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슈가르(Kashgar)에 이르렀다. 신장의 남부이다. 중화 세계의 서쪽 끝이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카라코람 고속도로를 곧장 내달리면 파키스탄이다. 위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다. 그래서 북신장의 우루무치와도 사뭇 다르다. 우루무치는 위구르 족과 한족이 반반이었다. 카슈가르는 열에 아홉이 위구르 족이다. 이곳이 중국의 일부라는 사실은 인민광장과 인민대로, 거대한 마오쩌둥 동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도 다르게 흐르는 듯하다. 우루무치만 해도 서부 대개발의 바람이 여실했다. 고층빌딩 사이로 인민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카슈가르는 느릿하다. 낙타와 당나귀의 방울 소리가 딸랑거린다. 일요일 바자르의 풍경 또한 10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곳을 처음 다녀간 중국인은 장건(張騫)이었지 싶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그러하다. 기원전 128년이었다. 당시에 이미 20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오아시스의 대도시였다. 현장법사도 이곳을 지나갔다. 천축에서 공부를 마치고 시안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불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복합 문명 도시의 풍경을 꼼꼼하게 새겨두었다.
그러나 카슈가르의 주인공들은 역시 위구르인이다. 전성기는 1000년 전, 11세기이다. 카라한 왕국의 수도였다.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위구르 문학을 대표하는 대서사시 <복락지혜>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정치가였던 유세프 카스 하지브(Yusuf Khass Hajib)의 작품이다. 위엄과 격조가 넘치는 그의 무덤에는 여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랍어로는يوسف خاصّ حاجب, 위구르어로는يۈسۈپ خاس ھاجىپ, 중국어로는 玉素甫‧哈斯·哈吉甫라고 되어 있다. 이 다양한 표기법 자체가 카슈가르의 복합 문명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뿐 아니라 역법과 천문학 등 다방면을 망라했다. 어학 사전에 백과 사전까지 더한 격이다. 그래서 카라한 시대의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사전에 실린 세계 지도이다. 놀랍게도 원형이다. 동그라미 안에 카슈가르와 이슬람 세계, 중화 세계를 그려 넣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젤란이 지구를 일주하기 400년도 전이었다.
이 저작들은 돌궐, 아랍, 페르시아 문명이 중화 문명과 교류하고 중첩되고 융합했던 당시의 파노라마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즉, 북아시아와 서아시아는 동아시아와 오래전부터 공진화하고 있었다. 이 대학자들이 태어나서 활동했던 시기 또한 송나라에서 주자와 정자 등이 등장하여 송학이 확립되어 가던 때와 오롯하게 포개지거나 다소 앞선다.
오늘날 카슈가르의 문화와 학술의 집약지는 카슈가르 대학이다. 이곳 역시 일대일로의 발족과 더불어 쇄신의 전기를 마련했다. 2015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 신생 종합대학이 카라한 왕조의 위대한 전통 계승을 사표로 다진다. 중국의 지방 대학에서 유라시아의 허브 대학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역시 向西(향서) 개방은 向東(향동) 개방과는 다르다. 태평양은 낯선 세계로의 편입이었지만, 유라시아는 누천년의 정감에 기초한다. 2000년의 역사와 새천년의 미래가 캠퍼스의 潛在力(잠재력)을 일깨운다. 카슈가르야말로 東西古今(동서고금)의 교차로라 하겠다. '각양각색의 집'이라는 본뜻과도 안성맞춤이다.
신천하 : 서역과 서해
100여 년 전(1920년대), 미국의 역사학자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가 중국을 방문했다. 상하이나 홍콩이 아니었다. 오지를 쏘다녔다. 북방에 이어 서역을 살폈다. 카슈가르에도 머물렀다. 西北(서북)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것이다. 그가 집필한 책이 바로 [Inner Asia Frontiers of China]이다. 몽골사와 만주사 등 내륙아시아 연구자들에게는 필독서이다. 나도 이참에 손에 들어보았다. 기차에서 카페에서 틈틈이 읽어갔다. 100년이 무색한 훌륭한 저서였다. 20세기보다는 21세기에 더욱 값진, 시대를 앞서간 서물이었다.
라티모어는 유라시아의 내륙부가 중국사를 추동했다고 독해한다.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중원 중심주의, 한족 중심주의, 유교 중심주의를 일찍이 극복한 것이다. 만리장성 또한 華(화)와 夷(이)의 경계라고 보지 않았다. 유목 문명과 농경 문명의 교호와 교류의 조랑(corridor)이라고 이해한다. 양대 문명을 분단시키지 않고 통합하여 이해하는 得意(득의)를 선보인 것이다. 그의 시각에서 변경은 주변에 머물지 않는다. 왕래 지대이고 소통 지역이다. 和而不同(화이부동)의 창조적이고 창발적인 공간이다. 카슈가르의 100년 후를 내다보는 先見之明(선견지명)이 번뜩인다.
그러나 정작 그가 중국을 누비던 20세기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서북 내륙과는 다른 충격이 중국사에 가해졌다. 바다의 충격, 해양 문명의 도전이었다. 그의 구분법을 빌면 서방 이전(pre-Western)과 서방 이후(post-Western)로 나눌 수 있다. 선두는 영국이었다. 1820년대 이미 카슈가르 변방까지 접근했다. 1826년 무렵에는 신장의 절반, 남부를 장악했다. 아삼과 벵골의 아편 길(Opium Road)이 신장까지 이어졌다. 아편 전쟁의 전조였다. 반면 신장의 북부는 러시아의 진출이 여실했다. 내륙에 보태어 해양까지 동시에 변방을 잠식해가는 전례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서역과 중원의 양자 관계가 삼차 함수로 성격이 변한 것이다.
바다는 이미 크게 달라졌다. 본래의 무한성과 미지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망망대해가 육지화되고, 영토화되었다. 서방의 자본주의가 구축한 정치질서와 경제 질서가 바다를 땅처럼 나누고 쪼개어갔다. 칼 슈미트가 [the Nomos of the Earth]에서 묘파했던 바로 그 현상이다. 즉,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바다를 육지화함으로써, 고쳐 말해 대양을 서방의 '內海(내해)'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다문명, 다제국, 다국가들이 공존했던 '公海(공해)'가 '領海(영해)'가 되어 갔다. 아랍의 바다와 중화의 바다가 몬순 계절풍에 따라 순환했던 인도양과 태평양 또한 지중해처럼, 대서양처럼 변해갔다. '낯선 세계화'였다.
이 내륙과 내해의 이중적 압박의 탈출구를 신장에서 찾은 이가 공자진(龚自珍)이다. 대청제국 말기의 대학자였다. 그가 <西域置行省议(서역치행성의)>라는 상서를 올린 것이 1821년이다. 신장에 중국식 행정 기구인 성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문헌이다. 중원의 사대부로서는 드물게 신장 문제를 중국 전체의 문제로 사고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공자진은 러시아와 영국이 유라시아 전체에서 벌이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돌파하기 위해서 '西域(서역)'을 '西海(서해)'와 연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서역의 특징은 바다와 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바다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서역과 중원을 동시에 숙고하면서 서해라는 묘수를 궁리한 것이다. 四海(사해) 의식에 갇혀 있던 중원에서의 일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그가 말한 서해란 다름 아닌 인도양이다. 중국의 인도양 진출을 자그만 치 200년 전에 모색한 것이다. 그 발상이 목하 실현 중에 있다. 카슈가르에서 과다르 항까지 이어지는 중국-파키스탄 회랑이 바로 그것이다. 카슈가르가 일대(내륙)와 일로(내해)를 연결하는 허브가 되어간다. 즉, 공자진의 서해 구상은 조숙한 지리 혁명, 신천하의 개진이었다. 동해(태평양)과 서해(인도양)를 양 날개로 삼는 兩海(양해) 전략으로 '中國(중국)'이라는 기성의 경계를 돌파한 것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면 '天地東西南北學(천지동서남북학)'의 재정립이라 하겠다. 구천하를 버리고 新天下(신천하), 大天下(대천하)를 구상한 것이다. 세계관의 수정, 세계관의 재건이었다. 그 1821년의 상소가 2021년의 청사진이 되고 있음이 기가 막히다. 200년을 꿰뚫는 혜안이 빛을 발한다. 그가 제창했던 '천지동서남북학'을 내 식으로 풀면 '유라시아학'이 되지 않을까 싶다. 2대양 3대륙을 담아내는 신천하의 신학문이고, 대천하의 대학문이다.
하나이며 여럿인, 여럿이며 하나인
당장의 일대일로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은 사회과학자들이다. 경제학자와 국제관계학자들이 최전선에 자리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위기가 일대일로를 촉발했음이 분명하다. 시장 확장의 논리를 수반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중국의 과잉 생산을 해소하는 수요 창출과 인프라 투자 및 금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불어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맞서 활로를 찾는 지정학적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전혀 신선하지 않다. 근대 세계 체제의 반복이고 확산에 그친다. 유라시아의 광활한 지대에서 자연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문화 생태계를 파괴시켜 갈 것이다. 지난 세기의 익숙한 모순과 충돌을 답습할 것이다. 착취와 억압에 저항과 보복이 잇따르는 근대적 악순환이 영겁으로 회귀할 것이다.
'다른 백 년'은커녕 '다시 백 년'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비단 그것만이었다면 당장 나부터가 견문에 나서지 않았을 것 같다. 또 다른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일선을 긋는 문명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긴다. 나아가 '文明(문명)'의 의미를 재정의할 수 있는 잠재성까지도 내장하고 있다고 여긴다.
일단 언어(文)부터가 각별하다. 변경을 내지화하고 바다를 내륙화했던 영토적 발상을 뛰어넘는다. 路(로)와 带(대), 廊(랑)과 桥(교)라는 핵심 한자어부터 탈영토성이 여실하다. 일대일로가 큰 길(大路)을 내면, 회랑과 가교가 오솔길(小路)을 잇는다. 4개의 한자말(路, 带, 廊, 桥) 모두 연결망(network)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같이 교류와 소통, 융합을 촉진하는 매개적 발상들이다. 그래서 다성적이고 다중적이며 탄력적이다. 딱딱하고 단단하지 않고, 부드럽고 유연하다. 동과 서를 분획하고 그 동서의 내부 또한 국민 국가들로 분할해갔던 기존의 세계 체제를 상쇄하고 전복해간다. 전혀 새로운 현상만은 아니다.
라티모어가 서양 이전(pre-Western)이라고 일컬었던 옛 질서의 갱신에 가깝다. 그래서 다른 국가, 다른 문명, 다른 세계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다자적이고 중층적인 복합계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유라시아의 각양각색의 문명들이 본디 품고 있었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실현해가는 '다함께 르네상스', '더불어 중흥'을 도모해 봄직하다.
애초 중국이라는 나라부터가 다민족 국가일 뿐 아니라 다문명 제국이다. 다양성과 통일성의 변증법으로 반만년을 지속했다. 다양성의 지반 위에 공동성을 세워갔다. 소위 '天下爲公(천하위공)'이다. 따라서 多(여럿)와 一(하나) 또한 모순되지 아니했다. 하나가 單一(단일)로 군림하며 여럿을 억압하지 아니했다.
여럿의 각자 또한 홀로서기를 고집하지도 않았다. 제국 안에 준(準)국가와 차(次)국가가 자리했고, 국가 위에는 또 天下(천하)가 자리했다. 이 복합적 정치 체제가 一卽多, 多卽一(일즉다, 다즉일)의 네트워크를 통하여 거듭 업데이트 되어간 것이다. 하나이면서 여럿이었고, 여럿이면서 하나였다.
비단 중화 제국만도 아니다. 19세기 이전까지 천 년간 반복되었던 유라시아형 제국들이 대저 그러했다. 그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짓눌러 갔던 과정이 소위 '압축 근대화'였다. 하나의 제국이 수많은 하나들로, 국민 국가들로 분화되어갔다. 그에 따라 배타적 민족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가 20세기 내내 만연했다.
즉, 국수주의와 근본주의는 근대에 미달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세기 이전까지 부재했던 현상이다. 근대로 진입하면서 생겨난 신종 질환들이다. 일대일로는 이 근대병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再活(재활)의 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왕년의 多(다)와 一(일)의 동태적 역사 관계를 복원해가야 할 것이다.
카슈가르의 역사 또한 일과 다의 복합적 관계망 속에서만 온전한 서술이 가능하다. 민족사나 국가사로는 도저히 담아낼 길이 없다. 중국사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투르키스탄만의 역사도 아니다. 중화 문명사로도 충분치 않고, 이슬람 세계사만으로도 족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줄곧 다문명 사회였다.
인도 문명, 이슬람 문명, 중화 문명에 유럽(동/서구) 문명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돌궐어와 위구르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한자와 러시아어와 영어로 남겨진 이곳의 문헌(사료)들이 다중적 역사, 다성적 역사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합창으로 웅변한다. 천지동서남북학, 즉 유라시아학이 아니고서는 카슈가르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大史(대사), 大計(대계), 大選(대선)
유라시아의 한복판에서 '유라시아 사관'이라는 것을 궁리해본다. 3대륙 2대양을 크게 잇고 엮는 종합적 역사관의 마련이다. 응당 기존의 유럽 중심주의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최근의 중국 중심주의로 수렴되지도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천지동서남북'의 재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20세기의 역사란 대저 國史(국사, National History)였다. 나라마다 칸막이를 치고 각자의 국가들이 저마다의 터널 속에서 고대에서 중세로, 중세에서 근대로 경주 말처럼 내달려 왔던 것처럼 서술했다. 역사 서술 자체가 이웃과의 경쟁심을 부추기고 적대심을 고조시켰다. 좌파도 우파도 진보사관으로 하나였다.
그러나 천지동서남북은 늘 공진화하고 있었고, 유라시아는 항시 還流(환류)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듯, 물결이 일 듯 문명과 문명이 동과 서로 흐르고 남과 북으로 통했다. 일대일로의 건설(하드웨어)과 더불어 상부상조하고 自利他利(자리타리, win-win)하는 공존과 공영의 역사관(소프트웨어) 또한 다함께 세워가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거대 서사(Grand Narrative)이다. 지구적인 근대 서사의 창출이다. 일상(小事)으로의 함몰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유희는 시한을 만료했다. 동서고금을 융합하는 유라시아의 大史(대사)를 바로 세워야 하겠다. 불과 100년 전 동학도들만 하더라도 요순 시대를 '동시대(contemporary)'로 환기하는 장쾌한 역사 감각이 여전했다. 그 장구한 동시대의식과 광활한 공간 감각을 회복해가야 할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에 마침표를 찍는 2018년 2월이면 이러한 시공간에 바탕한 '유라시아 사관'의 얼개라도 어렴풋이 제출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참에 향후의 로드맵(road map)을 대강이나마 밝혀두는 편이 낫겠다. 카슈가르는 일대와 일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로 갈 수도 있고, 남아시아로 향할 수도 있다. 나는 南進(남진)하기로 했다. 천산의 구름 남쪽, 云南(운남)으로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 미얀마(버마)를 거쳐 벵골만 지나 인도로 갈 것이다.
2016년에는 인도양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주력할 예정이다. 연말이나 연초에는 유럽까지 이를 것이다. 유라시아의 문명적 축을 이루었던 양대 세계를 먼저 살피고 유럽에 당도하면 '서구 근대' 또한 유라시아적 맥락에서 상대화하고 역사화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2017년은 '서구 근대'에 대한 첫 번째 저항이었던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스크바를 배꼽으로 삼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살피고 동북 3성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을 계획 중이다. 소련발 사회주의가 지배했던 유라시아의 북방을 살피면서 20세기의 혁명이란 무엇이었나를 반추하고 성찰해 보려 한다.
아울러 '미래의 사회주의'를 궁리해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역시나 내가 꼽는 핵심어는 '고금합작'이다.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시키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의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지 모른다. '大同世界(대동세계)', '太平天下(태평천하)'라는 옛 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학습하기보다는 孔孟(공맹)을 읊고 老莊(노장)을 행하고 佛心(불심)을 닦을 것도 같다.
2017년은 한국에서도 의미심장한 해가 아닐 수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다. 민주화가 한 세대를 지나는 시점에 '大選(대선)'을 맞이한다. 산업화와 민주화, 근대화를 총결산하는 획기가 될 것이다. 반동이냐 반전이냐, 퇴행이냐 경장이냐를 가름하는 커다란 선택이 될 것이다.
'다른 백년'의 大計(대계)를 좌우하는 정초 선거가 될 것이다. 大史(대사)와 大局(대국), 大勢(대세)에 부합하는 대선이어야 할 것이다. 2년 후의 역사적 선택을 내다보면서 일단은 운남성의 성도, 쿤밍부터 가기로 한다. 대계와 대선에 앞서 大史(대사)부터 그려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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