, 험준한 협곡에는 다리를 놓았다. 윈난성 내부의 연결망도 갈수록 촘촘해진다. 지도를 다시 그리고, 지리를 다시 이룬다.

두 古城(고성) 모두 하늘과 가깝다. 히말라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다. 공기가 차고 깨끗하다. 오랫동안 한족의 발길이 드물었던 곳이다. 이제는 잘 닦인 고속도로와 고속철을 따라서 밀물처럼 몰려든다. 날씨는 좋고 경치는 예쁜데다 소수 민족의 색다른 문화를 즐길 수도 있다. 지갑이 두툼해진 동부의 중산층들이 유람하기에 제격인 것이다. 샹그릴라, 중국 안에서 異國(이국)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사람이 느는 만큼 돈의 회전도 빨라진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상업화의 물결도 가팔라졌다. 애초에 교토를 상상했다. 혹은 경주를 연상했다. 그러나 천 년 도읍의 정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테마파크 같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식당이고 카페이고 상점이고 술집이다. 고성 내부에 숙소를 잡은 것도 두고두고 후회했다. 밤새 가라오케와 바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로 시끄러웠다. 아직 문화의 수준이 물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울적한 마음을 '風花雪月(풍화설월)'을 마시며 달래었다. 윈난산 맥주의 이름이다. 한시의 한 구절을 뽑아온 듯한 고졸미가 우아한 상품명이 되어있다.

더 일찍 왔어야 했던 곳이다. 그새 숙소 직원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뻔히 한국 여권을 제출해도 아랑곳없이 중국어로 말을 한다. 노란 얼굴의 동방인은 모두 중국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응대하면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짧은 영어조차 배울 이유가 없어진 모양이다. 하긴 투숙객의 9할이 중국인이다. 외국의 배낭 여행객과는 달리 이들은 씀씀이도 크다. 따리 고성의 유명한 洋人街(양인가, '서양인들의 거리')마저도 셀카와 단체 사진 찍기로 여념 없는 한족들로 점령되었다. 탈식민화와 세계화와 중국화가 빚어내는 착잡한 풍경이다. 역시 규모는 중요하다. 양이 질을 변화시킨다.

차마고도와 몽골 로드

윈난의 중국화는 최신의 현상이다. 황하와 장강에서 비롯한 중화 문명의 경계가 쓰촨 성 언저리였다. 쓰촨을 분기로 윈난에는 유교와 농경 문화의 영향이 희미했다. 차라리 이웃한 티베트나 미얀마(버마)와 가까웠다.

당시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둔 이가 있다. 마르코 폴로이다. 800년 전 이곳을 다녀갔다. <동방견문록>에서도 윈난 성 일대를 중화 문명의 밖으로 묘사한다. 벵골만 건너 인도 문명과 더 유사하다고 느낀 것이다. 크게 틀리지 않은 눈썰미다. 윈난 성이 중국에 편입된 것은 몽골세계제국 때의 일이다. 폴란드에서 한반도까지 유라시아의 대제국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중국의 일부가 된 것이다. 중원과 서역을 통합했던 대당제국의 전성기에도 윈난은 독립 왕국을 지속했다.

윈난의 독자 왕국이 스스로를 무엇으로 불렀는지는 확실치 않은 모양이다. 중국 문헌에는 南詔國(남조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교 왕국이었다. 미얀마와도 인연이 깊었다. 아니 남조국이 미얀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얀마의 대표적 불교 도시 바간(Pagan)의 건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 바간을 통하여 인도의 힌두 왕국과 불교 왕국과도 연결되었다. 남조국의 왕들은 스스로를 불교 황제 아소카의 후예라고 간주했다. 불교 세계 특유의 '만다라 질서'가 작동하고 있던 것이다.

남조국에서는 이 만달라적 네트워크가 미치는 영역을 간다라(Gandhara)라고 불렀다. 간다라는 불교 법왕들이 다스렸던 평화롭고 신성한 낙토를 일컫는다. 알렉산더 대왕 시기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변경에 걸쳐 자리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Kandahar)라는 지명이다. 미얀마 어에도 흔적이 남아있다. 윈난을 지칭하는 말이 여전히 간다라이다. 왕년의 윈난은 명백하게 인도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 천 년의 역사는 오늘날 소수 민족의 '풍습'으로 남아있다. 태국(타이),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물놀이 축제 송크란이 유명하다. 서력으로 4월이다. 윈난의 일부 소수 민족도 춘절보다는 송크란을 즐긴다. 리장의 터줏대감, 나시(纳西) 족이 대표적이다. 오래전 茶馬(차마)고도를 통하여 티베트와 인도를 윈난과 연결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토착어 또한 티베트어와 미얀마 어에 가깝다고 한다. 만다라 세계와 중화 세계, 불교 문명과 유교 문명의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 후기의 귀족들이 유교적 소양을 갖추어갔던 것처럼, 나시 왕국의 귀족들도 점차 중화 문명에 물들어갔다는 점이다. 四書三經(사서삼경)을 공부하고 詩書畵(시서화)를 교양으로 갖추기 시작했다. 집안에 경전을 보관하는 도서관을 지어 '구별 짓기'의 상징 자본으로 활용했다.

나시 왕국의 대표적인 귀족의 집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외관부터 내부까지 송나라의 사대부를 모방했음이 확연하다. 다만 차이라면 서재에 커다란 호랑이 가죽을 걸어두었다는 점이다. 야생과 야성의 과시가 여전했다. 외래의 선진 문명과 현지의 토착 문화가 기묘하게 공존한다. 혹시 외풍이 없었더라면 윈난에서도 한반도와 유사한 역사 전개, 즉 불교 왕국에서 유교 왕국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윈난 성 바로 아래 베트남의 역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윈난은 유교화/중국화가 아니라 이슬람화를 먼저 경험한다. 외풍은 북풍이었다. 몽골이 진격했다. 1253년 쿠빌라이 칸이 大理國(대리국)를 복속시킨다. 행정의 중심을 쿤밍으로 옮긴 것도 쿠빌라이 칸이다. 윈난을 중국의 10개 성 중 하나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현지 민족이나 중원의 한족에게 통치를 맡기지는 않았다.

북방의 몽골 족과 서역의 투르크 족을 이동 배치시켰다. 관료와 군인 등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인구가 윈난으로 대거 유입된 것이다. 흑해의 터키인도 있었고, 볼가 강의 불가리아인도 있었다. 당시 윈난에는 동쪽의 한족보다 서쪽에서 온 투르크족이 훨씬 더 많았다. 불교에서 이슬람으로의 전환, 과연 윈난의 역사는 동아시아보다는 남아시아의 경로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이로는 오마르(Sayyid Ajall Shams al-Din Omar)를 꼽을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 출신이었다, 집안의 계보를 따지면 이집트의 카이로까지 가닿는다. 몽골이 정복한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성공적으로 다스리면서 명성을 쌓았다. 그 경력을 인정받아 1270년대에는 윈난 성의 통치를 맡게 된다.

청렴하고 지혜로운 지도자였던 모양이다. 중원의 선진적 농업 기술을 보급하여 윈난의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래서 오늘날 윈난의 무슬림 중 상당수는 오마르를 시조로 삼고 있다. 윈난의 무슬림들도 족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의 교우가 빚어낸 흥미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대청제국 아래서는 삼분천하를 이루었다. 토박이였던 소수 민족과 떠돌이였던 무슬림과 한족들이 윈난의 小天下(소천하)를 형성했다. 지각 변동은 태평천국 운동에서 비롯했다. 天下(천하)를 뒤엎고 天國(천국)을 열고자 하는 시도에 대청제국은 기독교를 탄압했다. 덩달아서 이슬람교에도 불똥이 튀었다. 다문명을 품어 안았던 제국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윈난에서도 무슬림 지도자가 떨쳐 일어섰다. 뚜원시우(杜文秀)가 대표적이다. 따리를 재차 수도로 삼아 독립 왕국을 선포했다. 그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한 지방의 무슬림 상류 집안 출신이었다. 소년기와 청년기에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과거에도 응시했다. '빼어난 문장'(文秀)이라는 이름에서도 묵향이 가득하다.

그러나 청나라가 제국성을 잃어가면서 이슬람 독립국의 꿈을 키운 것이다. 자신을 '술탄 술레이만(Sultan Suleiman)'이라 고쳐 부르고, 따리에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세워 아랍어 교육을 보급했다. 한문으로 번역한 코란도 출판했다. 콜카타에 무슬림 대표단을 파견하고, 런던에는 아들을 보냈다.

남조국과 대리국을 잇는 云南國(운남국)의 하산(Hassan) 왕자라며 지원을 호소하고 무기를 요청했다. 대청제국 대신 대영제국에 기대어 자립과 독립을 모색한 것이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대영제국은 무굴제국을 식민지로 삼고 오스만제국도 붕괴시켰다. 뚜원시우의 이슬람 국가 만들기는 16년 백일몽으로 마감되었다.

그의 집도 박물관이 되었다. 이슬람 거상의 후예답게 부티가 흐른다. 외양은 중국식이고, 내부는 이슬람식으로 꾸몄다. 아랍어와 한문 서적들이 빼곡한 서재가 인상적이다. 그의 반란과 궐기에 대한 중국어 설명을 읽어보았다. 왜곡과 곡해가 심하다. 무슬림 봉기였다는 점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回民起義(회민기의)'라는 이름 아래, 봉건 왕조에 저항했던 혁명적 농민 봉기라고 되어 있다. 뚜원시우 역시 '농민 장군'으로 묘사한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서사에 끼워 맞춘 좌편향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동학 혁명'을 독일 농민 전쟁에 빗대어 '갑오 농민 전쟁'으로 서술했던 근대 역사학의 착오를 여기서도 목도한다. 나라면 이슬람의 중흥 운동이자 윈난의 '更張(경장)' 운동이었다고 고쳐 말했을 것이다. 알라를 섬기면서도 공맹을 따랐던 그의 정신세계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 뚜원시우 박물관. ⓒ이병한

버마 로드

흔들리는 대청제국의 빈틈을 영국과 프랑스가 비집고 들어왔다. 1876년 영국이 윈난과 미얀마(당시 버마) 간 국경 무역 권리를 앗아간다. 민간의 자유 무역이었던 '互市(호시)'를 박탈시킨 것이다. 1886년 미얀마를 대영제국에 병합한 이후에는 국가 간 공식 무역이었던 조공도 폐지시켰다.

청불 전쟁에서 이긴 프랑스 또한 대청제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소멸시키고, 민간 무역을 독점했다. 윈난의 대외 무역을 관장하는 해관 설치 권한도 프랑스가 획득했다. 윈난은 20세기 또한 중국화가 아니라 탈중국화, 서구와의 대면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동부의 베이징과 상하이가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이 양분했던 동남아시아와 깊숙하게 연루되었다.

정치적으로도 기우뚱한 상태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상호 견제 속에서 식민지화는 면할 수 있었다. 일본이 러시아를 누르고 만주를 독점했던 동북과는 판이 달랐다. 영국, 프랑스, 중화민국의 길항 속에서 윈난을 통치한 이가 龍雲(용운)이다. 외눈박이 군벌로, 1927년부터 1945년까지 근 20년을 지배했다.

가계를 따지고 올라가면 남조국 귀족의 후예라고 한다. 1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독자적인 화폐도 발행했다. 그가 표방한 것 역시 '신중국'이 아니라 '신운남'이었다. 초등학교에서도 삼민주의가 아니라 운남 애국주의를 가르쳤다. 5000년 중국사가 아니라 남조국과 대리국에서 출발하는 1000년 운남사를 전통과 적통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신운남'의 운명을 좌우한 것은 1937년 중일 전쟁이다. 일본과 전면전이 발발하면서 항일 연합 노선에 대한 요구가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즉, 항일 연합이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좌우 합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각 지방에서 준독립, 반자치를 누리고 있던 모든 세력들의 대동단결을 요청했다. 일본으로 말미암아 윈난의 '중국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먼저 한족들이 밀려왔다. 중화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던 상하이와 난징이 무너지면서 동부 사람들이 대거 서부로 이주했다. 국민당 정부의 수도를 충칭으로 옮긴 파장이 쿤밍까지 미친 것이다. 쓰촨의 충칭이 항일 전쟁의 정치적 중심이었다면, 윈난의 쿤밍은 전후 복구를 예비하는 문화적 중심이었다.

1938년 설립된 西南聯合大學(서남연합대학)이 상징적이다. 동부의 명문 대학과 고급 인력이 쿤밍에 집결했다.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쿤밍-하노이 철도를 통하여 도서 구입 등이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쿤밍이 중국에서 가장 지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 도시가 된 것이다. 일약 중화 문명을 고수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지난 1000년사에 유례가 없던 전면적 중국화의 시기였던 것이다. 1946년까지 지속되었던 서남연합대학의 유산은 현재의 윈난 대학교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변방의 대학임에도 훌륭한 도서관을 갖추고 있다.

그 유명한 '버마 로드(Burma Road)' 또한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다. 동부 연안이 일본군에 점령당하면서,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와 접한 윈난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버마 로드는 항일 전쟁을 수행하는 중화민국의 '생명선'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고준산맥과 급류가 흐르는 협곡 위에 도로를 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장비 부족을 대신한 것은 인해전술이다. 소수 민족까지 포함하여 약 20만 명이 동원되어 도로 공사를 강행했다. 1년 만에 버마 로드를 완공했으니, 윈난 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기적이었다. 이 버마 로드를 통해서 영국과 미국의 원조 물자가 보급되었다. 석유와 무기, 식량과 의료품 등 전시 필수품들이 중국에 전해졌다.

중국 정복을 목전에 두었던 일본군이 좌시할 리 없었다. 버마 로드를 끊어내기 위해 윈난을 공습했다. 일부 지역이 점령되어 백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삽과 곡괭이로 도로를 만들었던 이들이 이번에는 총과 칼을 들었다. 이 항일 전쟁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윈난의 소수 민족까지도 비로소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과연 '抗日(항일)'은 신중국 건설의 척추였다.

1942년 일본은 미얀마를 직접 점령함으로써 버마 로드를 단절시켰다. 이에 중국, 영국, 미국의 대표단이 뉴델리에서 회동한다. 인도의 동북 콜카타(당시 캘커타)와 중국의 서남 쿤밍을 잇는 또 다른 도로를 건설키로 했다. 인도의 아삼과 벵골 지역에서 쿤밍을 직접 연결하는 공중 보급로도 마련했다. 미 공군 보급부대가 급히 조직되어 인도와 중국 간에 물자 운송을 담당했다.

그러나 히말라야 일대는 기류가 복잡하고 지형도 험난했다. 3년간 히말라야를 넘지 못하고 추락한 비행기만 500기가 넘는다. 이처럼 항일 전쟁기 동인도와 동남아, 남중국은 하나의 戰場(전장)으로 긴밀했다. 바로 이 지역이 K2K, BCIM, GMS로 하나의 市場(시장)이 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백 년'의 발동이 걸린 것이다.

▲ 이슬람을 믿는 몽골 족 후예들이 살고 있는 샤디엔. ⓒ이병한

샤디엔 : 이슬람 중국

전장에서 시장으로의 전환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그 100년의 이행기에 혁명도 자리했다.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된 것이다. 윈난의 중국화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 완수되었다. '제국의 남문'에 앞서 '혁명의 관문'부터 통과해야 했다. 윈난에 산재해 있는 독실한 무슬림들에게는 특히나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 현장을 부러 찾았다. 샤디엔(沙甸)이라는 마을이다. 이슬람을 믿는 몽골 족의 후예들이 모여살고 있다. 쿤밍에서 남쪽으로 버스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걸린다. 구청 건물부터 특이했다. 모스크형 건축 위에 오성홍기가 휘날리고 있다. 공산당과 이슬람의 공존을 상징한다. 그 앞으로 앳된 여학생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중동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새까만 베일을 두르고 있다. 잠시 멈추더니 핸드폰을 꺼내 통화를 한다. 귀를 쫑긋하니 중국어이다. 까만 베일과 중국어, '이슬람 중국'의 단면이다.

마을 중심가에 자리한 대 모스크로 향했다. 휘황한 모스크의 양쪽으로 '愛國(애국)'과 '愛敎(애교)'가 새겨져 있다. 묘한 긴장감이 전해진다. 정작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은 순교자 기념비이다. 문화 대혁명 기간 숨진 사람들을 모셔둔 곳이다. 그러나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는 마을인지라 순교비의 위치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 택시를 타기로 했다.

"순교자 기념비로 가주세요."

기사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거긴 왜 가느냐, 어떻게 알았느냐, 질문을 쏟아낸다.

샤디엔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장청즈(張承志)라는 작가 때문이다. 중국 문단에서는 꽤나 유명한 회족 출신의 소설가이자 산문가이다. 한창 그의 책을 탐독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침 내 중국어판 킨들에도 서역 기행의 감회를 담은 그의 산문집이 저장되어 있었다. 기사 아저씨에게 보여주자 순간 얼굴이 환해진다. 화색이 돈다.

"장청즈도 알아요?"

길 안내는 물론이요 택시비도 받지 않았다. 저녁까지 사겠단다. 뜻밖의 호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겠다. 기꺼이 응했다.

▲ 샤디엔 순교자 기념비. ⓒ이병한

900명의 이름을 새겨둔 순교자 기념비에는 아랍어와 중국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문화 대혁명을 이끈 4인방의 극좌적 오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역시나 당국의 '공식서사'라고 하겠다. 나는 마을에서 전해지는 '대항 서사'를 접할 수 있었다. 인민해방군의 '대학살'에 관한 폭로였다. 사단의 출발은 1968년 12월이다.

윈난 성 혁명위원회에서 인민해방군 1000명을 샤디엔에 파견했다. 일종의 '하방'이었다. 혁명열에 불타는 붉은 전사들은 이슬람을 믿는 촌민들을 무시하고 적대했다. 모스크를 숙박 시설로 삼아 기거했고, 촌민들에게 돼지 사육을 강요했다.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먹고 남은 뼈를 마을 우물에 버리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경멸이고 치욕이었다.

격분한 신도들이 쿤밍에 있는 성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도리어 탄압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반혁명 폭동을 진압한다며 더 많은 군인들을 파병했다. 비극의 절정은 1975년 7월 29일이다. 새벽 3시부터 무차별 포격과 총격이 개시되었다. 소총만이 아니라 대포까지 동원되었다. 삽시간에 불바다와 피바다로 변했다. 거의 모든 집과 모스크가 붕괴되고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7700명 주민 가운데 900여 명이 사망했음이 공식 기록이다. 그러나 사후에 병사한 이들까지 합하면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즉사한 900명의 희생자 가운데 기사 아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누나 등 일가족 9명도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매일 같이 기념비에 들려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18살 때 경험한 비극이다.

어쩌면 그리도 잔혹했을까. 혁명의 맹목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쿤밍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동아시아를 갈라놓았던 분단 체제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분열과 적대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윈난 성 당국은 냉전기 내내 미얀마에 남아 있는 국민당 잔당의 침투를 경계하고 있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서로 간첩을 보냈던 것처럼, 양안 간에도 첩보전이 상시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미얀마와 접한 윈난이 주된 침투지였다고 한다. '버마 로드'를 통하여 대륙 수복의 기회를 엿본 것이다. 소수 민족을 독려하여 분리 독립을 선동하는 공작도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소 분쟁도 영향을 미쳤다. 신장을 동투르키스탄으로 독립시켜 소련에 편입시키려는 획책이 없지 않았다. 1969년 양국이 국경 전쟁까지 벌인 마당에 소련의 사주로 윈난서도 이슬람공화국이 들어설 수 있다는 신경질적 반응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양안의 분단과 중소의 분열 등 냉전기의 온갖 모순이 이 작은 마을에 응집되어 있던 것이다.

▲ 샤디엔 여성. ⓒ이병한

일대일로의 族譜(족보)

그래도 살아남은 자들은 꾸역꾸역 살아간다. 살아남은 만큼 살지 못한 이들의 몫까지 더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식사 자리가 술자리로 바뀌면서 분위기가 아연 달라졌다. 어느새 맥주에서 백주로 주종도 바뀌었다. 가족들과 이웃들도 속속 합류했다. 그런데 그 면면이 참으로 가관이다. 회족에 장족, 몽골족이 섞여 있고, 윈난의 토착민인 나시 족과 바이(白) 족도 있었다. 하나의 가계도 안에 4개, 5개 민족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종교 또한 잡종이다. 기사 아저씨는 이슬람교를 믿는데 처제는 도교를 따르고 며느리는 티베트 불교의 신자라고 했다. 당장 떠오른 것이 중국의 사상가 왕후이가 말하는 '트랜스 시스템 사회(跨体系社会)'라는 발상이다. 중화 제국의 사회 구성체를 설명하기 위해 제출한 최신의 개념이다.

다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여겨졌던 개념에 순간 뼈와 살이 붙어 확연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샤디엔 마을의 구성원, 가족과 친족, 이웃 안에서 구현되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트랜스 시스템 사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민족, 다언어, 다종교, 다문명이 '家族(가족)'의 울타리 안에 공존하고 있다.

이 복합적 기층 사회를 토대로 '천하' 또한 세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족보부터가 일대일로의 연결망과 오롯하게 포개짐이 기가 막히다. 오마르를 시조로 삼아 중국의 샤디엔과 이집트의 카이로가 핏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북방의 내몽골부터 남방의 윈난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서부를 주유하면서 이슬람의 흔적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신장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감숙성과 청해성 등 중국의 서부 전체에 무슬림이 널리 퍼져있다. 곳곳에서 모스크를 목도하고, 사이사이에 '淸眞客棧(청진객잔)'이라는 할랄 여관도 자리한다. 그래서 이 일대를 일컬어 '이슬람 중국'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다.

다소 과장된 어법이지만 복합제국으로서의 중국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발상임을 부정하기도 힘들다. 그만큼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공진화는 오래된 것이다. 즉, 중화제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유불도(儒佛道) 타령만 해서는 곤란하다. 유불도 삼교의 동방 문명과 서역의 이슬람 문명은 줄곧 불가분으로 연동하고 있었다.

그 천 년의 유산이 '백 년의 혁명'으로 사라질 리도 만무하다. 아니, 목하 中國(중국)과 中東(중동)의 상호 진화를 추동하는 기저가 되고 있다. 샤디엔의 대 모스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중동인과 중국인의 모습에서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의 '더불어 중흥'을 예감한다. 마침 시진핑은 2016년 첫 해외 순방으로 중동 3개국을 선택했다. 짚어보기로 한다.

▲ 중국식 모스크.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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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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