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昆明天天是春天."
공항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띈 표어이다. '쿤밍은 날마다 봄날'이라는 뜻이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연중 20도 안팎을 오르내리는 봄의 도시이다.
비행기에서부터 첫인상이 남달랐다. 옆자리에 앉은 분이 형형색색 전통복장 차림이다. 찰랑찰랑 장식구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산간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임에 틀림없다. 실례를 무릅쓰고 출신을 여쭈었다. 묘(苗)족이라고 한다. 윈난(운남) 성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소수 민족이다.
'소수 민족'이라는 말에 어폐가 없지 않다. 중국 인구의 7%이다. 그런데 14억의 7%이니 1억에 육박한다. 중국 소수 민족의 규모가 일본 전체 인구에 가까운 것이다.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소수 민족만 55개에 이른다. 그 중 51개 민족이 윈난 성에 살고 있다. 4000명 이상으로 일정한 거주 지역을 가지고 있는 소수 민족도 25개에 달한다. 또 15개 소수 민족은 오로지 윈난 성에서만 살고 있다. 윈난 성이야말로 소수 민족의 보고인 셈이다. 성 인구의 40%를 차지한다.
인문 지리는 자연 지리와 불가분이다. 윈난 성의 면적은 일본이나 독일보다 조금 더 크다. 인구도 5000만 명이니 한국과 맞먹는다. 중국에서는 일개 지방이지만 사실상의 '준(準)국가'이다. 그런데 산지가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고원도 약 10%이다. 영토의 9할이 산악 지형이다.
때문에 한족의 이주 또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자급자족의 소규모 지역 사회가 곳곳에 산재했던 것이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마다 오막살이를 했다. 하더라도 내가 인사를 나눈 묘족만 1000만을 헤아린다. 유럽으로 치면 스웨덴 규모의 '차(次)국가'이다. 두 번째라는 야오족은 450만이다. 덴마크와 엇비슷하다. 유럽의 국민-국가(nation-state) 개념으로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윈난 성마저도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윈난 성은 자연 풍광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동부의 고산 지대부터 중부의 호수 지역을 지나 서쪽의 설산에 이르기까지 장관이 펼쳐진다.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하이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나는 오토바이를 빌려 사흘을 내달렸다. 호강이고 호사였다. 날씨는 100점이고 경치는 만점이다. 여행자의 극락이고 관광객의 천국이다. 天下絶景(천하절경)이 따로 없다.
이러한 기후와 환경 덕에 보이차를 비롯한 차 재배로 오래전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최근에는 네슬레와 맥스웰 등 커피도 생산한다. 중국 전역의 스타벅스에서는 윈난 산 커피도 맛볼 수 있다. 담배와 화초 또한 자랑거리이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오래 뒤처져 있었다. 2차, 3차 산업의 발전이 몹시 더디었다. 2015년 기준으로 GDP 3500달러 수준이다. 산시 성, 구이주이(귀주) 성과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성 중의 하나이다. 차라리 남쪽으로 이웃한 베트남과 비슷한 형편이다. 이 또한 지리 때문이다. 중국의 서남부 모퉁이에 자리한다. 동부 연안에서 시작된 개혁 개방의 물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쿤밍 또한 호젓한 호반 도시를 기대했다. 포근한 날씨에 호숫가를 산책하며 한 숨 쉬어가는 여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큰 오산이었다. 중국은 매번 예상을 빗나간다. 명색이 중국학자인 본업이 무색해질 정도이다. 변방의 한적한 지방 도시가 아니었다. 시내로 들어갈수록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뭐지 싶어 뒤늦게야 도시 정보를 확인했다. 이미 쿤밍은 인구 800만 명의 대도시였다. 2010년 이후에는 신장위구르자치구와 더불어 가장 많은 인프라 투자 자금이 몰려드는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과연 도시 전체가 공사판이었다. 땅 아래로는 4, 5, 6호선 지하철 신설 공사가 진행 중이고, 땅 위로는 72층 쌍둥이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다.
응당 고속철과 고속도로가 빠질 수가 없겠다. 북으로는 베이징으로 남으로는 상하이까지, 고속도로 20개 노선이 동시에 건설 중이다. 고속철도 못지않다. 12개 노선이 건설 중에 있다. 북으로는 샹그릴라를 지나 티베트의 라싸까지 이어지고, 동으로는 '향동(向東) 개방'의 중심지였던 광저우와 '향서(向西) 개방'의 허브인 충칭과 우르무치와도 연결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서남 내륙에 갇혀 있던 쿤밍 시가 중국 전역의 도시들과 촘촘하게 엮여가고 있는 것이다.
요체는 이 연결망이 중국 내부로 그치지 않음이다. 윈난 성은 동남아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베트남, 라오스, 태국(타이)은 물론이요 미얀마(버마)와도 이어진다. 미얀마를 지나면 곧장 남아시아와 접속한다. 동북아와 동남아,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한복판에 윈난 성과 쿤밍 시가 자리하는 것이다.
지리는 재차 쿤밍의 숙명이다. 중국이 '혁명 국가'에서 '열린 제국'으로 변모하면서, 윈난의 운명 또한 달라지는 것이다. 점차적으로 제국의 南門(남문)이 되고 있다. 점진적으로 지리 혁명의 허브가 되어간다. 새 역사의 봄맞이가 한창이다. 날마다 봄날이고, 나날이 봄날이다.
제국의 남문
제국의 남문이 크게, 활짝 열렸다. 南大門(남대문)이라 할 만하다. 2015년으로 3회째를 맞은 중국-남아시아 박람회(China-South Asia Expo)가 대표적이다. 일대일로의 발족과 더불어 쿤밍에서 열리는 새로운 국제 행사이다. 그 전에는 쿤밍 수출입 박람회라는 것이 있었다. 23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90년대 이래 윈난 성과 동남아시아의 활발한 경제 교류를 이끌었다. 이제는 남아시아까지 포함하여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두 지역을 아우르는 박람회가 같은 시기에 열린다.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는 6월 중순의 2주간이다. 윈난 성 기업들의 해외 진출과 해외 기업들의 중국 진출의 교두보가 된다. 쿤밍 시 일대가 유라시아 남부의 허브로 변모하는 것이다. 2015년에는 75개 국가, 6000개 기업, 2만여 명의 비즈니스맨들이 참여했다.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여행, 에너지, 인프라, 물류,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새로운 터전도 마련했다. 2013년 착공에 들어간 쿤밍국제박람회장(昆明滇池国际会展中心)이 2015년 개장했다. 쿤밍의 상징인 커다란 호수(滇池) 근방에 자리한다. 박람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은 인민공원으로 활용된다. 구경삼아 가보았다. 중국답게 넓디넓었다. 이 너른 자리가 다민족 다인종의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는 박람회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시안의 봄'에 못지않은 '쿤밍의 봄'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주변으로도 건설 붐이 한창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구역을 조성한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와 고급 쇼핑몰이 들어서고 있다.
박람회에서는 매년 '올해의 국가'를 선정해 특별 전시회도 열린다. 2015년의 주인공은 인도였다. 인도의 산업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전람회가 열렸다. 인도의 모디 총리가 시안에서 시진핑과 정상 회담을 가진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그래서 인도의 외교부 장관이 직접 박람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윈난 대학교에 중국 최초의 요가학부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인도에서 직접 교수들을 파견하여 인도의 철학과 사상, 수행법을 전수할 것이라고 한다. 물류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사상 대국과 종교 대국의 문화 교류, 문류의 일환이다.
인도 외에도 31개 국가에서 외교 사절단을 보냈다고 한다. 몰디브에서는 대통령이 몸소 방문했고, 라오스에서는 수상이 직접 참석했다.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에서는 관련 부처 장관들이 참여했다. 이들을 맞이한 중국 대표는 국가 부주석 리위안차오(李源潮)였다.
해외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대거 방문은 윈난 대학교와 쿤밍 대학교 등 쿤밍의 주요 대학생들의 '학습장'이 되어주기도 한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언어를 전공하는 약 2000명의 학생들이 박람회 기간 안내자 겸 통역자로 자원봉사 활동을 한 것이다. 두 종합 대학 역시 일대일로와 보조를 맞추어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구하는 특성화 대학으로 변모하고 있다.
내가 찾은 윈난 대학교에서도 미얀마 어, 방글라데시 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석·박사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국어인 중국어에 세계어인 영어를 장착하고 아시아 언어 하나씩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유라시아 시대'를 예비하는 인재상에 가까워 보였다. '유라시아학'의 맹아와 단초도 발견한다.
중국 전도를 치우고 유라시아 지도를 펼쳐본다. 國史(국사)가 역사를 분절하듯이, 國圖(국도)는 세계를 분획한다. 지방(local)과 세계(global)의 복합적 관계망에 대한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종종 국경을 지운 유라시아 전도 위에 도시와 도시를 이어 새 지도를 그려본다. 거리 감각과 공간 감각을 재조정하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는 쿤밍을 중심에 두고 유라시아를 다시 살핀다. 쿤밍에서 상하이까지가 약 2000킬로미터이다. 꼭 그만큼의 거리를 서남진하면 미얀마의 양곤에 이른다. 태평양(동해)으로 향하는 상하이와 인도양(서해)으로 향하는 양곤을 잇는 중간 지점에 쿤밍이 자리하는 것이다. 남쪽으로 또 그만큼의 거리를 뻗어 가면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을 지나 태국의 수도 방콕까지 닿는다. 조금 더 내려가면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지나 싱가포르까지 이어진다. 상하이와 양곤, 싱가포르를 잇는 삼각 꼭짓점에 쿤밍이 있는 것이다. 새 지리의 배꼽이고 허브이다.
괜히 이 도시들을 거론한 것이 아니다. 중국이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건설하고 있는 고속철도의 중간 역들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지정학(Geo-Politics)적 분류와 지역학(Area Studies)적 구획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동북아와 동남아,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를 나누고 쪼개었던 지적이고 지리적인 칸막이들을 거두고 치우고 지워가고 있다.
지경학을 통하여 중국의 서남부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를 한 몸, 한 통으로 묶어가는 새로운 인문 지리가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후안강이 말하는 '지리 혁명'의 한 사례일 것이며, 19세기의 공자진이 구상했던 '신천하'의 현현일 것이다. 장차 '남유라시아'라고 할 것인가?
동아시아와는 달리 동남아와 남아시아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 200년의 역사도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남유라시아'라는 명명이 正名(정명)에 한층 가까울 듯하다.
남유라시아 : K2K, BCIM, GMS
'남유라시아'의 지리 혁명은 각양각색이다. 다층적이며 복합적이다. 크게 세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도시 간 연합, 국가 간 연대, 지역 간 합작이다.
먼저 K2K 포럼은 도시 간 연합이다. 'Kunming to Kolkata' 혹은 'Kolkata to Kunming'의 약자이다. 쿤밍과 콜카타 간 정기 포럼을 일컫는다. 인도의 동북부 벵골 주에 자리한 콜카타는 'Look East' 정책의 근간이 되는 곳이다. 최근에는 'Act East' 정책으로 진화했다. 중국 서남부에 자리한 쿤밍은 향남(向南) 개방의 거점이다.
이 양 도시가 2013년 10월 콜카타에서 자매 도시를 맺었다. 2014년에는 쿤밍으로 자리를 옮겨 '21세기형 中印大同(중인대동)'을 다짐하는 쿤밍 선언을 발표한다. 도시 간 연합은 세계화, 도시화, 정보화의 필연적 추세라며, 경제와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공영(win-win)을 약속했다.
양 도시는 공히 풍부한 문화유산과 자연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불교 순례'와 '생태 여행' 등 영성을 깨우고 양생을 북돋는 관광 상품도 함께 만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일단 쿤밍에서 콜카타까지 장장 2800킬로미터에 이르는 고속도로부터 짓기로 했다. 남중국과 동인도를 잇는 세계 최장의 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국가 간 연대로는 BCIM이 손꼽힌다. 방글라데시-중국-인도-미얀마 회랑(Bangladesh-China-India-Myanmar corridor)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 역시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제출되었다. 2013년 12월 공식 출범했다.
자연스레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자리한 미얀마도 들썩인다. '쇄국 정책'을 오래 고수했던 나라의 빗장을 풀어낸다. 경제 수도 양곤까지 고속철이 이어지고, 벵골 만의 차욱피우(kyaukpyu)에는 항구 건설이 한창이다. 차욱피우에서 쿤밍까지 약 1000킬로미터의 송유관도 건설될 예정이다.
인도양의 동쪽인 벵골 만은 인도의 동북부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도양의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만과 아라비아 해를 지나 동아프리카까지 이어진다. 미얀마가 동아프리카와 중동을 중국과 연결하는 또 다른 통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벵골 만 또한 남유라시아의 '南海(남해)'가 되어 간다.
이 고속철과 고속도로, 항만과 송유관을 따라서 BCIM 분업 체제도 만들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4개국의 합작이 '세계의 공장'을 담당할 것이라며 'Made in BCIM'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 4개국의 인구만 따져도 30억, 인류의 절반이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지난 20세기 방글라데시와 인도는 '남아시아'로 분류되었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중국은 흔히 '동아시아'라고 했다.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분류였다. 동인도와 남중국은 천년이 넘도록 불교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작동했던 공간이다. 이를 따라 물질과 정신의 교류 또한 활달했다. 서방 이전(Pre-Western)의 지리 문명이 BCIM으로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인문 지리가 오래된 자연 지리와 무관할 수 없다. 지역 간 합작으로는 GMS가 돋보인다. 메콩 강 경제권(Greater Mekong Subregion) 협력 프로그램이다. 메콩 강을 젖줄로 삼아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의 공생과 공영을 도모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와 중국을 일컫는다. 현지 언론에서는 GMS 국가(GMS Countries)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남아시아연합, 즉 아세안과도 차별되는 또 다른 무리 짓기이다. 메콩강을 줄기 삼아 남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아우르는 발상이다. 2014년 9월 개통한 노이바이(Noi Bai)-라오까이(Lao Cai) 고속도로가 대표적이다. 인도차이나의 중심인 하노이와 중국의 국경을 직선으로 잇는다. 종전 12시간에서 3~4시간으로 대폭 단축되었다. GMS 국가들 간의 교통 회랑 건설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중국-베트남은 또 다른 고속도로를 두 개 더 건설할 예정이다.
하노이에 머물던 시절, 하노이와 하이퐁의 모스크가 몹시 신기했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중국에서 독립하기 이전, 즉 대당제국 시절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던 곳이다. 하이퐁과 하노이에서도 아랍 상인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모여 살았던 것이다. 벵골 만과 남중국해를 잇는 바닷길의 중간 역이었다. 하여 남중국해를 두고 양국이 갈등하고 있다는 소식 또한 일방적이고 일면적이다. 실제로는 중국의 해양 실크로드 구상에 베트남도 긴박하게 연결되고 있다.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만으로는 GMS 국가들의 인프라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IB가 주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차이나의 내륙 국가로는 라오스가 있다. 바다를 면하고 있지 않은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국가이다. 이 내륙 국가가 세계와 연결되는 길은 육로와 하늘길 뿐이다. 아세안에서 가장 빠른 고속철도를 중국이 건설하고 있다. 지난 2015년 12월 2일은 라오스 건국 4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라오스 국가주석 촘말리 사야손과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 장더장(張德江)이 고속철 착공식에 함께 참석했다. 비엔티엔의 시장과 쿤밍의 시장이 이들과 동반했다. 쿤밍 시장은 중국의 동부보다도 GMS 국가를 더 자주 방문한다.
때문에 향후 '省-國(성-국) 체제'라는 조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K2K도 BCIM도 GMS도 중국의 중앙 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이 아니다. 윈난 성이 주체가 된다. 윈난 성을 지방 정부라고 낮추기도 어렵다. 규모와 인구에서 준국가에 방불하기 때문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주도하며 카스피 해와 아라비아 해를 지나 지중해까지 가닿은 연결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윈난 성 또한 메콩 강 국가들과 합작하여 황하-장강-메콩 강을 잇는 문명 복합체를 만들어간다.
나아가 벵골 만을 지나 페르시아 만, 홍해를 잇고 동아프리카까지 연결된다. 얼핏 정화의 대원정이 떠오른다. 어설픈 연상도, 억지스런 비유도 아니다. 정화는 바로 이 윈난 성에 살고 있던 무슬림 집안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뿌리'의 소산이다.
윈난史
쿤밍에는 철도 박물관이 있다. 쿤밍이 남유라시아의 교통 허브가 되고 있는 만큼 호기심이 발동했다.
100년 전 기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20세기 초에도 철도 열기가 뜨거웠던 것이다. 윈난성은 중국에서 철도가 가장 먼저 연결되었던 곳 중의 하나였다. 쿤밍과 하이퐁을 오갔다는 증기 기관차와 프랑스산 디젤 기관도 구경할 수 있었다. 1914년에 첫 운행을 시작하여 무려 65년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 즉 개혁 개방에 이르기까지 이 구식 열차를 타고 다닌 것이다. 기관실 내부에는 60년이 묵은 매캐한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나 철도는 제국주의와 불가분이었다. 유럽 열강들의 중국 과분(瓜分)과 직결되었다. 첫 삽을 뜬 것은 프랑스였다. 인도차이나의 철도 연결망을 완성한 후 남중국까지 노린 것이다. 국경을 맞댄 윈난 성이 첫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04년에서 1910년까지 윈난-베트남 철도를 건설한다. 100년 전에 이미 하노이와 쿤밍을 연결시킨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남중국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펼치다 이 열차를 타고 하노이에 입성했던 인물이 바로 호치민이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에는 영국이 접근했다. 윈난 성 위에 자리한 티베트는 이미 영국의 간접 통치 아래 있었다. 이제는 프랑스가 독점적으로 혜택을 누리던 윈난 성까지 넘보려 든 것이다. 마침 대영제국이 품고 있는 미얀마(당시 버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미얀마를 윈난 성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 양곤(당시 랭군)-쿤밍 철도가 완공되면 자연스레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콜카타(당시 캘커타)까지도 연결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완공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목하 건설 중인 K2K 노선의 원조 격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즉 동북에서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있을 때, 서남에서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제국이 확장되고, 대영제국 또한 그 판도를 더욱 넓혀가고 있었다. 연합국이나 추축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난징에 자리한 국민당 정부는 겨우 중원만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윈난 성은 이 권력의 진공 속에서 군벌이 통치하는 사실상의 자치 상태였다. 다시 말해 '중화민국'의 외부에 자리한 유사 독립국이었던 것이다. 새삼 준국가로서의 윈난사에 흥미가 솟아난다. 살펴보니 비단 서구와 중국 사이의 100년사만도 아니다.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의 1000년사도 절묘하게 포개져 있는 흥미로운 장소였다. 윈난성 최후의 독립 왕국이 자리했던 따리(大理)부터 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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